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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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

19세 기차여행 중 지린성으로 납치당해 모텔 생활 아이 낳고 탈출, 식당일 하며 미래가 없는 하루하루

  • 김승재 YTN 기자·전 베이징 특파원 sjkim@ytn.co.kr

    입력2013-08-12 1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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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은 베이징에 있다.’ 중국 베이징에서 본 남북관계 현실을 짚어내는 새 연재를 시작한다. 3년간의 중국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3월 귀국한 YTN 김승재 기자가 각계각층 북한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북한의 현실 한가운데로 안내한다.

    3년 2개월. 필자가 중국에서 특파원으로 보낸 시간이다. 2010년 1월 20일 베이징서우두국제공항에 내려 2013년 3월 18일 김포공항으로 돌아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다. 그러나 이 시기 중국은 세계 ‘빅2’로 우뚝 서 자신의 위상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또 후진타오 시대가 저물고 시진핑 시대를 맞이하는 변화도 겪었다.

    무엇보다 이 기간에 북한이 전 세계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고(故)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여덟 차례 중국 방문 가운데 네 차례가 이 때 있었다. 급기야 김정일의 사망과 김정은의 권력 등극, 곧 이은 미사일 발사와 3차 핵실험 감행까지 전 세계를 뒤흔든 1면 톱 사건이 줄줄이 이어졌다.

    격변기의 북한, 그 닫힌 사회에 대한 궁금증은 어느 때보다 컸다. 폐쇄국가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창은 중국이었다. 그래서 세계는 ‘빅2’로서뿐 아니라 ‘북한 후견국’으로서의 중국을 주목했다. 특파원 기간 필자는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종류의 북한 관련 취재를 진행했다. 따져보니 관련 기사만 400여 건. 어느 순간 데스크로부터 “이제 북한 보도는 제발 그만 좀 하라”는 압력(?)이 날아오기도 했다.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주문이 식기도 전 북한발(發) 빅 이슈는 계속해서 터졌고, 그때마다 데스크가 내게 요구하는 기사는 결국 북한 뉴스였기 때문이다.

    정보원부터 일반인까지 다양



    그녀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 앞에서 방송 리포트를 녹화하고 있는 필자.

    중국에서 나는 여러 유형의 북한 사람을 만났다. 북한 당국의 고위급 인사와 중진 엘리트부터 50대 평양 여성과 20대 여성 등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함께 폭음하고 어깨를 결은 채 노래를 부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은밀한 장소에서 남들의 시선을 피해가며 만난 인사도 있다. 어떤 이는 뚜렷한 자본주의적 시각과 개방적 태도로 필자를 놀라게 했고, 또 어떤 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두철미 북한식 사상으로 무장한 모습을 보여 필자를 두렵게 했다.

    북한 사람들만이 정보원은 아니었다. 관련 정보가 오가는 길목에는 중국인과 미국인, 한국인도 서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신분에 대한 기밀 유지를 만남 조건으로 내걸었다. 베이징과 상하이, 북·중 접경도시 여러 곳에서 필자는 이들과 비밀리에 만남을 가졌다. 모두 북한 속내를 읽을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민감한 시기다 보니 취재 과정에서 겪은 사연도 적지 않다. 황당한 교통사고부터 중국 공안이나 군부대에 억류당하는 일까지 제각각이었다. 그 후로는 중국 당국에 적발되지 않고 취재하는 법을 익힐 수 있었으니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또 중국 정부가 늘 취재를 막기만 한 것은 아니다. 친절하게도 출입금지 구역 안으로 안내해주며 북한 취재를 도와주는 일도 있었다. 어제는 취재하지 말라고 겁주던 이들이 오늘은 금지구역으로 인솔해 취재 포인트까지 찍어주는 일이 벌어지는 재미있는 나라가 바로 중국이었다.

    중국에서 한국 특파원이 진행하는 북한 취재는 대부분 행여 들킬세라 초긴장 상태에서 이뤄진다. 여러 취재원을 만나는 과정에서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송고한 기사가 끝내 오보로 드러났을 때의 부끄러움은 더는 북한 취재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만들곤 했지만, 오래갈 수는 없었다. 또 다른 취재에서 ‘새로운 것’의 발견, 곧 특종의 기쁨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입 취재를 하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도대체 내 직업은 무엇인가. 기자인가, 정보요원인가.’

    천안함 폭침 사건이 발생한 2010년 3월 26일. 이날 오전 중국 랴오닝성 뤼순에서는 남북한 인사들이 만나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행사였다. 뤼순감옥에서 형장 이슬로 사라진 안 의사의 넋을 기리는 자리. 남한에서는 당시 박진 의원 등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들이, 북한에서는 장재언 조선종교인협의회장 등 6명이 참석했다. 필자가 특파원으로 부임한 지 두 달이 갓 지난 시점이었다.

    안 의사 관련 취재를 마치고 다롄에서 베이징 복귀를 준비하던 중 천안함 폭침 소식을 들었다. 한국의 많은 특파원이 랴오닝성 단둥으로 모여들었다. 단둥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신의주와 마주하는 지역이다. 중국에서 가장 많은 북한 사람이 찾는 지역으로, 북한 이슈가 터질 때마다 세계 언론이 단골로 찾는 곳이기도 하다.

