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대리운전기사 등으로 투잡을 하는 가장이 늘고 있다.
“직장에 다니는 월급쟁이인데 요즘 월급이 성에 안 차서…. 투잡으로 할 만한 일 없을까요? 경제상황이 안 좋은 때라 회사를 함부로 옮길 수도 없고. 솔직히 한 달에 몇십만 원이라도 꾸준히 벌 수 있는 일이었으면 합니다.”
직장인 10명 중 7명 “투잡 원해”
요즘 인터넷 검색창에 ‘투잡(Two Jobs)’이라고 치면 이와 유사한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투잡’을 치자 ‘투잡코리아’ ‘부업몰’ ‘자유알바’ 등 관련 사이트가 105개 떴고, 카페 수는 8090개에 달했다. 이들 사이트와 카페는 직장인끼리 투잡 정보를 공유하는 커뮤니티에서부터 각종 아르바이트 정보를 모아놓은 곳, 창업형 투잡족을 위해 정보를 제공하는 곳, 투잡을 중개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알짜 정보를 담고 있어 투잡에 목마른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갈수록 깊어지는 경제 불황의 그늘에서 외식비와 자녀 학원비 절약으로도 모자라 최근 생필품 소비마저 줄이는 가계가 늘고 있다. 또한 집집마다 가계 사정이 악화하면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 생활비에 보태려는 직장인이 너도나도 투잡에 뛰어들고 있다. 1년 전부터 직장일 외에 중고차 딜러로 투잡을 뛰는 유상준(가명·45) 씨는 “아이가 하나든 둘이든 웬만한 30, 40대 가장은 월급만으로 생활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나이대 직장인 가운데 할 수만 있다면 투잡을 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을 거다. 사정이 거의 비슷비슷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씨 말처럼 최근 직장인 10명 중 7명꼴로 투잡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6월 말을 전후해 남녀 직장인 556명을 대상으로 ‘투잡 희망 여부’를 조사한 결과 71.0%가 ‘투잡을 하고 싶다’고 응답했다. 전체 응답자 가운데 30세 이상 연령층이 69.3%를 차지했다. 이들이 투잡을 희망하는 이유는 경제적 원인이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10명 중 6명꼴로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싶어서’라고 응답한 것.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몸이 힘든 건 물론, 퇴근 후 또 다른 일터로 출근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자투리시간을 활용해야 하는 등 여러 제약이 많아 입맛에 딱 맞는 일거리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중고차 딜러를 하기 전 몇 년 동안 여러 일을 알아봤다”는 유씨는 “직장이 있으니까 4대 보험이 되는 투잡은 안 되고 퇴근시간이 들쭉날쭉해 평일 저녁 파트타임 일자리도 잡기 어려웠다. 중고차 딜러는 출퇴근을 안 해도 되고 프리랜서 형식으로 내 사정에 맞춰 차만 팔면 되니까 좋다. 알음알음으로 어렵게 잡은 일”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유씨만이 아니다. 인터넷에는 투잡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오후 4시 반에 퇴근하는데, 5시부터 4시간 동안 일할 어린이집 돌봄교사를 뽑는다고 해서 연락했더니 4대 보험에 가입해야 하기 때문에 투잡은 안 된다고 하네요. 월급도 얼마 안 되는데 4대 보험 때문에 입에 맞는 투잡도 할 수 없고 참으로 답답합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투잡을 하려고 알아본 곳이 정규 야간 검사직이라 4대 보험 적용 사업장입니다. 현재 근무 중인 직장이 있는데 단순 알바가 아닌 정식 직장으로 투잡이 가능할까요?”
한 달 수입 20만~50만 원
취업포털 인크루트에 따르면 직장인 투잡족은 지난 1년 사이 4.5% 증가했다. 여러 제약으로 사정이 여의치 않다 보니 투잡 희망자는 많지만 실제 증가 폭은 크지 않은 셈. 지난해 11월 취업정보업체 스카우트가 직장인 79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투잡을 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10명 중 6명이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주로 직장생활의 연장선에서 할 수 있는 일, 집에서도 가능한 일, 퇴근 후 할 수 있는 단순 시간제 아르바이트, 주말에 할 수 있는 일이 대부분이다.
