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이미 수년간 가요계에서 실력 있는 뮤지션으로 꼽히며 ‘한 오백년’ 같은 히트곡도 갖고 있던 29세 청년가수 조용필은 대마초사건으로 4년간 공백기를 가진 후, 자기 이름으로 된 첫 정규앨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한다. 그의 밴드 이름대로 가왕, 국민가수의 ‘위대한 탄생’을 알린 서곡이었다.
1988년, 한국 영화계에선 29세 청년 감독 강우석이 당대 청춘스타 최재성과 최수지를 기용한 장편 데뷔작 ‘달콤한 신부들’을 개봉한다. 전무후무한 ‘충무로 흥행 제왕’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었다.
2013년 4월, 63세 조용필은 19집 앨범 ‘헬로(Hello)’를 발표하고, 53세 강우석은 19번째 영화 ‘전설의 주먹’을 내놓는다. ‘가왕’과 ‘한국 대중영화 거장’이 넘어온 열아홉 굽이엔 당대 한국 사회상과 한국인의 정서가 녹아 있다. 2013년 공교롭게 한국 가요사와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두 ‘거장’이 나란히 이른 ‘19’라는 숫자에서 그냥 우연한 겹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징성과 무게감이 느껴진다. 어제 반짝 빛났던 별을 오늘은 기억할 수 없고, 차트엔 늘 이름을 알 수 없는 10대 ‘아이돌’이 꽉 차있는 가요계, 한두 편을 만들고 자취를 감춰버리는 신인 감독이 비일비재한 영화계. ‘원 나이트 스탠드’ 같은 조로(早老)의 엔터테인먼트 산업계에서 그들이 고투처럼 치러낸 18번의 라운드와 새로운 19번째 승부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전설의 주먹’에서 강 감독은 2013년 한국 사회의 음울하고 안타까우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감동적인 ‘희비극’ 풍경을 모두 링 위로 불러올린다. 먹여살릴 처자식도, 자꾸 엇나가는 딸아이도, 생계와 뒤바꾼 직장 상사의 모욕도, 잊어버린 청년의 꿈도 그 링 위에 있다. 술집에서 말썽을 일으킨 자식의 미래를 돈과 권력으로 사는 재벌도, 아무 죄책감 없이 희생양을 만들어 죽음으로 내모는 괴물 같은 아이도, 청년의 꿈을 먹이사슬 서열 속에 짓이겨 넣어야만 유지되는 비정한 사회도, 가학과 피학의 관음증을 사고파는 쇼도 다 정글 같은 링 위에 있다. 자영업자도, 샐러리맨도 맨몸으로 나서서 싸워야 하는, 그래야 다음 승부 때까지 생존이 연장되는 무대. 그 위에서 엎어지고 뒹굴며 모욕당하면서도 오기로 버티고 역전의 펀치를 장전하는 주인공들은 2013년 한국을 살아가는 이름 없는 대중의 존재 증명이자, 한국 영화를 이끌어온 대중영화 거장이 보내는 위안이다.
이 영화는 43세 동갑내기 세 남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한 케이블TV에서 지금은 중년이지만 고교 시절 전국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주먹’으로 통했던 이들을 찾아 링 위에 세우는 ‘전설의 주먹’이란 ‘파이트 쇼’를 마련한다. “고교 시절 14대 1로 싸워 이겼다”는 배불뚝이 사내도, “어린 학생 몸으로 동네 건달들을 제압했다”는 중년 남자도 도전장을 내미는 프로그램이다.
40대 가장들 역전의 펀치 장전
시청률을 올리려고 홍규민 PD(이요원 분)는 25~26년 전 서울 사당과 동작 일대를 주름잡던 ‘전설’ 임덕규(황정민 분)를 찾아내고, 그에게 출연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아내와 사별하고 허름한 국숫집을 운영하며 딸과 평범하게 살아가던 덕규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지만, 학교에서 다른 아이를 때려 사고 친 여고생 딸의 합의금 마련 차 출전을 결심한다. 고교 시절 복싱 유망주로 ‘88꿈나무’로 불리던 덕규가 승승장구하며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는 사이, 그와 함께 학창 시절 학교 일대를 벌벌 떨게 했던 또 다른 ‘주먹’ 신재석(윤제문 분)과 이상훈(유준상 분)이 가세한다. 재석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말단 조폭 생활을 면치 못하는 보잘것없는 신세이고, 상훈은 어엿한 대기업 홍보부장이지만 재벌총수 뒤치다꺼리나 하는 처지다. 상훈이 ‘모시는’ 회장은 고교 시절 덕규, 재석과 함께 어울려 다니던 재벌 3세 손진호(정웅인 분)다.
40대 주인공들의 비루한 현실과 패기만만했던 과거를 교차시키는 영화는 10대의 치기 어린 쌈박질부터 프로격투기의 박진감, 중년 사내들의 처절한 생존투쟁까지 다양한 얼굴과 감정으로 그려냈다.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슬프며 때로는 처절하고 때로는 통쾌하다.
