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뭉크, 1895년, 캔버스에 유채, 66×100, 오슬러 뭉크 미술관 소장.
연인을 질투하는 남자의 심리를 표현한 작품이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질투’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뒤쪽 남자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에게 꽃다발을 주고 있다.
여인이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은 꽃다발을 건네는 남자를 반갑게 맞이한다는 의미이며, 벌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여인의 벌거벗은 몸은 두 사람의 성적 관계를 암시한다. 남자의 붉어진 뺨, 여인의 붉은 가슴과 음부도 성적 흥분을 나타낸다.
왼쪽 남자의 초점 없는 눈과 창백한 얼굴, 그리고 꽉 다문 입술은 이들 연인에게 질투를 느끼는 모습이다. 남자를 둘러싼 어두운 배경은 남자의 고뇌를 나타내며, 남자가 질투에 사로잡혀 있음을 강조한다. 두 연인을 남자 뒤에 배치한 것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인을 바라보지 못하는 남자의 심리를 반영했다.
이 작품에서 맨 앞에 있는 남자는 뭉크 자신이다. 삼각관계에 빠졌을 때 그 심정을 작품에 담아냈다. 뭉크는 그 유명한 ‘뭉크 스캔들(독일 베를린에서 연 개인전이 사람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아 결국 전시장이 폐쇄된 사건)’을 계기로 베를린에 머물렀다. 베를린에서 뭉크는 예술가들이 모여 밤새 토론하기를 즐겼던 술집 ‘검은 돼지’에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음악 공부를 하려고 베를린에 유학 온 다그니 유을에게 사랑을 느꼈다. 둘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다. 하지만 유을은 뭉크의 사랑을 거부하고 뭉크의 친구인 러시아 건축가와 결혼한다. 뭉크는 이 작품을 통해 유을과 그녀의 남자친구를 바라보면서 느꼈던 감정을 충실하게 표현하려고 남자를 클로즈업했다.
남자는 소유권에 대해 명확하다. 남자는 자기 것이라고 확신하는 순간 방임하지만, 자기 것이 되기 전까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남자는 사랑을 소유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질투하는 게 아니라 강하게 집착한다. 상대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를 알아야 직성이 풀리고, 자기 손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집착이 심하면 폭력을 부른다. 말보다 손이 먼저 행동하는 남자의 본능 때문이다.
질투 때문에 폭력을 행사한 남자를 그린 작품이 프리다 칼로(1907~54)의 ‘몇 번 찔렀을 뿐’이다. 여자가 침대 위에서 피를 흘린 채 누웠고, 중절모를 쓴 남자가 칼을 든 채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흰색 새와 검은색 새가 ‘몇 번 찔렀을 뿐이요’라고 적힌 리본을 물고 있다.
벌거벗은 여인의 몸과 한쪽 발에만 신겨진 신발에서 그녀가 무방비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칼을 들고 선 모습은 남자가 가해자임을 나타내지만 침대와 벌거벗은 여인의 몸에서 두 사람이 연인 관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혈이 낭자한 여자의 몸과 피로 흥건한 방바닥, 그리고 액자의 피가 잔인하고 폭력적인 남자의 성격을 드러낸다.
칼로는 질투 때문에 살해당한 여성의 기사가 실린 신문을 읽고 이 작품을 제작했다. 새가 물고 있는 리본에 적힌 글은 살인자가 실제로 자신을 변호하면서 했던 말이다. “몇 번 찔렀을 뿐이요.”
사실 칼로가 이 작품을 제작한 동기는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남편 리베라의 불륜으로 느꼈던 절망감이다. 죽은 여인은 칼로 자신, 남자는 리베라를 상징하며 죽은 여인의 모습을 통해 남편의 불륜은 자신을 죽인 것과 같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몇 번 찔렀을 뿐’, 칼로, 1935년, 금속판에 유채, 38×48, 멕시코시티 돌로레스 올메도 소장(왼쪽). ‘격노한 메디아’, 들라크루아, 1838년, 캔버스에 유채, 260×165, 릴 시립미술관 소장.
질투에 눈이 먼 여자를 그린 작품이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격노한 메디아’다. 이 작품은 기원전 5세기 에우리피데스가 쓴 비극 ‘메디아’의 한 장면을 묘사했다.
마법사 메디아는 마법의 힘으로 남편이자 그리스 영웅인 이아손을 왕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아손은 메디아가 두 아이를 낳자 싫증을 느끼고 코린토스 왕의 딸인 크레우사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 질투에 사로잡힌 메디아는 크레우사에게 마법에 걸린 옷을 선사해 그녀를 산 채로 불태워 죽이고, 이아손이 가장 사랑하는 자식들을 죽임으로써 복수한다.
손에 칼을 든 채 두 팔로 아이들을 꼭 잡은 메디아가 몸을 비틀어 동굴 입구를 바라본다. 아이들은 어미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메디아의 흔들거리는 귀걸이와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질투로 인한 내면의 갈등을 나타낸다. 밝고 빛나는 피부와 달리 충혈된 눈은 극심한 질투를 표현한다. 메디아가 동굴 입구 쪽을 바라보는 모습은 이아손이 도착하기 직전임을 암시한다.
금발 머리 아이의 손이 구원을 요청하며, 눈물 가득한 눈은 곧 제 어미로부터 죽임을 당할 운명이라는 것을 아는 듯하다. 젖가슴을 드러낸 채 아이를 안은 여인의 모습은 어머니의 전형이지만, 아이에게 칼을 겨누는 모습에서 여자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질투와 집착은 다르다. 질투는 혼자 하는 ‘생쇼’고, 집착은 상대방을 피곤하게 만든다. 상대에게 집착하는 순간 그나마 있던 사랑도 사라진다.
박희숙은 서양화가다. 동덕여대 미술학부, 성신여대 조형대학원을 졸업했다. 개인전을 9회 열었다. 저서로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클림트’ ‘그림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