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내 비대위원 인선을 마친 민주통합당이 1월14일 오전 서울 영등포 당사에서 첫 비상대책위원회를 열었다. 모두 발언하는 문희상 비대위원장(가운데).
‘집토끼’에게는 진정성을 비판받고, ‘산토끼’에게는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비대위의 대국민 참회 행보조차 이벤트 논란에 휩싸였다. 전국을 돌며 진행하는 ‘회초리 민생투어’에 대한 시선도 곱지만은 않다. “지금 누가 민주당에 회초리를 들어줄 기분이 나겠느냐”는 말도 튀어나온다.
역대 사례를 놓고 보면, 이번 비대위는 언론과 지지층으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아야 한다. 총선, 대통령선거(대선) 패배라는 ‘비상’한 상황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여권이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통해 뉴스 블랙홀을 만드는 시점에서 야권인 민주당이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카드가 바로 비대위였다.
“정신 못 차리고 올드보이 선택”
하지만 민주당은 계파 간 신경전을 벌이다 결국 무난한 선택을 해 비대위 출범 초기부터 여론의 무관심을 자초했다. 당내 갈등을 줄인다는 미명하에 큰 반대세력이 없는 인물을 비대위원장으로 추대해 사태를 봉합함으로써 국민적 관심의 ‘김’을 빼버린 것이다.
사실 비대위 탄생 며칠 전만 해도 민주당에 대한 여론 관심은 컸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선 ‘비대위원장 경선 가능성’ ‘박영선 비대위원장 탄생 여부’ 뉴스가 정치 분야 최다 조회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즉 대중은 박영선 의원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그가 비대위원장을 맡을 경우 민주당이 어떻게 변화할지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박영선 카드’는 앵커 출신 여성 정치인이 갖는 대중성, 그리고 기성 야권 주류와는 다른 색깔을 결합한 민주당의 변화 신호로 여겨졌던 것이다.
또 비토세력이 적은 박병석 의원이 비대위원장 후보로 거론되면서 경선 여부도 관심을 끌었다. 민주당 한 의원은 “박영선 비대위를 주장했던 이유는 적어도 민주당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민주당 한 고위관계자도 “박병석 의원이 비대위원장 경선에 나설 경우, 기존 당 주류와는 조금 다른 인물이 지도부 경선에 나서면서 국민의 기대를 조금이나마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선택은 대중 관심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민주당은 1월 9일 국회의원·당무위원 연석회의를 열고는 비대위원장에 문희상 5선 의원을 만장일치로 합의 추대했다. 문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으며, 노무현 정부 초기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하고 국회 부의장을 거친 ‘민주당 주류 출신 어른’이다. 여론에서는 문 비대위원장에 대해 “계파색이 옅고 온화한 인물”이라고 평하면서도 “돌고 돌아 올드보이를 선택했다”고 비판했다. 대선 패배 후 야권 지지층의 바닥 민심이 실망을 넘어 무관심으로 넘어가려는 시점인데, 정작 민주당은 무난한 어른을 ‘만장일치’로 추대함으로써 ‘비상한 위기에서 오는 기회’를 놓쳤다는 지적이다.
민주통합당 문희상 비대위원장(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과 박기춘 원내대표(앞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1월 15일 오전 광주 동구 금남로 광주 YMCA에서 열린 ‘회초리 민심간담회’에서 지역 당원의 쓴소리를 듣고 있다.
이른바 ‘참회 절 퍼포먼스’에 불참한 한 초선의원은 “선거에서 진 것은 백 배 반성할 일이나, 그렇다고 절을 통해 반성 의지를 표명하는 것은 진짜 쇼”라고 비판했다. 그는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버스 타고 전국을 다니면서 절하고 ‘혁신’을 하느냐”며 “민주당을 더 무능하고 ‘올드’해 보이게 하는 방안은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기희생 없이는 위기 극복 힘들어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1월 16일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버스 타고 다니면서 무릎 꿇고 천 배 만 배를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지적했다. 민주당 지지자들 역시 ‘회초리 민생투어’에 비판적이다. 당 홈페이지에는 “‘쇼’하지 말고 일을 하라” “국민에게 읍소해 동정심을 유발하는 건 절대 먹혀들지 않는다”는 비판 글이 쇄도했다.
