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노인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본다.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탄력을 잃어 늘어진 살과 거무죽죽한 반점으로 남았다. 관능은 잃어버린 지 오래다. 슬프다. 늙은 육체는 슬프다.
노(老)시인이 봄날 햇살을 받으며 살포시 잠든 소녀를 바라본다. 새하얀 목덜미의 솜털이 햇빛에 반짝이고, 봉긋한 가슴이 숨결과 함께 오르내린다. 반바지 아래로 뻗은 허벅지와 종아리가 벅차게 하얗고 아름답다. 불현듯 노시인의 마음에 파문이 인다. 시심(詩心)인가 음심(淫心)인가. 시심이 음심에 굴복하고, 음심이 시심에 압도당한다. 정사의 희열에 몸을 떠는 젊은 남녀처럼 시심과 음심이 뱀처럼 엉켜든다. 관능적이다. 시도, 젊은 여체도 관능적이다.
박범신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옮긴 ‘은교’의 첫 두 장면은 노시인(박해일 분)과 젊은 제자(김무열 분), 열일곱 살 소녀(김고은 분)가 얽힌 희비극, 미스터리 스릴러, 심리를 다룬 블록버스터를 요약해 보여주는 듯하다. 이후의 사건은 두 장면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
70대 노인과 미성년자의 사랑
태초부터 사랑은 사랑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사랑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방해받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가문 간 증오를 통해 두 연인이 나눈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했고, ‘춘향전’에서 쾌락을 사랑의 경지로 이끈 것도 넘기 어려운 두 남녀의 신분 차이였다. ‘러브 스토리’ 이후 수많은 ‘시한부 멜로’가 병과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시키려 했다. 최근 ‘건축학개론’에서 첫사랑을 아름답게 박제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오해였다. 첫사랑이 이루어졌더라면 금방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테다. 신분, 가문, 죽음, 망각, 오해, 편견, 빈부, 불륜, 배신, 음모가 있기에 연인은 희로애락의 무대에서 춤추는 광대가 되고, 사랑은 인류가 상연하는 최고의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희비극을 불러내는 가장 근원적인 ‘안타고니스트(적대자)’는 따로 있다. ‘은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바로 시간이다. 시간은 육체를 늙게 하지만 그 속에 유폐된 욕망은 세월 가는 줄 모른다. 젊디젊다. 늙은 육체와 젊은 욕망이 엇갈릴 때 사랑은 추하고 우스꽝스럽고 이룰 수 없어 더 슬프다.
패기만만한 제자이자 젊은 소설가인 서지우는 열일곱 살 소녀에 빠진 스승에게 “사람들은 그걸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더러운 스캔들일 뿐”이라고 얘기하지만 노시인은 “당신의 젊음이 당신의 노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듯, 내 늙음 또한 내 잘못으로 인한 게 아니다”라고 항변한다. 70대 노인과 미성년 소녀의 사랑을 가로막는 건 사회적 편견이나 현행법 따위가 아니라 시간이다. 젊은 제자의 눈은 둘의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시선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스승의 눈은 사랑의 불가능성 그 본질을 묘파한다.
문학계 거장인 노시인 이적요가 살고, 그의 제자인 서지우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허드렛일을 거드는 서울 근교의 고즈넉하고 풍경 좋은 집. 그곳에 불현듯 한 소녀가 침입하면서 시인의 이름처럼 고요하던 일상이 깨진다. 침입자는 여고생 은교다.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스승과 제자는 뜰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은 채로 잠든 은교를 발견한다. 봄날을 그린 풍경화에 소품처럼 들어앉아 있던 소녀의 몸을 훑는 노시인의 눈. 낯선 소녀는 도대체 왜, 어디에서 왔을까. “이런 의자에 앉아보고 싶었어요.” 소녀가 심드렁하게 내놓은 대답이다.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소녀는 청소며 빨래며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는 ‘알바생’으로 노시인의 집을 드나든다.
“할아버지, 연필이 뭉뚝해요. 깎아드릴까요?”
“뾰족한 연필은 슬픈 거야.”
“연필이 뾰족해서 슬픈 거예요? 뾰족한 연필은 다 슬퍼요?”
‘저승과 이승만큼이나 멀었던’ 할아버지 시인과 엉뚱한 여고생 사이는 말이 섞일수록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내 서로에게 매혹된다. 노시인이 빠져든 것은 소녀의 몸일까 말일까, 아니면 젊음일까. 소녀는 “교과서에서 작품을 본 적이 있는 시인 할아버지”의 남다른 말투를 좋아했다.
