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어시장에서 만난 생선. 연안의 작은 배가 한 그물에서 올린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 서울에 왔다. 또 얼마 후 온 가족이 서울로 살림을 옮겼다. 그러면서 고향 바다와 멀어졌다. 그 멀어진 고향 바다를 가장 아쉬워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생선 때문이었다. 시장에는 온통 냉동 생선밖에 없었고 간고등어나 갈치는 한물간 것뿐이었다. 어머니는 가끔 수산시장으로 장을 보러 갔는데, 거기라고 해서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장에서 돌아온 어머니의 장바구니에는 생선이 몇 마리 들어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다리를 톡톡 두들기며 “아이고, 서울에는 정말 먹을 게 없다”고 하셨다.
어느 때는 어머니를 따라 수산시장에 갔는데, 웬만해 보이는 생선도 “아니다, 아니다” 하셨다. 옛날 고향 어시장 것과 비슷한 전어를 보시고도 “이건 아냐, 이건 맛없어” 하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나는 어머니의 그 까다로움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고향의 것과 무엇이 다른지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제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진작가와 제주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적이 있다. 사진작가는 제주 바다에서 나오는 것이 얼마나 맛있는지 자랑하려고 필자에게 온갖 것을 다 먹였다. 그때 정말 맛있게 먹은 게 고등어였다. 그는 말했다. “이건 그냥 고등어가 아니야. 근해에서 작은 배가 잡은 고등어야. 이게 진짜 고등어지. 제주 것이라 해도 먼바다에서 큰 배로 잡은 고등어하고는 달라. 해안가 바로 옆에서 잡은 게 맛있어.” 옥돔도 그렇고 갈치도 그렇다고 했다. 그때 내 고향 바다가 생각났고, 어머니 얼굴도 떠올랐다. ‘그래 맞아, 어머니 눈에는 그 바다가 다 보였던 거야.’
여기까지 읽고 무슨 만화 같은 이야기하고 있네 하는 독자도 있을 테고, “그래 맞아”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바다 가까이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 중에는 필자 이야기에 공감하는 이가 꽤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육지와 가까운 바다의 생선과 먼바다의 생선이 왜 맛에서 차이가 나는지는 알 수 없다. 제주의 그 사진작가는 육지와 가까운 바다는 물살이 거칠고, 먼바다는 그렇지 않은 탓이라 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물고기가 연안에 몰렸을 때의 생리적 상태나 먹이와 관련 있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아무튼 무엇인가가 다르다.
그러나 그 바다의 차이를 말로 이해했다고 해도 생선을 보고 그 차이를 알 수 있는 감각이 당장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비슷비슷한 생선을 보면서 어찌 그놈들이 놀던 바다를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또 어찌 맛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비록 생선 보는 눈은 없어도 또 다른 시각으로 연안의 생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요즘은 바닷가 어시장에도 먼바다 생선이 잔뜩 깔려 있으므로 이 방법이 유용할 것이다.
아래 사진은 전남 완도의 어시장에서 찍은 것이다. 농어, 불볼락(열기), 망상어, 참돔, 감성돔, 조피볼락(우럭) 등이 한 상자에 담겼다. 자세히 보면 산 놈이 있고 죽은 놈도 무척 싱싱하다. 이 생선은 육지와 아주 가까운 바다에서 한 그물에 잡힌 것으로, 작은 배가 잡아온 것을 부두에 닿자마자 시장에 푼 것이다. 먼바다 생선은 대체로 종류별로 분류해 어판장을 통해 경매하고, 이를 상인이 받아 팔기 때문에 이렇게 한꺼번에 살아 있는 상태로 팔리는 일은 없다. 또한 같은 종의 생선이 크기가 제각각인 것도 연안에서 작은 배가 한 그물로 잡은 것이라는 증거다. 바닷가 어시장에 갔다가 이런 생선 무더기를 만나면 복 받은 것이다. 이런 생선을 보면 무조건 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