영화 ‘폭스파이어’는 세상을 ‘부수고자’했던 10대 소녀들의 열망과 상처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 여자애가 곤경에 빠지면 다른 여자애가 들어줘야 하는 법이지.”
그렇게 두 소녀의 하룻밤은 그들만의 연대와 혁명을 알리는 시작이 됐다. 프랑스 영화 ‘폭스파이어’(감독 로랑 캉테)는 소녀 몇 명이 남성 사회를 향해 일으켰던 아주 작은 ‘혁명’에 관한 이야기다. 실제라면 신문 사회면 한 귀퉁이에서나 볼 수 있을 해프닝이지만, 영화 속 소녀들의 반란은 불꽃같이 이글거리는 분노와 유리처럼 깨질 듯한 연약하고 다치기 쉬운 연민, 변화를 향한 거센 열망, 서로를 향한 순수한 우정과 연대, 완벽한 공유를 통한 공동체 건설 등 본질적이고 이상적인 혁명 요소를 모두 갖췄다.
남성 중심 폭력적 사회 고발
영화 ‘클래스’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거장 로랑 캉테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사회를 부수고자 나섰던 10대 소녀들의 열망과 상처를 건조한 시선으로 묘사하고 따뜻한 가슴으로 품는다. 1993년 출간한 조이스 캐럴 오츠의 소설 ‘폭스파이어 : 소녀 갱의 고백’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96년 앤젤리나 졸리 주연으로 한 차례 스크린에 옮겨진 적이 있으며 이번이 두 번째다.
1950년대 중반 미국 뉴욕의 한 동네가 배경이다. 어느 날 밤 담을 넘어 친구를 찾은 소녀는 렉스(레이븐 애덤슨 분), 그를 받아줬던 친구는 매디(케이티 코세니 분)다. 이 둘을 중심으로 학교에는 뭉쳐 다니는 몇몇 여학생이 있다. 어느 날 남자 수학교사가 수업 중 여학생 리타(매들린 비손 분)를 교탁 앞으로 불러내 모욕하고 ‘방과후 학습’을 핑계로 남으라는 수상한 지시를 한다. 리타에게 “약하게 보이면 안 된다. 질질 짜는 것만으론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당당하게 ‘꺼져버려’라고 외쳐라”고 주문한 렉스를 비롯해 일군의 여학생은 아무도 몰래 수학교사의 차에 ‘난 수학을 가르치고 여중생을 따먹어요’라는 대문짝만한 낙서를 남겨 그를 동네 웃음거리로 만든다. 비밀 소녀단 폭스파이어의 첫 작전이었고 대대적인 성공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폭스파이어는 결성식과 선언식을 갖고 본격적인 ‘조직 활동’을 시작한다. 이들은 서로에게 맹세한다.
“폭스파이어 단원은 영원히 조직을 배신하지 않으며 조직과 다른 조직원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 폭스파이어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폭스파이어는 결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폭스파이어는 타오르고 타오른다!”
리더 렉스는 퇴물 공산주의자인 한 신부로부터 영감을 받아 정의와 혁명, 계급투쟁 같은 발상을 폭스파이어에 빌려온다. 그러나 폭스파이어에게 가장 명확한 적이자 타도 대상은 남성이며, 유일한 동지이자 연대 대상은 여성이다. 조카를 성폭행하려던 매디의 삼촌을 흠씬 두들겨 팬 일부터 애완견 판매점 앞 ‘동물 권익 보호’ 피켓 시위, 명품 옷가게 낙서 시위(‘달러는 똥이고 죽음이다’), 여자애를 희롱하는 남학생 혼내주기까지 그들은 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차를 훔쳐 도망가다 경찰에 걸리면서 리더인 렉스는 법정에서 징역형을, 나머지 단원은 ‘보호관찰’ 처분을 받게 된다. 렉스가 수감된 동안 폭스파이어는 사실상 와해된 듯했으나, 리더가 출감하자 조직은 다시 활기를 띤다. 렉스는 허름한 농가를 사들여 아지트를 마련하고, ‘모든 고통 받는 여자들의 쉼터’를 표방한다. 단원이 몇 명 더 늘고, 그들 모두는 아지트에서 단체생활을 한다. ‘능력에 따라 벌고 필요에 따라 나눠 쓰는’ 생활을 하지만, 결국 돈에 쪼들리던 그들은 길거리에서 여자를 노리는 남자들을 유혹한 뒤 지갑을 빼앗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범행 수법이 점차 대담해지면서 그들은 수감 기간 렉스의 후견자였던 한 상류층 가정을 대상으로 새로운 작전을 계획한다.
변화 열망하는 청춘에 대한 찬가
영화는 원작 소설대로 비밀단체 폭스파이어의 ‘기록자’를 자처했던 단원 매디의 회고담 형식으로 진행된다. 깡마르고 긴 다리를 가진 소녀이자 폭스파이어의 지도자인 렉스, 좀처럼 조직과 어울리지 못했던 단원이자 영화 속 화자인 매디, 다소 멍청하고 자존감이 결여됐지만 남자를 끄는 매력이 있던 리타 등 각자 개성을 가진 소녀들의 이야기를 통해 캉테 감독은 남성 중심의 폭력적인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상처 입은 소녀들이 세상에 저항하며 성장해가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1950년대 중반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프랑스 감독인 캉테가 미국 소설을 원작으로 미국 역사와 사회를 무대로 한 영어 영화를 찍기로 한 이유이기도 하다. 캉테 감독은 “미래는 밝고 뭐든지 가능하다고 하는 ‘아메리칸 드림’이란 이미지에 도전하고 싶었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대성공이 아니라 계층 간 갈등, 시민운동, 파업, 평화주의와 반항의 역사”라고 연출의 변을 밝혔다.
소녀들은 연약했지만 그들의 반란은 뜨겁고 강렬했다. 불꽃처럼 짧게 타올라 순식간에 사그라들었지만, 모든 혁명이 그렇듯 소녀들의 그것도 이상을 갈망하는 인류의 존재 증명이라는 의미에선 영원히 반복되는 역사적 테마였다. ‘폭스파이어’는 누구나 뜨거웠던 시절, 변화의 열망으로 가득했던 청춘에 대한 찬가이자, 순수한 자유 및 연대를 꿈꿔왔던 인류의 멈추지 않는 희망과 수많은 좌절의 역사에 대한 가슴 따뜻한 위로이며 헌사다.
영화 속에서 렉스에게 지혜를 전하는 현자이자 늙은 신부는 공산주의에 열광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만일 혁명이 끝나면 사람들은 그제야 꿈에서 깨듯 이렇게 말할걸. 목표를 위해 달렸던 옛 시절이 행복했다고 말이야.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네.”
그리고 렉스를 가두려는 재판관을 보며 매디는 말한다.
“왜 이 사회는 소녀 하나를 이토록 무서워했을까.”
그리고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던 그 소녀는 어디로 갔을까. 영화는 매디의 시선으로 렉스의 마지막 종적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