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2’ 한 장면.
30대 중반 A씨는 남편이 ‘무정자증’인 사실을 모르고 결혼했다. 결혼 후 며느리가 임신을 하지 못하자 A씨 시부모는 “대를 이어야 한다”며 시아버지의 정자를 제공받아 인공수정을 할 것을 종용했다. A씨는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고, 그 대신 제삼자의 정자를 제공받아 임신에 성공했다. 하지만 아기가 커갈수록 생김새가 시아버지를 닮아가자 A씨는 고민에 휩싸였다. ‘시부모와 병원이 짜고 시아버지의 정자를 제공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 뒤늦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A씨 친정어머니는 격분해 딸을 부추겨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시집에서 우리 딸을 씨받이로 이용했다”며 시부모와 사위를 상대로 형사고소까지 했다.
“남편 말투가 어눌하고 상스러워 부부모임에 함께 가기 창피하다” “강남에 40평형대 아파트를 신혼집으로 구매했는데 혼수를 싸구려로 해왔다”며 갈등을 겪던 30대 후반 B씨와 C씨 부부. 이들은 이혼소송 과정에서 “신혼살림으로 마련해온 가구들을 도끼로 부수고 싶다”고 할 정도로 감정이 격해졌다. 양가 부모까지 부부 갈등에 가세해 쌍방이 폭력을 휘두르고, 시어머니와 장모는 각각 B씨와 C씨의 직장으로 찾아가 행패를 부리기까지 했다. 양쪽 집안은 서로 상대방을 명예훼손, 폭력, 상해, 주거침입으로 고소하는 등 여러 건의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해 치열하게 다투는 중이다.
이혼이 ‘전쟁’으로 치닫는 이유는 부부싸움이 양가 갈등으로 번져 이혼소송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당사자를 비롯한 양가가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민형사상 맞소송으로 번지는 등 파장이 일파만파로 커지기 때문이다.
당사자보다 부모가 대리戰
부부싸움에 양가 부모가 합세하면서 이혼까지 가지 않아도 될 부부가 결국 헤어지고 마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동성애자임을 숨기고 결혼한 D씨는 아내에게 들통 나자 “게이 생활을 청산하고 결혼생활에 충실하겠다. 약속을 어기면 당신에게 집을 주겠다”는 각서를 썼다. 그러나 D씨는 이후에도 과거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동성애 사실이 발각되자 아내에게 집과 차를 위자료로 주고 맨몸으로 집을 나왔다.
1년 뒤 아들이 이혼한 사실과 재산을 며느리에게 모두 넘겨준 것을 안 D씨 아버지는 “내 아들을 게이로 만든 뒤 협박해 재산을 갈취했다”며 며느리와 사돈을 협박죄, 명예훼손죄, 사기죄로 형사 고소했다. 그와 함께 며느리가 가져간 재산을 분할해달라며 아들을 원고로 한 민사소송까지 제기했다. 양가는 대법원까지 가는 치열한 다툼을 벌였지만 소송은 모두 기각됐다. 분을 참지 못한 D씨 아버지는 “아들이 며느리에게 준 집은 아들이 결혼할 때 자신이 사준 것으로 명의만 아들 앞으로 한 것이다. 명의신탁을 해지하겠으니 집을 돌려달라”며 소송을 제기해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D씨는 “부모 몰래 이혼하면서 아내에게 ‘과거 생활을 청산하면 그때는 다시 받아 달라’며 좋게 헤어졌는데 아버지 때문에 아내와 다시 합칠 희망이 물거품이 됐다”며 참담해했다.
최근에는 부부 갈등이 양가 부모에게서 시작된다는 점도 이혼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결혼한 자식의 부부생활에 시시콜콜 참견하는 부모가 늘면서 부부싸움을 야기하는 것은 물론, 이혼에 맞소송까지 주도하는 부모가 적지 않다. “시어머니가 결혼 3년 안에 교사임용시험에 합격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시어머니가 강권해 성형수술을 받았다. 억울해서 성형수술비를 반드시 시어머니한테 받아내겠다”며 이혼소송에 나선 며느리들이 있는가 하면 “장모가 부부 잠자리까지 간섭한다”며 분개한 남편도 있다.