    단둥 거리는 기자들로 가득했다. 북한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생소한 새내기 중국 특파원도 무엇인가 찾으려고 밑도 끝도 없이 뛰어다녔다. 발품을 팔고 다니던 어느 날, 드디어 북한 주민과 접촉할 수 있다는 취재원을 만났다. 평양 시민이란다.

    그녀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

    천안함 침몰 사건이 발생한 2010년 3월 26일 중국 랴오닝성 뤼순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행사. 공교롭게도 남한 국회의원과 북측 관계자들이 참석한 행사였다.

    2010년 3월 30일 밤, 필자와 카메라맨은 취재원 A씨와 함께 단둥 시내 모처로 향했다. 일단 남한 기자 신분은 감추기로 했다. 어둠 속에서 만난 사람들은 50대 여성 2명으로, 평양 시민이었다. 예상보다 살집이 두둑했고 여유도 있어 보였다. 준비된 승합차에 함께 타고 시내의 한 아파트로 이동했다. 조심스럽게 몇 가지를 물었다. 천안함 폭침 사건에 대해 아는지, 요즘 평양 분위기는 어떤지. 이들은 천안함 폭침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평양 생활에 대해서는 시민들이 아주 잘 살고 있다는 얘기를 거듭 강조했다.

    단둥에서 만난 평양 시민

    이들과 함께 찾아간 아파트에선 남성 2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목사, 다른 한 명은 평양 여성들을 만나기로 한 남한의 친척이었다. 목사의 도움으로 남북한 주민이 비밀리에 만나는 현장이었던 것. 친척 안부를 물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니 이전에도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이들의 만남을 우리는 조용히 촬영했다.

    친척 간 대화가 마무리될 무렵, 필자가 신분을 밝혔다. 난리가 났다. 모임을 주선한 목사가 당장 분노를 터뜨렸다. “보도하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도 이어졌다. 평양에서 온 두 여인은 “보도하면 우리 모두 죽게 된다”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도무지 설득이 불가능한 상황. 취재를 접은 채 걱정하지 말라고 달래며 나오는데 남한 친척 남성이 따라 나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필자의 두 손을 부여잡은 그도 눈물을 보였다. “제발 살려주세요. 부탁합니다.” 결국 필자는 기사를 포기했다. 특파원 기간 처음 만난 북한 주민 이야기는 이렇게 사라졌다.

    그녀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
    기회는 이내 다시 찾아왔다. 며칠 뒤 나는 또 다른 북한 여성을 만났다. 취재원으로부터 탈북 여성이 단둥의 한 식당에서 일한다는 정보를 얻고 곧바로 식당을 방문했다. 음식을 주문하면서 여성을 살폈다. 바짝 마른 작은 몸, 두 뺨은 동상에 걸린 듯 붉다. 말투는 분명 북한 말투였다. 이튿날 점심, 다시 식당을 찾아 방을 잡았다. 여성이 주문을 받으러 오자 재빨리 말을 건넸다.

    “북한에서 왔죠? 걱정하지 말아요, 해가 되는 일은 없을 테니. 따로 만나 얘기 좀 할 수 있겠어요?”

    여성은 깜짝 놀랬다. 수차례 안심시킨 뒤에야 휴대전화번호를 받을 수 있었다. 여성은 일을 다 마친 밤늦게나 나올 수 있다고 했다. 4월 6일 우리는 이 여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 취재원의 집에서 만났다.

    “초면엔 아무 음료수도 못 마셔”

    이 북한 여성 K씨가 전한 사연은 이렇다. 2008년 가을, 당시 19세였던 그는 북한에서 장거리 기차여행을 하고 있었다. 기차 안에서 한 중년 부부와 말을 나누던 그는 그들이 건네준 물을 마시고는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택시 안이었다. 도착한 곳은 중국 지린성의 한 모텔. 납치였다.

    나중에 K씨가 알게 된 사실은 이렇다. K씨를 납치한 것은 조선족(재중국 동포) 부부.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이들 부부는 북한군 경계병에게 8000위안, 우리 돈으로 130만 원 남짓을 건넸다. 그러고는 중국에 넘어와 K씨를 1만5000위안, 우리 돈 240만 원 정도에 팔았다. 그 과정에는 중국 공안당국 관계자도 가담했다고 했다.

    K씨는 북한에서 넘어온 다른 여성 7~8명과 단체생활을 했다. 북한에서의 생활이 너무 힘들어 스스로 원해서 팔려온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K씨는 모텔 생활을 하는 동안 중국인 청년을 만나 동거에 들어갔고, 딸을 낳았다. 그러나 자신을 노리개 취급하는 남자에게 질려 이내 탈출을 감행하게 된다. 졸지에 탈북자가 돼 갓난아기인 딸과 함께 북·중 접경지역을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돼지 사육장과 식당을 오가는 생활이 이어졌다.

    K씨는 이제 두 살이 된 딸의 미래를 가장 걱정했다. 몸이 아무리 고돼도 아무 생각 없이 일만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이의 인생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다며 울먹였다. K씨의 유일한 소원은 딸과 함께 한국에 가거나, 아예 중국인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뒷돈을 주고 중국인 신분증을 사는 데 필요한 비용은 3만 위안이라고 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3년을 내리 식당에서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가느다란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2시간 가까이 얘기하는 동안 K씨는 입이 마른지 연신 혀로 입술을 적셨다. 음료수라도 좀 마셔가며 얘기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끝까지 탁자 위 음료수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로는 처음 만난 사람과의 자리에선 아무것도 마실 수가 없어요.” 운명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꿔놓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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