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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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마디 @오메가

제1화 α2Ω(알파 투 오메가)

  • 입력2013-06-03 11: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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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판수, 한때 그는 잘나가는 직장인이었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빨간색 스포츠카를 몰고 다녔다. 입담이 좋아 주위 사람들은 늘 주판수 앞에서 즐거워했다. 그런데 지금은? 상태가 좋지 않다. 마흔 밑자리인데 지난 3년이란 세월이 그렇게 만든 것 같다.

    벚꽃이 만발한 봄날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그를 자석처럼 이끈 곳은 산책길이었다. 거리에 막 어둠이 깔릴 무렵, 산책길은 마치 벚꽃 궁전 같았다. 판수의 눈앞에 어둠과 함께 하얀 궁전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 보였다. 바람이 한 줄기 스쳐 지나갔다. 머리 위로 함박눈처럼 꽃잎이 내려앉았다.

    멋지군!

    판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꽃잎이 얼굴에 쏟아져 내렸다. 발길이 저절로 멈췄다. 꽃잎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 판수는 양팔을 뻗어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는 꽃잎을 응시했다. 손바닥에 금세 꽃잎이 쌓였다. 손바람에 꽃잎이 흩어질 새라 양손을 오므렸다. 그리고 눈앞에 가져와 살며시 펼쳐보았다. 하얀 꽃잎은 그사이 황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어? 이것 좀 봐!



    틀림없는 길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판수는 그날 밤 잠을 설치고 말았다. 구상 중인 사업이 대박을 터뜨릴 것만 같아서였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살짝 잠이 들었다. 그런데 산책길에서 한 움큼이던 꽃잎이 불어나고 있었다. 꽃잎이 꽃잎을 낳아 순식간에 금빛으로 변해 안방을 채웠다. 이내 거실을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대박이다, 대박!

    판수는 하늘거리는 금빛 꽃잎에 감격해 펄펄 뛰다가 눈을 떴다. 꿈에서 깨었는데도 방 안에 금싸라기가 떠다니는 착각에 빠졌다. 침대 끝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결전의 날이 왔음을 직감했다. 내친 김에 요식행위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 한 잔을 마시고는 현관문을 나섰다. 이어 그의 빨간색 스포츠카가 ‘부웅’하고 굉음을 울린다. 구상 중인 사업이 대박을 내는 소리라도 되는 양 여운을 남기며 거리를 질주한다.

    # 도심의 아침은 분주하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에서도 여옥은 금방 눈에 띈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 더 있는 키 때문이다. 그런데도 킬힐만 신는다. 전철에서 내려 인파에 섞여 계단을 오르자 빨간색 스포츠카 한 대가 부릉거리며 교차로를 지나간다. 여옥의 시선이 잠시 그 차에 머물다 수십 층 높이의 빌딩 앞에 이른다. 빌딩 자동문 안으로 한 발 들여놓자 회전문이 그녀를 안고 돈다. 뒤에서 급히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그녀를 부른다.

    여옥 씨!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다. 바로 앞에 판수가 서 있다. 웬 소란? 오늘이 그날이거든. 정말? 그래서 스포츠카로 출근했구나. 지켜봐줘, 곧 무대에 오를 나의 멋진 시나리오를. 판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시나리오라고? 여옥은 판수를 빤히 바라본다. 판수는 여옥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제 갈 길을 간다. 걸음걸이가 여느 때보다도 당당하다. 여옥은 물끄러미 그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우연일까. 얼마 전 구내식당에서 나눈 김 부장과의 대화가 스쳐간다.

    장 과장, 주판수와 친하지? 입사동긴데요. 그 친구 꿈이 뭐야? 돈 버는 거겠죠. 어떻게 돈을 벌어? 쥐꼬리만한 연봉으로? 대박 터뜨리면 되죠. 어떻게? 멋진 사업을 하면요. 그 친구 그럴 생각 있대? 술 취하면 그러곤 했어요. 근대 판수한테 왜 그렇게 궁금한 게 많으시죠? 아냐, 아무것도 아냐.

    평소 김 부장답지 않았다. 항상 똑 부러지는 화법을 구사하곤 했는데 그날 그의 말꼬리는 전혀 여물어 있지 않았다.

    아홉마디 @오메가

    일러스트레이션·오동진

    # 판수는 당당한 모습으로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간다. 곧바로 김 부장 자리로 향한다. 안주머니에서 하얀색 봉투를 끄집어내 김 부장 앞에 내민다. 겉봉에는 ‘사직서’라는 글자가 굵고 선명하게 적혀 있다. 김 부장은 봉투 한 번 바라보고, 판수 한 번 쳐다보다가 봉투를 집어 든다. 그는 야릇한 미소를 흘리고 있다.