탕웨이를 연상시키는 김고은
시인의 집을 지배했던 정적과 규칙이 하나둘씩 무너지자 젊은 제자가 느끼는 당혹감은 커져간다. 그렇다면 서지우는 누구인가. 10여 년간 스승의 수발을 들며 문단에서 “아들도 그렇게는 못할 것”이라는 칭찬과 함께 “왜 이적요의 뒤꽁무니만 쫓는지 모르겠다”는 비아냥거림을 함께 들었다. 근작 대중소설 ‘심장’을 수십만 부 판매하며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른 패기만만한 젊은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승에게서는 “별이 다 똑같은 별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10년이 걸렸다”는 조롱 섞인 질타를 종종 받는, 상상력이 결핍된 공대 출신 문학인이다.
어느 비 오는 밤, 흠뻑 젖은 소녀가 “집에 갈 수 없다”며 할아버지에게 하룻밤을 청했고, 이튿날 찾아온 서지우가 이 사실을 알면서 의혹과 불만,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노시인은 노시인대로 소녀를 보며 성적 환상과 문학적 상상력을 새롭게 지핀다.
그러던 중 서지우는 70대 거장 문학가와 미성년 소녀의 섹스를 다룬 단편소설을 발표해 문단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찬사도 받는다. 그럴수록 스승과 제자, 서지우와 은교 사이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다. 이 기이한 삼각관계의 절정은 정사(情事)이고 대단원은 죽음이다. 서지우의 작품과 죽음의 수수께끼를 푸는 비밀의 봉인은 최후에 열린다.
‘해피엔드’ ‘모던 보이’를 만든 정지우 감독은 이번에 시간이 갈라놓은 사랑을 다루면서 멜로 감각이 경지에 이르렀음을 과시했다. 관음증과 페티시즘을 자극하는 클로즈업 화면과 ‘헤어누드’를 불사한 사실적인 정사 장면으로 한국 영화에선 보기 드문 품격 있는 관능의 에로티시즘을 담아냈다.
70대 노인 분장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박해일의 연기는 물론이거니와, 패기와 콤플렉스가 뒤섞인 젊은 제자를 연기한 김무열의 대거리도 출중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주목할 사람은 헤로인 김고은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중에 발굴된 신인인데 ‘색, 계’의 탕웨이를 연상케 한다.
젊음과 늙음, 아름다움과 추함, 시심과 음심, 욕망과 예술, 육체와 정신이 빚는 온갖 회한과 비극을 다룬 ‘은교’는 여운이 긴 영화다. 누구나 사랑하고, 누구나 늙어가기 때문이다.
노(老)시인이 봄날 햇살을 받으며 살포시 잠든 소녀를 바라본다. 새하얀 목덜미의 솜털이 햇빛에 반짝이고, 봉긋한 가슴이 숨결과 함께 오르내린다. 반바지 아래로 뻗은 허벅지와 종아리가 벅차게 하얗고 아름답다. 불현듯 노시인의 마음에 파문이 인다. 시심(詩心)인가 음심(淫心)인가. 시심이 음심에 굴복하고, 음심이 시심에 압도당한다. 정사의 희열에 몸을 떠는 젊은 남녀처럼 시심과 음심이 뱀처럼 엉켜든다. 관능적이다. 시도, 젊은 여체도 관능적이다.
박범신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옮긴 ‘은교’의 첫 두 장면은 노시인(박해일 분)과 젊은 제자(김무열 분), 열일곱 살 소녀(김고은 분)가 얽힌 희비극, 미스터리 스릴러, 심리를 다룬 블록버스터를 요약해 보여주는 듯하다. 이후의 사건은 두 장면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
70대 노인과 미성년자의 사랑
태초부터 사랑은 사랑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사랑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방해받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가문 간 증오를 통해 두 연인이 나눈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했고, ‘춘향전’에서 쾌락을 사랑의 경지로 이끈 것도 넘기 어려운 두 남녀의 신분 차이였다. ‘러브 스토리’ 이후 수많은 ‘시한부 멜로’가 병과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시키려 했다. 최근 ‘건축학개론’에서 첫사랑을 아름답게 박제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오해였다. 첫사랑이 이루어졌더라면 금방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테다. 신분, 가문, 죽음, 망각, 오해, 편견, 빈부, 불륜, 배신, 음모가 있기에 연인은 희로애락의 무대에서 춤추는 광대가 되고, 사랑은 인류가 상연하는 최고의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희비극을 불러내는 가장 근원적인 ‘안타고니스트(적대자)’는 따로 있다. ‘은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바로 시간이다. 시간은 육체를 늙게 하지만 그 속에 유폐된 욕망은 세월 가는 줄 모른다. 젊디젊다. 늙은 육체와 젊은 욕망이 엇갈릴 때 사랑은 추하고 우스꽝스럽고 이룰 수 없어 더 슬프다.