“나 살아 있다”고 몸으로 외침
상금 몇천만 원 받자고 링 위에 오른 사내들은 “사는 게 빡빡하냐” “살기가 만만치 않지?”라고 서로에게 묻는다. 누군가로부터는 “그렇게 산 게 자랑이냐”는 비수를 받고, “나 이렇게 살아왔다”고 쓸쓸하게 털어놓기도 한다. 아이들에겐 “아빠가 제일 잘하는 게 뭐냐, 돈 버는 거 아니냐”며 호기롭게 얘기하고, 격투기 선수에게 흠씬 두들겨 맞으며 “포기하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끝까지 링을 떠나지 않는다.
결국 이 땅을 살아가는 평범한 남자들, 아빠들, 가장들, 특히 30, 40대가 느끼는 피로감과 열패감, 좌절감, 위기감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 된 셈인데, 그것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반칙과 편법, 서열, 폭력 사회’다. 올림픽을 한다면서 엉뚱한 지역까지 마구 파헤쳤던 몰상식의 역사, 재벌총수가 야구방망이로 임원을 패고 룸살롱에서 접대부를 폭행해도 되는 무법 사회, 언론과 재벌이 기사와 광고를 교환하는 비리 커넥션 등 스크린에 그려진 한국 사회의 씁쓸한 자화상이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누구든 ‘계급장 떼고 맨몸으로 붙을 수 있는 링’은 그래서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마지막 자존심을 건 무대인 셈이다. 영화는 원작이 된 동명 웹툰과 소재, 얼개, 인물 구도는 같지만, 구체적 설정과 극 전개, 결말은 크게 다르다. 내러티브는 좀 더 세밀해졌고, 액션은 더욱 긴박하게 연출됐다.
영화는 사내 3명이 맞붙는 최후 대전에서 절정을 맞는다. 과거 폭력이 일그러뜨린 그들의 삶, 링 위 격투로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현재.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통쾌한 마지막 카운터펀치를 잊지 않으면서도 폭력 자체를 반성하고 모든 관객에게 위안을 선물하는 결말이 절묘하다. 한국 대중영화계 거장다운 강 감독의 ‘신의 한 수’라 할 만하다.
그리하여 ‘전설의 주먹’의 스크린은 이름 없는 대중이 정글의 먹이사슬 같은 한국 사회를 상대로 “나 살아 있다”고 싸우는 ‘사각의 링’이 된다. 그리고 황정민, 윤제문, 유준상은 관객을 대리한 최고의 파이터로서 제 실력을 입증한다. 좋은 근육과 훌륭한 펀치, 따뜻한 눈물과 유쾌한 웃음을 가진.
1988년, 한국 영화계에선 29세 청년 감독 강우석이 당대 청춘스타 최재성과 최수지를 기용한 장편 데뷔작 ‘달콤한 신부들’을 개봉한다. 전무후무한 ‘충무로 흥행 제왕’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었다.
2013년 4월, 63세 조용필은 19집 앨범 ‘헬로(Hello)’를 발표하고, 53세 강우석은 19번째 영화 ‘전설의 주먹’을 내놓는다. ‘가왕’과 ‘한국 대중영화 거장’이 넘어온 열아홉 굽이엔 당대 한국 사회상과 한국인의 정서가 녹아 있다. 2013년 공교롭게 한국 가요사와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두 ‘거장’이 나란히 이른 ‘19’라는 숫자에서 그냥 우연한 겹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징성과 무게감이 느껴진다. 어제 반짝 빛났던 별을 오늘은 기억할 수 없고, 차트엔 늘 이름을 알 수 없는 10대 ‘아이돌’이 꽉 차있는 가요계, 한두 편을 만들고 자취를 감춰버리는 신인 감독이 비일비재한 영화계. ‘원 나이트 스탠드’ 같은 조로(早老)의 엔터테인먼트 산업계에서 그들이 고투처럼 치러낸 18번의 라운드와 새로운 19번째 승부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전설의 주먹’에서 강 감독은 2013년 한국 사회의 음울하고 안타까우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감동적인 ‘희비극’ 풍경을 모두 링 위로 불러올린다. 먹여살릴 처자식도, 자꾸 엇나가는 딸아이도, 생계와 뒤바꾼 직장 상사의 모욕도, 잊어버린 청년의 꿈도 그 링 위에 있다. 술집에서 말썽을 일으킨 자식의 미래를 돈과 권력으로 사는 재벌도, 아무 죄책감 없이 희생양을 만들어 죽음으로 내모는 괴물 같은 아이도, 청년의 꿈을 먹이사슬 서열 속에 짓이겨 넣어야만 유지되는 비정한 사회도, 가학과 피학의 관음증을 사고파는 쇼도 다 정글 같은 링 위에 있다. 자영업자도, 샐러리맨도 맨몸으로 나서서 싸워야 하는, 그래야 다음 승부 때까지 생존이 연장되는 무대. 그 위에서 엎어지고 뒹굴며 모욕당하면서도 오기로 버티고 역전의 펀치를 장전하는 주인공들은 2013년 한국을 살아가는 이름 없는 대중의 존재 증명이자, 한국 영화를 이끌어온 대중영화 거장이 보내는 위안이다.
