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4월 11일 조선노동당 대표자회, 13일 최고인민회의를 연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김일성 탄생 100주년인 태양절(4월 15일) 전후의 북한 행보가 좀 더 분명해졌다. 당대표자회에서는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원장 겸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올릴 것이 확실하다. 한발 더 나아가 조선노동당 총비서로 지명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최고인민회의에서는 김정은을 국방위원장에 임명할 가능성이 있다. 즉, 김정은은 북한 최고지도자가 앉는 4대 요직인 당 총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장, 국방위원장, 최고사령관을 모두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김정은은 김정일 장례 직후인 지난해 12월 29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이미 올랐다. 북한은 김일성을 영원한 국가주석으로 해놓았기에 주석직 승계는 하지 않는다. 김정일은 3년 탈상을 이유로 김일성 사후 3년 뒤에 4대 요직을 차지했으나, 김정은은 김정일 사후 4개월 만에 같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북한이 신속한 권력 승계를 추진하는 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잇는 ‘백두 줄기’를 내세워 북한을 안정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는 역으로 김정은 체제에 약점이 많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복형 정남은 중국을 떠돌고 평양에는 동복형 정철이 있으니, 정은은 ‘곁가지’를 제거하지 못한 채 권좌에 앉는 셈이다.
김정은 뒤에는 수상한 그늘이 드리워 있다. ‘주간동아’는 김정은의 배경을 밝히고자 취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찾아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가 김정은의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개 및 비밀 자료를 종합해 이 비밀의 일단을 공개하기로 한다.
‘곁가지’ 제거하지 못한 김정은
정남의 이종사촌인 고(故) 이한영(1961년생) 씨는 생전에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이라는 책을 냈다. 서울특파원을 지낸 일본 ‘도쿄신문’의 고미 요지(五味洋治) 기자는 정남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근거로 얼마 전 일본에서 ‘아버지 김정일과 나’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71년생인 정남은 9세 때인 80년 어머니 성혜림, 외할머니 김원주, 이종사촌 누나(이한영 씨의 여동생) 이남옥 등과 스위스 제네바로 건너가 제네바국제학교와 제네바대를 다녔다.
정남이 스위스로 가고 얼마 후 러시아 모스크바에 유학 중이던 이한영 씨가 합류했다. 그는 나중에 한국으로 망명했으나 1997년 경기 성남시 분당의 한 아파트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피살당했다. 이씨가 사라졌을 때 북한은 한국 국가정보원(안기부)이나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이씨를 납치했다고 추정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남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해 즉시 귀국시켜야 하는데, 계속 제네바에서 학교에 다니게 했다. 그 이유를 정남은 고미 기자와 주고받은 이메일에서 이렇게 우회적으로 설명했다(고미 책 요약).
“나는 스위스에서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언제나 현지 친구들 가운데 있었다(현지 친구와 잘 지냈다는 뜻).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유학 보낸 후 매우 외로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유학 간 얼마 후 (고영희로부터) 이복형제인 정철, 정은, 여정을 얻자 그쪽으로 애정을 쏟은 것 같다(자신에게는 신경을 껐다는 뜻). 아버지는 내가 완전히 자본주의 청년으로 성장해 북한으로 돌아갔을 때부터 나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버지는 모든 자식이 국제적인 견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이복동생들도 유학을 보냈다. 하지만 나에 대한 경험 때문인지 그들의 유학 기간을 단축했고, 현지 친구와 어울리는 것도 제한했다고 들었다.”