패기만만한 제자이자 젊은 소설가인 서지우는 열일곱 살 소녀에 빠진 스승에게 “사람들은 그걸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더러운 스캔들일 뿐”이라고 얘기하지만 노시인은 “당신의 젊음이 당신의 노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듯, 내 늙음 또한 내 잘못으로 인한 게 아니다”라고 항변한다. 70대 노인과 미성년 소녀의 사랑을 가로막는 건 사회적 편견이나 현행법 따위가 아니라 시간이다. 젊은 제자의 눈은 둘의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시선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스승의 눈은 사랑의 불가능성 그 본질을 묘파한다.
문학계 거장인 노시인 이적요가 살고, 그의 제자인 서지우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허드렛일을 거드는 서울 근교의 고즈넉하고 풍경 좋은 집. 그곳에 불현듯 한 소녀가 침입하면서 시인의 이름처럼 고요하던 일상이 깨진다. 침입자는 여고생 은교다.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스승과 제자는 뜰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은 채로 잠든 은교를 발견한다. 봄날을 그린 풍경화에 소품처럼 들어앉아 있던 소녀의 몸을 훑는 노시인의 눈. 낯선 소녀는 도대체 왜, 어디에서 왔을까. “이런 의자에 앉아보고 싶었어요.” 소녀가 심드렁하게 내놓은 대답이다.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소녀는 청소며 빨래며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는 ‘알바생’으로 노시인의 집을 드나든다.
“할아버지, 연필이 뭉뚝해요. 깎아드릴까요?”
“뾰족한 연필은 슬픈 거야.”
“연필이 뾰족해서 슬픈 거예요? 뾰족한 연필은 다 슬퍼요?”
‘저승과 이승만큼이나 멀었던’ 할아버지 시인과 엉뚱한 여고생 사이는 말이 섞일수록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내 서로에게 매혹된다. 노시인이 빠져든 것은 소녀의 몸일까 말일까, 아니면 젊음일까. 소녀는 “교과서에서 작품을 본 적이 있는 시인 할아버지”의 남다른 말투를 좋아했다.
탕웨이를 연상시키는 김고은
시인의 집을 지배했던 정적과 규칙이 하나둘씩 무너지자 젊은 제자가 느끼는 당혹감은 커져간다. 그렇다면 서지우는 누구인가. 10여 년간 스승의 수발을 들며 문단에서 “아들도 그렇게는 못할 것”이라는 칭찬과 함께 “왜 이적요의 뒤꽁무니만 쫓는지 모르겠다”는 비아냥거림을 함께 들었다. 근작 대중소설 ‘심장’을 수십만 부 판매하며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른 패기만만한 젊은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승에게서는 “별이 다 똑같은 별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10년이 걸렸다”는 조롱 섞인 질타를 종종 받는, 상상력이 결핍된 공대 출신 문학인이다.
어느 비 오는 밤, 흠뻑 젖은 소녀가 “집에 갈 수 없다”며 할아버지에게 하룻밤을 청했고, 이튿날 찾아온 서지우가 이 사실을 알면서 의혹과 불만,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노시인은 노시인대로 소녀를 보며 성적 환상과 문학적 상상력을 새롭게 지핀다.
그러던 중 서지우는 70대 거장 문학가와 미성년 소녀의 섹스를 다룬 단편소설을 발표해 문단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찬사도 받는다. 그럴수록 스승과 제자, 서지우와 은교 사이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다. 이 기이한 삼각관계의 절정은 정사(情事)이고 대단원은 죽음이다. 서지우의 작품과 죽음의 수수께끼를 푸는 비밀의 봉인은 최후에 열린다.
‘해피엔드’ ‘모던 보이’를 만든 정지우 감독은 이번에 시간이 갈라놓은 사랑을 다루면서 멜로 감각이 경지에 이르렀음을 과시했다. 관음증과 페티시즘을 자극하는 클로즈업 화면과 ‘헤어누드’를 불사한 사실적인 정사 장면으로 한국 영화에선 보기 드문 품격 있는 관능의 에로티시즘을 담아냈다.
70대 노인 분장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박해일의 연기는 물론이거니와, 패기와 콤플렉스가 뒤섞인 젊은 제자를 연기한 김무열의 대거리도 출중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주목할 사람은 헤로인 김고은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중에 발굴된 신인인데 ‘색, 계’의 탕웨이를 연상케 한다.
젊음과 늙음, 아름다움과 추함, 시심과 음심, 욕망과 예술, 육체와 정신이 빚는 온갖 회한과 비극을 다룬 ‘은교’는 여운이 긴 영화다. 누구나 사랑하고, 누구나 늙어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