이 영화는 43세 동갑내기 세 남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한 케이블TV에서 지금은 중년이지만 고교 시절 전국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주먹’으로 통했던 이들을 찾아 링 위에 세우는 ‘전설의 주먹’이란 ‘파이트 쇼’를 마련한다. “고교 시절 14대 1로 싸워 이겼다”는 배불뚝이 사내도, “어린 학생 몸으로 동네 건달들을 제압했다”는 중년 남자도 도전장을 내미는 프로그램이다.
40대 가장들 역전의 펀치 장전
시청률을 올리려고 홍규민 PD(이요원 분)는 25~26년 전 서울 사당과 동작 일대를 주름잡던 ‘전설’ 임덕규(황정민 분)를 찾아내고, 그에게 출연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아내와 사별하고 허름한 국숫집을 운영하며 딸과 평범하게 살아가던 덕규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지만, 학교에서 다른 아이를 때려 사고 친 여고생 딸의 합의금 마련 차 출전을 결심한다. 고교 시절 복싱 유망주로 ‘88꿈나무’로 불리던 덕규가 승승장구하며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는 사이, 그와 함께 학창 시절 학교 일대를 벌벌 떨게 했던 또 다른 ‘주먹’ 신재석(윤제문 분)과 이상훈(유준상 분)이 가세한다. 재석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말단 조폭 생활을 면치 못하는 보잘것없는 신세이고, 상훈은 어엿한 대기업 홍보부장이지만 재벌총수 뒤치다꺼리나 하는 처지다. 상훈이 ‘모시는’ 회장은 고교 시절 덕규, 재석과 함께 어울려 다니던 재벌 3세 손진호(정웅인 분)다.
40대 주인공들의 비루한 현실과 패기만만했던 과거를 교차시키는 영화는 10대의 치기 어린 쌈박질부터 프로격투기의 박진감, 중년 사내들의 처절한 생존투쟁까지 다양한 얼굴과 감정으로 그려냈다.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슬프며 때로는 처절하고 때로는 통쾌하다.
“나 살아 있다”고 몸으로 외침
상금 몇천만 원 받자고 링 위에 오른 사내들은 “사는 게 빡빡하냐” “살기가 만만치 않지?”라고 서로에게 묻는다. 누군가로부터는 “그렇게 산 게 자랑이냐”는 비수를 받고, “나 이렇게 살아왔다”고 쓸쓸하게 털어놓기도 한다. 아이들에겐 “아빠가 제일 잘하는 게 뭐냐, 돈 버는 거 아니냐”며 호기롭게 얘기하고, 격투기 선수에게 흠씬 두들겨 맞으며 “포기하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끝까지 링을 떠나지 않는다.
결국 이 땅을 살아가는 평범한 남자들, 아빠들, 가장들, 특히 30, 40대가 느끼는 피로감과 열패감, 좌절감, 위기감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 된 셈인데, 그것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반칙과 편법, 서열, 폭력 사회’다. 올림픽을 한다면서 엉뚱한 지역까지 마구 파헤쳤던 몰상식의 역사, 재벌총수가 야구방망이로 임원을 패고 룸살롱에서 접대부를 폭행해도 되는 무법 사회, 언론과 재벌이 기사와 광고를 교환하는 비리 커넥션 등 스크린에 그려진 한국 사회의 씁쓸한 자화상이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누구든 ‘계급장 떼고 맨몸으로 붙을 수 있는 링’은 그래서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마지막 자존심을 건 무대인 셈이다. 영화는 원작이 된 동명 웹툰과 소재, 얼개, 인물 구도는 같지만, 구체적 설정과 극 전개, 결말은 크게 다르다. 내러티브는 좀 더 세밀해졌고, 액션은 더욱 긴박하게 연출됐다.
영화는 사내 3명이 맞붙는 최후 대전에서 절정을 맞는다. 과거 폭력이 일그러뜨린 그들의 삶, 링 위 격투로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현재.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통쾌한 마지막 카운터펀치를 잊지 않으면서도 폭력 자체를 반성하고 모든 관객에게 위안을 선물하는 결말이 절묘하다. 한국 대중영화계 거장다운 강 감독의 ‘신의 한 수’라 할 만하다.
그리하여 ‘전설의 주먹’의 스크린은 이름 없는 대중이 정글의 먹이사슬 같은 한국 사회를 상대로 “나 살아 있다”고 싸우는 ‘사각의 링’이 된다. 그리고 황정민, 윤제문, 유준상은 관객을 대리한 최고의 파이터로서 제 실력을 입증한다. 좋은 근육과 훌륭한 펀치, 따뜻한 눈물과 유쾌한 웃음을 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