동유럽 공산국가와 소련이 무너진 1992년, 성혜림의 딸 이남옥이 어머니에게 뜻을 밝히고 서유럽국가로 조용히 사라졌다. 나중에 성씨도 서유럽국가로 망명해 그곳에서 살면서 곡절 많은 인생을 글로 썼는데, 2000년 이것이 한국에서 ‘등나무집’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성혜림이 정남을 낳은 후부터 우울증을 앓자 1970년대 중반 김정일은 그를 언니 성혜랑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로 보내고, 정남도 제네바에 유학 보내는 것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고영희와 가족을 이뤄 정철(1981년생), 정은(1983년), 여정(1987년생)을 얻었다. 1995년경 김정일은 처제 고영숙으로 하여금 3남매와 함께 스위스 베른으로 가 그곳에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도록 했다. 고영숙은 남편 박남철(1954년생), 아들 박광혁(1983년)과 박혁(1985년), 딸 박은영(1988년)을 스위스로 함께 데리고 가 정은 남매를 돌봤다.
1998년 5월 고영숙 가족은 정은 남매를 두고 베른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들은 미국 CIA와 접촉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한국도, 북한도 아닌 다른 아시아 국가 출신 시민권자로 신분을 바꾼 뒤 미국 생활에 들어갔다. 성형수술로 얼굴도 완전히 바꿨다고 한다.
고씨 부부는 스위스은행에 개설해놓은 김정일의 비밀계좌도 관리했다. 북한은 스위스은행에서 세탁한 돈을 꺼내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의 증시에 투자하고 있었다. 고씨 부부는 이러한 사실을 CIA에 털어놓았다. 이 증언을 토대로 CIA는 정밀 추적에 나서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이 40억 달러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뉴욕증권시장 등에 투자한 김정일 자금을 동결시켰다.
이런 사정 때문이었는지 김정일은 정은을 즉각 불러들였다. 이후 정은은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했다. 그러나 정철은 베른 생활을 계속한 듯 베른대를 다녔다는 기록이 남았다.
고영숙 가족이 사라진 이후 가장 곤란해진 사람은 김정일의 아내 고영희였다고 한다. 1988~2001년 김정일 전속 요리사를 하다 탈출한 후지모토 씨는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책에서 “2000년 12월 고영희는 고민이 많았던 듯 젓가락을 쥐지 못할 만큼 심한 뇌경색을 앓았다”고 썼다. 고영희는 공식적으로는 2004년 유방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고영희가 숨지자 불안감을 느낀 오빠 고동훈은 자신의 가족을 이끌고 슬그머니 서유럽국가로 망명했다.
고영희 ‘평양의 어머니’로 우상화 시도
북한이 김정은 체제를 안정화하려면 고영희를 혁명의 어머니로 만들어야 한다. 실제로 북한 매체들은 고영희를 ‘평양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등 우상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일본에서 태어난 고영희는 제주 출신인 아버지 고경택(高京澤)을 따라 북한으로 들어갔다. 1991년 북한 외교관으로 있다가 귀순한 고영환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실장은 “북한은 고영희 가계를 통해 ‘백두에서 한라까지’를 추구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백두에서 한라까지’는 북한이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자주 쓰는 구호다.
고경택은 동갑인 양명녀와의 사이에서 고상훈(1951년생), 고희훈(1952년생), 고혜훈(1955년생)을 낳고 오사카 츠루하시(鶴橋)에서 살다가, 1962년 10월 21일 가족과 함께 제99차 귀환선을 타고 북한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상훈은 동훈, 희훈은 영희, 혜훈은 영숙으로 이름을 바꿨다. 북한에 들어가면서 고경택의 아내는 이맹인으로 바뀌는데 양명녀가 이맹인으로 개명한 것인지, 고경택이 재혼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에서 고영희는 무용을 익혀 19세인 1971년 만수대예술단에 들어갔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 김정일의 눈에 띄어 함께 살면서 세 아이를 낳았다. 김정일은 세 아이가 10대로 성장하자 세계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며, 처제인 고영숙 가족으로 하여금 이들을 데리고 스위스 베른으로 유학을 가게 했다가, 고영숙 일가의 미국 망명이라는 배신을 당하게 된 것이다. 북한은 이러한 사실을 완벽히 감춰야 안정적으로 김정은 체제를 끌고 나갈 수 있다.