투잡족을 대상으로 직종을 물은 결과 ‘디자인 개발 기획(컴퓨터 관련)’을 하는 사람이 17.6%를 차지했다. 다음으로 많이 하는 일은 ‘편의점이나 마트 아르바이트’로 14.1%였다. 이는 평일 퇴근 후 바로 일할 수 있어 시간대가 맞고, 직장이나 집 가까운 데서 일자리를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근 블로그와 카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온라인 홍보시장이 확대되면서 ‘광고와 홍보’가 새롭게 투잡족의 관심을 끌고 있다. 조사 결과 5.3%가 광고 및 홍보 일을 하고 있었다.
투잡족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불황의 그늘이 끝이 보이지 않는 데서 그 까닭을 찾을 수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대기업과 정규직 등 양질의 일자리 줄고 노동 양극화 심각’ ‘가계부채 1000조원 육박’ ‘가파른 물가상승, 실질개인소득 감소’ ‘한국, 세계경제 역풍 직면’ 같은 뉴스가 터져 나오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가장이 맘 편히 두 다리 쭉 뻗고 있기란 쉽지 않다. 직장인 2명 중 1명이 스스로를 ‘하우스 푸어’라고 진단할 만큼 그들이 갖는 위기감은 극에 달했다. 시시각각 조여 오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노후는 고사하고 자칫 ‘아이조차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이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면서 조기퇴직이 일반화하고,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이 많아지면서 과거에 비해 직업 안정성이 현저히 떨어진 데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는 한 직장에 몸 바치다 어느 날 갑자기 쫓겨나 실직자가 되고, 당장 다음 달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을 숱하게 봐왔다. 같은 처지에 놓인 직장인들 마음 한구석엔 ‘어느 날 갑자기 직장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주 5일 근무제의 확산으로 직장인에게 시간적 여유와 여력이 생긴 점도 투잡 인구 증가에 한몫한다. 온라인 또는 모바일 시장에서 신규 일자리가 창출되면서 굳이 출퇴근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 늘면서 투잡 기회도 그만큼 많아졌다.
투잡족이 벌어들이는 돈은 보통 한 달에 20만~50만 원이다. 밤잠을 줄여가며 2년째 대리운전기사로 뛰는 김동성(가명·43) 씨가 한 달에 손에 쥐는 수입은 30만~40만 원에 불과하다. “요즘 직장인들은 사이드잡이라도 대리운전기사로 뛰는 걸 싫어한다. 예전에 비해 경쟁이 치열하고 힘든 노동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김씨는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1년여 실직생활 끝에 8개월 전 작은 중소기업에 들어갔다. 그는 “가능한 한 닥치는 대로 벌어 그동안 쌓인 빚도 갚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언제 또다시 실직자가 될지 몰라 대리운전기사 일이라도 잡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덧붙였다.
경제적 이유로 투잡족이 된 직장인 외에 창업이나 이직 등 미래를 내다보고 대비 차원에서 투잡을 뛰는 사람도 있고, 관심 분야나 취미를 살리기 위한 투잡족도 있다.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소기업청의 ‘1인 창조기업’ 지원사업을 담당하는 지식서비스창업과 관계자는 “딱히 직장인은 안 된다는 규정이 없지만 1인 창조기업 지원사업 대상이 되려면 사업자등록증을 내야 하기 때문에 투잡으로 하기엔 좀 무리가 있다. 그래도 가끔 지원사업에 대해 문의하는 직장인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사진 찍기를 즐기는 천대필(37) 씨는 취미를 십분 발휘해 ‘연인 커플 촬영’을 전문으로 하는 온라인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공기업에 근무하는 그가 아르바이트 삼아 투잡을 시작한 건 지난해 여름이다. 그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하니까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촬영을 의뢰해왔다. 사진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 내친김에 카페를 만들어 아르바이트에 나섰다”고 말했다. 주말에 주로 아르바이트하는 그는 한 번에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투자해 사진을 찍어주고 교통비 외에 5만 원의 비용을 받는다. 천씨는 “큰 수입은 아니지만 주말에 잠깐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니까 괜찮다. 부수입으로 아이들 휴대전화도 사줬는데,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쓸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투잡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면서 서점에선 ‘퇴근 후 돈 버는 1인 기업하기’ ‘웹디자이너의 투잡 성공기’ ‘사이드잡 더블잡’ ‘난 한 달에 월급 두 번 받는다’ 등 관련 책이 꾸준히 팔리고 있다. 이 책들은 개인의 투잡 성공담에서부터 투잡 노하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편 온라인에선 투잡족을 겨냥한 재능거래 사이트와 카페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 오랜 직장생활에서 터득한 전문지식이나 재능으로 아르바이트할 수 있도록 판매자와 구매자를 중개해주는 것.
