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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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아픔, 허기진 낭만

중년의 문화 소비는 자아실현의 또 다른 욕구

  •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swhang@yonsei.ac.kr

    입력2012-11-05 09: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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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의 아픔, 허기진 낭만

    장수프로그램인 KBS 1TV ‘콘서트 7080’.

    “들국화. 내 인생에 길이 남을 콘서트였다. 식구들과 같이 본 들국화 콘서트에서 첫 곡 ‘행진’부터 마지막 곡까지 내내 울었다. 가사, 연주, 목소리가 마음에 확 와닿으면서 감정이 주체가 되질 않았다. 무엇이 이리 나를 울렸을까. 내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들은 무엇이었나? 나름 ‘인생은 즐겁다’라고 살고 있었는데.”

    10월, 1980년대 중반 인기를 끌었던 록그룹 들국화가 수십 년 만에 콘서트로 부활했다. 한 팬은 ‘들국화 콘서트=인생’이라는 공식으로 자신의 감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시대의 낭만, 인생의 회한? 4050세대라고도 부르는 한국 중년이 다시금 찾는 1970년대, 80년대 감격 어린 추억이다. 학창시절 청춘을 채웠던 기억이 소비 대상이 되고, 스스로 대중문화 주체가 된다. 이들의 등장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난 10년 동안 미사리 라이브 카페를 중심으로 청춘의 낭만을 회상하는 주변 문화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것이 분명한 주류문화 중 하나로, 아니 대중문화의 본류로 등장한 것이 변화다. 복고 트렌드일까. 아니면 7080세대가 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일까. 잊힐 수 있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또다시 현재 삶의 모습이 되는 것은 바로 인간이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80년대에 청춘으로 살았던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중년은 분명 역동적이고 자극적인 청춘이 아니다. 삶에서 자기 나름의 가치를 지키면서 알뜰살뜰 살려는 생활인이다. 합리적 소비, 안정, 현실 수용을 숭상하는 것이 이들 삶의 보편적 모습이다. 전통적 가치관과 사회 변화 속도 사이에서 부담감을 느낀다. 자녀 교육과 결혼 준비에 대한 부담감이 엄습하지만, 정작 자기 존재는 불명확하기만 하다. 그래서 다시금 자신이 누구인지 자아를 느끼고 싶다. 7080문화현상은 이런 성향이 대중문화 소비로 드러난 것이다.

    “처음 할 때는 6개월에서 1년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8년째 하고 있죠. 이건 우리 세대가 문화에 얼마나 굶주리고, 방송에서 얼마나 소외됐는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여유와 취미 찾고자 하는 마음

    2004년 11월 첫 방송을 시작한 KBS 1TV ‘콘서트 7080’을 300회 이상 진행한 MC 배철수가 밝힌 소회다. 그동안 7080세대가 즐길 만한 문화의 장이 너무 없었다는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 안타까움이 역설적으로 ‘콘서트 7080’이 오랫동안 승승장구하는 요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까. 과거의 추억이 현재의 경험으로 변신하자, 그것은 모두가 공유하는 삶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양희은은 이런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런 프로그램에 나오면 노래보다 이야기가 더 남는다. 이야기 속에는 세월이 담겨 있다.”

    ‘콘서트 7080’에서 추억을 체험하고 공유하는 사람이 느끼는 인생 묘미는 아이돌 가수나 랩이 자아내는 감성과 구분된다. 세대의 경험 차이다. 랩을 비롯한 요즘 대중가요 가사는 사실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유치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과거의 노래는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다. 발랄한 춤은 없지만, ‘아침이슬’이나 ‘친구야’ 같은 노래를 통해 공유하는 것은 몸의 흔들림이 아닌 마음의 떨림이다. 생활 속에서 자신만의 품격이나 여유, 취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노래를 들으며 젊음을 보낸 7080세대가 이제 다시 자신을 적극적으로 가꾸고 스스로 자기 건강과 멋을 챙겨야 한다는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가고 있다.