고영환 실장은 북한은 정은의 외할아버지 고경택이 제주 출신인 점에 주목할 것으로 전망했다. 제주에서 혁명 의지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간 고경택이 혁명 완수를 위해 1962년 조국(북한)으로 돌아옴으로써 고영희가 정은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다며, 백두와 한라가 하나가 됐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 북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김정은은 김정일 장례 직후인 지난해 12월 29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이미 올랐다. 북한은 김일성을 영원한 국가주석으로 해놓았기에 주석직 승계는 하지 않는다. 김정일은 3년 탈상을 이유로 김일성 사후 3년 뒤에 4대 요직을 차지했으나, 김정은은 김정일 사후 4개월 만에 같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북한이 신속한 권력 승계를 추진하는 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잇는 ‘백두 줄기’를 내세워 북한을 안정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는 역으로 김정은 체제에 약점이 많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복형 정남은 중국을 떠돌고 평양에는 동복형 정철이 있으니, 정은은 ‘곁가지’를 제거하지 못한 채 권좌에 앉는 셈이다.
김정은 뒤에는 수상한 그늘이 드리워 있다. ‘주간동아’는 김정은의 배경을 밝히고자 취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찾아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가 김정은의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개 및 비밀 자료를 종합해 이 비밀의 일단을 공개하기로 한다.
‘곁가지’ 제거하지 못한 김정은
정남의 이종사촌인 고(故) 이한영(1961년생) 씨는 생전에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이라는 책을 냈다. 서울특파원을 지낸 일본 ‘도쿄신문’의 고미 요지(五味洋治) 기자는 정남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근거로 얼마 전 일본에서 ‘아버지 김정일과 나’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71년생인 정남은 9세 때인 80년 어머니 성혜림, 외할머니 김원주, 이종사촌 누나(이한영 씨의 여동생) 이남옥 등과 스위스 제네바로 건너가 제네바국제학교와 제네바대를 다녔다.
정남이 스위스로 가고 얼마 후 러시아 모스크바에 유학 중이던 이한영 씨가 합류했다. 그는 나중에 한국으로 망명했으나 1997년 경기 성남시 분당의 한 아파트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피살당했다. 이씨가 사라졌을 때 북한은 한국 국가정보원(안기부)이나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이씨를 납치했다고 추정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남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해 즉시 귀국시켜야 하는데, 계속 제네바에서 학교에 다니게 했다. 그 이유를 정남은 고미 기자와 주고받은 이메일에서 이렇게 우회적으로 설명했다(고미 책 요약).
“나는 스위스에서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언제나 현지 친구들 가운데 있었다(현지 친구와 잘 지냈다는 뜻).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유학 보낸 후 매우 외로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유학 간 얼마 후 (고영희로부터) 이복형제인 정철, 정은, 여정을 얻자 그쪽으로 애정을 쏟은 것 같다(자신에게는 신경을 껐다는 뜻). 아버지는 내가 완전히 자본주의 청년으로 성장해 북한으로 돌아갔을 때부터 나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버지는 모든 자식이 국제적인 견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이복동생들도 유학을 보냈다. 하지만 나에 대한 경험 때문인지 그들의 유학 기간을 단축했고, 현지 친구와 어울리는 것도 제한했다고 들었다.”
동유럽 공산국가와 소련이 무너진 1992년, 성혜림의 딸 이남옥이 어머니에게 뜻을 밝히고 서유럽국가로 조용히 사라졌다. 나중에 성씨도 서유럽국가로 망명해 그곳에서 살면서 곡절 많은 인생을 글로 썼는데, 2000년 이것이 한국에서 ‘등나무집’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성혜림이 정남을 낳은 후부터 우울증을 앓자 1970년대 중반 김정일은 그를 언니 성혜랑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로 보내고, 정남도 제네바에 유학 보내는 것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고영희와 가족을 이뤄 정철(1981년생), 정은(1983년), 여정(1987년생)을 얻었다. 1995년경 김정일은 처제 고영숙으로 하여금 3남매와 함께 스위스 베른으로 가 그곳에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도록 했다. 고영숙은 남편 박남철(1954년생), 아들 박광혁(1983년)과 박혁(1985년), 딸 박은영(1988년)을 스위스로 함께 데리고 가 정은 남매를 돌봤다.