비대위 활동이 지지부진한 것도 비판 여론을 부추긴다. 비대위는 출범 닷새를 넘기고도 외부 비대위원 2명 인선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또 핵심 과제인 대선평가위원회, 전당대회준비위원회, 정치혁신위원회를 구성해야 하는데도 윤곽조차 그리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문희상 비대위가 성공하려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뼈를 깎는 노력을 실천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이철희 소장은 비대위가 힘을 얻으려면, 문희상 비대위원장부터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하고 살신성인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민주당의 고질병으로 꼽히는 ‘말로만 개혁’을 이번에도 반복하지 말고, 비대위원장부터 자기희생을 행동으로 보여달라는 주문이다.
대선 패배 이후 중요한 시점에서 ‘계파 싸움’은 지양하되 ‘노선 논쟁’은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시민사회단체 출신 한 관계자는 “민주당은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제대로 된 노선 토론 없이 성급하게 이명박 대통령 스타일의 ‘중도 실용주의’를 흉내 내려다 여야 차별화에 실패하는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박근혜 당선인이 복지, 경제민주화 이슈까지 가져간 상황에서 야당이 과연 무엇으로 차별화할지, 민생정치를 어떻게 실현할지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민주당 문희상 비대위가 할 일은 국민 동정심을 자극할 ‘읍소 이벤트’가 아니라, 민생을 중심에 놓고 노선 토론에 불을 붙이는 촉매제가 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대선 패배를 속죄하는 ‘회초리 민생투어’에 나선 민주통합당 지도부가 1월 15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 참배를 마친 뒤 삼배를 하고 있다.
이런 노력은 여론의 관심은 물론, 유권자 마음까지 되돌렸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3개월 후인 2004년 7월에 접어들자 여론조사에서 여야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한때 40%p에 달하던 여야 지지율 차이가 한나라당의 뼈를 깎는 몸부림으로 점차 좁혀진 결과였다. 물론 이런 과정에는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층 결집도 영향을 미쳤지만, 당시 박 대표가 당사를 천막으로 옮기는 퍼포먼스에만 주력했다면 이 정도 역전극은 어려웠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 대선을 앞두고 꾸렸던 박근혜 비대위 실험도 과거 성공 사례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2011년 말 다시 구원투수로 추대된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총선 전후 과감한 변화를 시도했다. 지지율이 떨어지는 이명박 정부와의 차별화를 위해 아예 당명을 바꿔버렸고, 그동안 금기시하던 빨간색 옷도 입었다.
당내 주류가 위협을 느낄 정도의 실험도 감행했다. 20대인 이준석 비대위원 임명, ‘경제민주화 전도사’ 김종인 전 의원 영입, 새누리당 강세지역 부산에 20대 여성 신인 손수조 공천 등을 강행한 것이다. 또한 박 비대위원장은 부패 논란에 휘말린 인물들은 측근이라도 출당시켰다. 이런 방법은 당내 반발을 부르기도 했지만, 여론 관심을 받기엔 충분했다. 적어도 ‘지리멸렬한 보수’ ‘부패한 정당’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이 긍정적 평가를 받은 것이다.
지금은 수술용 메스를 써야 할 때
이런 노력과 비교해볼 때 민주당 비대위 활동은 고전적이고 다분히 이벤트 중심적이다. 당내 계파 눈치를 보는 데다,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김수진 이화여대 교수는 민주당 정치인들이 당내 인간관계와 ‘자기 정치’를 염두에 둬 과감한 혁신을 이끌지 못한 점을 비판하며, 박근혜 비대위의 단호함과 비교한 바 있다. 내부 동료와의 관계 때문에 비대위가 손에 피를 묻히기 어렵다면, 외부 인사를 영입해서라도 수술용 메스를 들이대라는 주장이다.
이런 가운데 이철희 소장의 뼈 있는 조언은 관심을 끈다. 민주당 전략통 출신인 그는 최근 언론 인터뷰 등에서 문희상 비대위원장을 비롯한 당내 주류 중진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아무것도 없는 지도부라면 도덕적 명분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나도 할 만큼 했으니 나부터 다음 총선에 안 나가겠다’는 흐름을 만들어 이해찬, 한명숙 전 대표까지 동참하도록 해야지, 말은 60년 전통만 빼고 다 바꾸겠다면서 실제로는 하나도 안 한다.”
전국을 돌면서 ‘회초리 민생투어’ 이벤트만 할 것이 아니라 ‘나부터 살신성인’ 정신으로 빨리 변화를 실천하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