    진심이야? 넵! 대안은? 사업! 무슨 사업? 홈쇼핑. 아이템은? 만물상. 원하는 물건이면 언제든 조달 가능합니다. 상호는? 알파 투 오메가. 좋아, 수용.

    김 부장은 전혀 거침이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 판수에게 악수를 청한다. 주 과장 너, 여옥이한테 항상 그렇게 말했다며? 대박 한번 터뜨릴 거라고. 기회가 왔나 보다. 잘해. 지켜볼게.

    판수는 자리로 돌아오면서 사무실을 한번 빙 둘러본다. 막 출근해서 일감을 정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애처로워 보였다. 몸 바쳐 일해봐야 남 좋은 일일 뿐인데. 자기 일을 해야지, 이 사람들아. 판수는 다짐하듯 자신의 사업 구상을 떠올리며 사무실을 가로질러 당당하게 걷는다. 그리고 마치 대기업 회장이라도 된 양 점잔을 빼며 제자리에 앉는다.

    세상 사람들은 밑천 안 들이고 대박 터뜨리는 사업이 있을 줄 몰랐겠지? 밑천만 안 드나? 시장도 넓은데. 화려한 정보력만 활용하면 성공은 떼어 놓은 당상이야. 세상에다 그물을 쳐놓고 물고기가 걸리길 기다리면 되는 거야. 잔챙이도 있겠지만 대어도 낚이겠지 뭐. 한쪽에는 살 사람의 아이템을, 다른 쪽에는 팔 사람의 아이템을 올려놓고 기다렸다가 사장인 나는 그때그때 좌우 짝 맞추기 하듯 선만 연결하면 만사 오케이지 뭐.

    김 부장은 판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밀 프로젝트 제1호가 결실을 맺었다는 사실에 쾌재라도 내지르고 싶었다. 꿈을 심어주고 내보내는 일인데 뭐. 죄의식도 전혀 없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리스트에 순서를 정해놓고 꿈을 보내는 일만 남았다.

    사실 김 부장은 다섯 명을 정리해고하라는 사장의 비밀 지시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누구를 내보내며, 그 말을 어떻게 전할지가 최대 고민이었다. 자문도 받고, 경험자에게 의논도 해봤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실적점수 기준이었다. 두 번 죽이는 그런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검색어는? 해고, 레이오프 등등. 그러나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서도 뾰족한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그날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텅 빈 사무실에 홀로 앉아 허공만 바라보았다. 터놓고 말할 사람조차 없었다. 외롭기까지 했다. 그리고 두려웠다. 임무를 완수해야 할 마감시간은 다가오는데 한 걸음도 진척이 없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도 잡는다고 했던가. 불현듯 가끔씩 방문했던 한 SNS가 떠올랐다.

    접속하자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믿는 구석은 로또밖에 없는데. 난 10년을 꾸준히 샀는데도…. 이야기가 반전되어 개성공단 남남북녀의 연애 스토리도 떠다녔다. 공단 문을 닫아 어쩌지? 그러다가 초딩의 웹툰이 대박났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김 부장은 바쁘게 자판을 두들겼다. 고민을 해결해주세요. 무슨 고민인지는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어요. 바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고민해결사 오토바이맨입니다. 네? 저는 꿈을 파는 사람입니다. 꿈을요? 밤에 꾸는 꿈을 파는 사람이라고요. 고민이 있으면 꿈속에서라도 원하는 대로 해결되면 좋지 않습니까? 원하는 꿈을 반드시 꾸게 해드립니다. 꿈으로 고민을 해결해보세요. 꿈을 사서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나요? 물론입니다. 은밀하게 할 수도 있어요? 공개적으로도 가능하고 은밀하게도 가능합니다. 사시겠어요?

    꿈을 만드는 그의 요구조건은 의외로 간단했다. 스마트폰이었다. 스마트폰 번호만 줬는데 그게 정말 가능했을까. 김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수에게 꿈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걸려온 전화 한 통이 김 부장의 발목을 잡았다.

    오토바이맨입니다. 아, 네? 그 고객님은 황금빛 꽃잎의 꿈을 꿨을 겁니다. 확인해보시고 결제 부탁합니다.

    전화를 끊고 건너편 판수의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짐을 꾸린다고 분주한 판수 옆으로 한 대리가 걸어간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한 한방미, 판수의 후배다. 김 부장의 머리에 오토바이맨이 들려준 이야기가 스치고 지나간다. 실천은 단김에. 김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친다.

    한방미, 한방미 대리!

    아홉마디 @오메가
    작가 허만형은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행정학 전공 교수이자 소설가. 장편 ‘사이버베아트리체’(1995, 김영사)를 시작으로 ‘기호의 비밀’(2000, 현대문학북스), ‘유니파이’(2004, 동아일보사) 등 소설 여러 편을 냈고, 한 일간지에 단편 ‘T밸리 이야기’를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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