김정일과 김정일 처 고영희, 장남 김정남, 차남 김정철, 성혜림의 조카 故 이한영(왼쪽부터).
고씨 부부는 스위스은행에 개설해놓은 김정일의 비밀계좌도 관리했다. 북한은 스위스은행에서 세탁한 돈을 꺼내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의 증시에 투자하고 있었다. 고씨 부부는 이러한 사실을 CIA에 털어놓았다. 이 증언을 토대로 CIA는 정밀 추적에 나서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이 40억 달러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뉴욕증권시장 등에 투자한 김정일 자금을 동결시켰다.
이런 사정 때문이었는지 김정일은 정은을 즉각 불러들였다. 이후 정은은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했다. 그러나 정철은 베른 생활을 계속한 듯 베른대를 다녔다는 기록이 남았다.
고영숙 가족이 사라진 이후 가장 곤란해진 사람은 김정일의 아내 고영희였다고 한다. 1988~2001년 김정일 전속 요리사를 하다 탈출한 후지모토 씨는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책에서 “2000년 12월 고영희는 고민이 많았던 듯 젓가락을 쥐지 못할 만큼 심한 뇌경색을 앓았다”고 썼다. 고영희는 공식적으로는 2004년 유방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고영희가 숨지자 불안감을 느낀 오빠 고동훈은 자신의 가족을 이끌고 슬그머니 서유럽국가로 망명했다.
고영희 ‘평양의 어머니’로 우상화 시도
북한이 김정은 체제를 안정화하려면 고영희를 혁명의 어머니로 만들어야 한다. 실제로 북한 매체들은 고영희를 ‘평양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등 우상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일본에서 태어난 고영희는 제주 출신인 아버지 고경택(高京澤)을 따라 북한으로 들어갔다. 1991년 북한 외교관으로 있다가 귀순한 고영환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실장은 “북한은 고영희 가계를 통해 ‘백두에서 한라까지’를 추구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백두에서 한라까지’는 북한이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자주 쓰는 구호다.
고경택은 동갑인 양명녀와의 사이에서 고상훈(1951년생), 고희훈(1952년생), 고혜훈(1955년생)을 낳고 오사카 츠루하시(鶴橋)에서 살다가, 1962년 10월 21일 가족과 함께 제99차 귀환선을 타고 북한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상훈은 동훈, 희훈은 영희, 혜훈은 영숙으로 이름을 바꿨다. 북한에 들어가면서 고경택의 아내는 이맹인으로 바뀌는데 양명녀가 이맹인으로 개명한 것인지, 고경택이 재혼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에서 고영희는 무용을 익혀 19세인 1971년 만수대예술단에 들어갔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 김정일의 눈에 띄어 함께 살면서 세 아이를 낳았다. 김정일은 세 아이가 10대로 성장하자 세계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며, 처제인 고영숙 가족으로 하여금 이들을 데리고 스위스 베른으로 유학을 가게 했다가, 고영숙 일가의 미국 망명이라는 배신을 당하게 된 것이다. 북한은 이러한 사실을 완벽히 감춰야 안정적으로 김정은 체제를 끌고 나갈 수 있다.
고영환 실장은 북한은 정은의 외할아버지 고경택이 제주 출신인 점에 주목할 것으로 전망했다. 제주에서 혁명 의지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간 고경택이 혁명 완수를 위해 1962년 조국(북한)으로 돌아옴으로써 고영희가 정은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다며, 백두와 한라가 하나가 됐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 북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