지난해 7월 문을 연 포털사이트 ‘알바리아(albaria)’에는 컴퓨터, 디자인, 교육, 컨설팅, 번역, 대행, 마케팅 등 재능별로 세분화한 카테고리가 26개 있고, 재능 판매 혹은 구매 글이 700여 건 올라와 있다.
“SI업체 등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경력 10년차로 현재 전산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으며 응용프로그램 전문입니다. 간단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프로그램 종류에 따라 가격 조정 및 협의 가능합니다. 직장인이라 주중 7시 이후 및 주말에 가능(작업)합니다.”
일부 직장에선 정보 공유도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대표적인 투잡 중 하나다.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자기 재능을 팔겠다는 투잡족의 글이 구매 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올해 2월 개설한 인터넷 카페 ‘이투잡(etwojob)’은 회원이 2만2000여 명에 달한다. 누적 방문자 수는 24만7000여 명을 헤아린다. 이곳에는 “프로그래밍 기술 팝니다” “동영상을 만들어드립니다” “영한·한영 통역, 번역해드립니다. 퀄리티 보장” 등 투잡 관련 글이 6900여 건 올라와 있다.
투잡을 넘어 스리잡(Three Jobs), 멀티잡(Multi-Job)을 뛰는 사람도 있다. 지난 2월 인크루트가 직장인 58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재 본업 외에 부업을 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103명에 달했다. 이들에게 몇 개의 부업을 하는지 물은 결과 ‘1개’라고 응답한 사람이 87명이었고 ‘2개’라고 응답한 사람은 14명이었다. ‘3개 이상’이라고 응답한 사람도 2명이나 됐다.
황선길 잡코리아 컨설팅본부 이사는 “미국이나 유럽은 오전과 오후로 나눠 하루 두 군데 회사로 출근하는 투잡족이 많다. 투잡뿐 아니라 스리잡 등 한 사람이 여러 일을 하는 게 일반적 추세다. 우리 사회가 선진국을 따라가는 추세에 비춰볼 때 국내에서도 조만간 투잡, 스리잡족이 보편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는 데 맞춰 구조조정도 하고,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재를 골라 써야 하니까 기업들도 과거처럼 ‘평생직장’임을 내세워 일사불란하게 직원들을 옭매는 분위기를 유지할 수 없다. 직원들의 미래를 기업이 책임질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직원들이 자기계발 등 자기 미래에 투자하고 직업 안정성을 찾아가는 것을 터부시하던 분위기가 과거에 비해 줄어든 것 같다”고 덧붙였다.
투잡족이 늘면서 그에 대한 직장인의 시선도 달라지고 있다. 직장상사는 물론 동료끼리도 투잡을 감추고 쉬쉬하며 금기시하던 과거 분위기가 최근에는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불완전고용 시대, 대량실업 시대,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로 실질개인소득이 거꾸로 줄어드는 시대…. 팍팍한 현실 탓에 갈수록 살림살이가 쪼그라드는 가정이 많아지면서 퇴근 후에도 맘 편히 쉬지 못하고 투잡을 뛰는 대한민국 가장들의 고단한 밤은 길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