    7080문화현상은 대중문화뿐 아니라 소비문화에서도 나타난다. 경기불황으로 백화점 내 패션상품군이 대부분 마이너스 매출 신장률을 보이는 것과 달리, 중년 남성의 옷 구입비는 급증하고 있다. 과거 20, 30대 전유물이던 트렌드 캐주얼 상품군에서의 40, 50대 고객 매출도 증가하는 추세다. 공중파 TV의 주 시청층도 30~50대로 바뀌었다. 과거 TV 연예오락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시청하던 10, 20대가 인터넷이나 케이블TV 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뮤지컬과 콘서트 기획도 예외는 아니다. 스웨덴 남녀혼성 4인조 팝그룹 아바의 노래로만 구성한 뮤지컬 ‘맘마미아’가 뜨면서 객석은 아바 노래를 들으면서 청소년기를 보낸 중년으로 넘쳐났다. 뮤지컬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도 교복 차림의 뮤지컬 배우들이 부르는 ‘나 어떡해’ ‘불놀이야’ 등 대학가요제 수상 곡들과 ‘Bad case of loving you’ 같은 추억의 팝송들이 중년 관객의 가슴을 후벼 판다.

    현실의 아픔, 허기진 낭만

    7080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뮤지컬 ‘맘마미아’(왼쪽)와 ‘와이키키 브라더스’.

    과거로부터 자긍심 빌려와

    베이비붐세대로 1970년대, 80년대 경제성장기에 청춘을 보낸 7080세대는 이제 소비와 문화, 공연 시장의 주체가 됐다. 어정쩡한 마음으로 현실에 맞추려 하고, 마냥 묻어두기만 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이들이 기억 속에 담아뒀던 낭만을 다시 소비하려 한다. 이는 생활에 찌들었던 이의 자아실현이다. 미래와 노후를 생각하면 불안이 친구가 되지만, 과거 추억 속에서 지금이라는 현실은 잡스러움이 되고 만다. 그래서 잠시나마 잊어버릴 수 있다. 아니, 청춘을 다시 회상하는 것으로, 그 시대의 아픔을 다시금 되살리는 것으로 현실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느끼게 된다고 믿는다.

    우리 시대 아버지의 아픔, 이것이 어쩌면 7080 복고시대 유행의 배경일지도 모른다. 내수침체에 세계경제까지 둔화되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이런 문화현상을 두고 복고마케팅을 활용한 현실도피성 엔터테인먼트라는 지적도 있다. 심리학에서 ‘주지화(intellec tualization)’라고 부르는 방어기제다. 이 현상을 지적하는 사람도, 현상에 참여하는 사람도 모두 가진 ‘자기합리화’다. 분명한 점은 이것이 현재 우리의 삶을 잘 이끌어가기 위한 일종의 적응적 반응이라는 사실이다. 피상적으로 현실 회피나 도피처럼 보일지라도, 과거에서 자부심과 자긍심을 빌려오는 새로운 적응 방법이다.

    7080문화현상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민주화에 젊음을 걸었던 중년세대가 이 사회 주축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부각된 문화현상이다. 놀랍게도 이것은 그들만의 회상이 아니다. 지금 20대, 30대도 공유하는 감성이자 이 사회의 또 다른 주류 대중문화다. 어쩌면 자아를 찾지 못하거나 스스로 독립하지 못한 심리 상태에 놓인 많은 사람의 정서를 자극하는지도 모른다.

    20대가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책을 통해 위로받는 것은 부모 세대가 느꼈던 좌절감을 자기 것으로 수용한 현상일 뿐이다. 추억과 향수에 의존한 얄팍한 상업적 계산만 있었다면, 7080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새로운 문화 주축으로 부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들이 부활한 것이 아니다. 그동안 주변부에 머물던 사람들이 주류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편입된 것이다. 현실에 안주한 것이 아니라, 변화를 추구했고 그 변화가 현실에서 다시 의미를 갖게 된 경우다. 우리 사회에서 세대 간 문화 공유와 공감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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