수백억 원대 재산가를 처가로 둔 20대 후반 E씨는 장모가 자신을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 ‘종 부리듯’ 하고, 아침마다 전화해서 “간밤에 부부 잠자리는 잘했느냐” “오늘은 딸아이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니 잠자리를 피하라”며 부부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간섭하자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더는 장모에 휘둘리기 싫다”며 이혼소송을 제기한 E씨는 “아내하고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냥 우리끼리 잘 살게 놔뒀으면 이혼까지는 안 갔을 텐데…”라며 장모를 원망했다. E씨 아내도 “엄마한테 시달리는 남편이 너무 불쌍하다. 미안해서 잡을 수도 없다”며 자기 부모를 책망했다.
부모가 나서서 이혼을 종용하고 변호사를 선임해 이혼 상담을 하는 등 이혼 과정의 전반을 주도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정작 변호사는 이혼 당사자의 얼굴도 못 본 채 소송을 진행하는 경우가 흔하다. 재판 때 법정에 가서야 처음으로 소송 당사자의 얼굴을 보는 것. 성인임에도 부모가 준비한 자신의 소송서류에 이름만 올리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것은 “우리 자식이 이혼 문제로 스트레스 받는 것이 싫다”는 이유에서다.
결혼을 반대하는 시부모를 피해 몰래 결혼식을 올렸던 30대 중반 F씨는 어느 날 신혼집에 시어머니가 들이닥쳐 남편을 끌고 가다시피 했고, 그 후 이혼소송을 당하자 “남편은 나를 사랑하는데 시부모가 나서서 일방적으로 이혼소송을 걸었다. 이혼소송은 가짜”라며 맞소송(반소)을 제기했다.
이혼산업·심부름업체 활황
양가 부모가 가세한 이혼전쟁이 늘면서 ‘이혼산업’이라는 용어가 공공연히 회자될 정도로 관련 업계가 활황을 맞았다. 최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울가정법원 근처에 ‘친자확인’ 검사를 해주는 유전자감정업체가 문을 열었는가 하면, 인터넷에는 ‘이혼 전문 변호사’ 간판을 내세운 사이트와 카페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이혼 전문 변호사 수가 급증하면서 법조인 사이에 ‘인터넷변호사’ ‘방송변호사’ ‘지하철변호사’라는 은어까지 유행한다. 이혼 사건 수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인터넷이나 방송, 지하철 광고로 얼굴을 알리려는 변호사들을 일각에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것.
한편 이혼소송과 민형사상 소송에서 유리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상대방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녹음해주는 심부름업체가 성업 중인가 하면, 녹음 내용을 녹취해 문서로 작성해주는 속기사무소도 최근 늘고 있다. 박호규 전국속기사무소연합회 회장은 “2년 전부터 속기사무소가 급격히 늘었다. 현재 양재동 서울가정법원을 중심으로 60~70개 사무소가 모여 있다.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업체마다 일감은 예전보다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서울가정법원 관계자는 “재판의 속성이 공격과 방어다. 외국의 경우 이혼 소장을 작성할 때 상대방도 이혼을 원하는지, 이혼에 동의하는지 등의 내용을 간략하게 쓰도록 하고 있다. 반면 우리는 소장 내용에 제한이 없어 상대방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내용을 구구절절 쓸 수 있다. 소장 내용이 상대방의 감정을 자극해 이혼소송을 확대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소장 작성 방식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법적, 제도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이 문제는 법조계에서 꾸준히 지적돼온 사안”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 사회의 이혼 행태에 대해 이렇게 우려했다.
“이혼은 당사자뿐 아니라 미성년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도 크다. 아이가 부모의 이혼에 적응하고 극복하는 데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이 걸린다. 그 기간을 좌우하는 게 이혼 과정에서 부부가 어떻게 헤어졌느냐다. 이혼소송이 극단까지 가면 자녀에게 미치는 폐해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부모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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