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8일 스토리 창작 소프트웨어 ‘스토리헬퍼’를 소개하는 이인화 이화여대 교수.
몇몇 소스를 주면 자동으로 소설을 만들어내는 창작 로봇을 여러 분야에서 활용한 지는 이미 오래다. 영국 국영방송 BBC와 정보기술(IT) 전문잡지 ‘와이어드’는 2008년 러시아에서 출간해 베스트셀러가 된 ‘트루 러브’를 컴퓨터(로봇)가 쓴 최초 소설이라고 소개했다. 러시아 한 출판사의 편집장이던 알렉산더 프로코프비치가 아이디어를 내고 언어학자, 전산 전문가 등이 약 8개월간 매달려 소설 쓰기 프로그램을 완성했다고 한다.
‘포브스’지 자동 기사작성 로봇 ‘퀼’
이 프로그램은 17종의 소설 데이터를 입력하면 전산규칙에 따라 짜깁기하는 형태로 소설을 만드는데, 320쪽 분량의 소설을 사흘 만에 써냈다. 프로코프비치에 따르면, 이 컴퓨터 소설의 기본 골격(캐릭터 등)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문체는 무라카미 하루키에게서 각각 따왔다고 한다. 이 소설을 두고 ‘진정한 창작물인가’라는 논쟁이 벌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자동 기사작성 로봇 역시 일선 현장에 도입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스포츠 콘텐츠를 제공하는 미국 스탯시트(Statsheet)사는 스포츠 기사에 로봇을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경기 상황을 데이터로 받아 이를 실시간으로 중계하거나 요약된 기사로 정리해 전송한다. 프로그램은 경기 내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을 데이터에서 자동으로 잡아내 문장을 만든다. 차트와 그래프를 활용하는 건 기본이다. 이번 주 최우수선수(MVP)를 미리 예측하기도 하고 신기록 등도 알아서 확인한다. 2010년 이 회사 로봇기자의 미국 대학농구 문자중계는 큰 호평을 받았다. 현재는 미국 프로야구와 프로농구로 중계 영역을 넓혔다.
로봇기자이기 때문에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둔 기사만 쓴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팀이나 선수를 설정 후 입맛에 맞는 내용만 확인할 수 있다. 독자가 만일 미국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 팬이라면 이번 시즌 양키스가 보스턴 레드삭스에 비해 실책이 적다는 사실을 꼭 짚어 알려주는 식이다.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쓰는 스포츠 기사의 경우, 오랜 세월에 걸쳐 기사작성 틀이 고정돼 있어 로봇기자를 활용하기 유리하다.
현재 ‘포브스’지에 내러티브사이언스(Narrtive Science)라는 이름으로 기사를 쓰는 자동 기사작성 로봇 퀼(Quill) 역시 처음에는 야구경기 기사를 만들려고 고안한 프로그램이었다. 대학 산학협동 프로그램으로 출발한 퀼은 현재 ‘포브스’지에서 기업 전망과 분석, 주가 동향 등 산업 분야 기사를 작성한다.
퀼은 매일 인터넷으로 기사를 쓰는데, 8월 5일에는 의류브랜드 랄프 로렌사의 기업이익 감소에도 주가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는 기사를 썼다. 지난 분기와 연속 3달간 실적 등을 놓고 비교해 내놓은 결과다.
창작에 대한 근원적 의문 제기
1 알렉산더 프로코프비치가 컴퓨터가 쓴 소설 ‘트루 러브’를 소개하고 있다. 2 ‘스토리헬퍼’ 프로그램의 메인 화면. 웹 기반 서비스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3 기사작성 로봇 퀼이 8월 5일 ‘포브스’지에 쓴 기사. 의류브랜드 랄프 로렌사의 주가를 전망하고 있다.
이처럼 지금까지 로봇기자의 활동무대는 주로 데이터 수집이 용이한 경제, 스포츠 분야에 한정돼 있지만, 데이터 수집과 처리 기술이 발전하면 더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중 한 분야가 2012년 미국 대통령선거(대선)에서 확인된 정치기사다. 오바마 대선후보 진영에서 활용한 드림캐처(Dreamcatcher)는 유권자들이 콜센터와 통화한 내용이나 인터넷 공간, 유세 현장에서 남긴 글 등을 종합해 일정 흐름과 패턴을 찾아낸 뒤 기사화했다. 전문가들은 “로봇기자의 핵심은 대량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처리하는 기술”이라며 “따라서 정치 분석에서도 전산규칙 개발 성과를 바탕으로 한 로봇기자 활용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자동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 작가나 기자 대신 스토리라인 또는 기획안을 짜주고 캐릭터 설정 등을 조언하는 프로그램은 현장에서 활용도가 더 높다. 이른바 스토리텔링 저작 도구로, 스토리작가에게는 낯설지 않다.
영화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조윤진(27·동국대 대학원 시나리오과) 씨는 “할리우드에선 창작을 도와주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사용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은 ‘드라마티카(Dramatica)’라는 것으로 캐릭터 설정, 스토리가이드, 플롯 짜기 등을 지원한다. 소설에서도 비슷한 기능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등장했는데 영어 기반의 뉴노블리스트(New Novelist)가 바로 그것이다.
국내에서도 이런 창작지원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7월 18일 이인화(47) 이화여대 교수는 엔씨소프트와 공동 개발한 한국형 스토리텔링 지원 프로그램 ‘스토리헬퍼’를 공개했다. 막연하게 떠오른 창작 아이디어를 장르, 주인공 나이, 성별, 관심사, 성적 취향, 편부·편모 여부 등 몇 가지 항목만 입력해도 기존에 나온 1406개 시나리오 데이터를 조합해 이야기가 어떻게 발전해나갈지를 보여준다. 크게 창의적 발상단계인 ‘아이디에이션(ideation)’을 거쳐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통해 대사 없는 시나리오인 트리트먼트(treatment)까지 발전시킨다. 자신의 발상과 가장 가까운 트리트먼트 샘플이 나오면 이를 수정해나가면서 영화 시나리오와 소설 등의 스토리 작품을 만든다.
하지만 이들 프로그램에는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있다. 서울예술대 영화과 송윤경(27) 씨는 “입력 항목 중에 주인공의 결혼 여부나 직업 등이야 딱 떨어지지만, 예술작품의 주제의식을 단 하나만 꼬집어 이거라고 정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영화 ‘올드보이’에 대해 ‘무엇에 관한 영화냐’는 질문에 영화를 만든 박찬욱 감독조차 “탈출이면서 복수일 수도 있고 금지된 사랑이자 추적일 수 있다”고 했는데, 이들 프로그램의 경우 단순화해 하나만을 찾아내거나 주제를 찾는 데 실패할 확률이 크다는 것.
이 때문에 과연 프로그램에 의해 조합 또는 분석된 글이 창작이 맞느냐는 근원적 의문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이인화 교수는 “예술에서 인간의 창의력은 사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하지만 활용 방안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실제 작품이 나오기 전 이야기 전체에 대한 프로토타입을 미리 볼 수 있는 모형화 프로그램이 창작에 가장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