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 소설 ‘광장’ 속 이명준은 6·25전쟁 직후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택한다. “남한에는 광장이 없고 북한에는 밀실이 없다”는 말을 남긴 채. 실제 6·25전쟁 이후 반공 포로 76명이 중립국을 택했다. 그들은 아르헨티나, 브라질, 인도로 흩어졌다. 그중 현재 인도에 살고 있는 반공 포로는 인도 한인회장을 지낸 현동화(80) 씨 단 한 명이다.
2011년 11월 말 인도 현지에서 마지막 반공 포로 현씨를 만났다. 고향을 떠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진한 북한 말씨가 남아 있었다. 그의 집 응접실 탁자에는 조선 민단 신문과 인도 한인신문이 흩어져 있었다. 그의 인생은 굴곡진 대한민국 분단 역사 그 자체였다.
현씨는 1932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50년 사동군관학교를 졸업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인민군 중위로 참전했다. 당시 나이 열여덟. 그는 그해 10월 포로로 잡혔다. 약 2년간 거제포로수용소에 수감돼 국군에 귀순했지만 그는 종전 후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국을 택했다.
“인민군으로 참전할 때부터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컸어요. 그 당시 이북에서 머리가 좀 있는 사람은 모두 공산주의를 싫어했고 이남에서 똑똑한 사람은 이북을 동경했죠. 그때는 남한에 남느니 미국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는데 미국은 바로 갈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제3국 멕시코로 가겠다고 한 거죠. 밀입국을 해서라도 꼭 미국에 가고 싶었으니까요.”
“소설 ‘광장’은 100% 픽션”
1954년 1월 중립국을 택한 인민군 포로 76명과 중공군 포로 12명은 인도 군인과 함께 인도로 가는 아스토리아호에 몸을 실었다.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비장한 생각에 빠졌는데 선착장에서 반공 청년단 150명이 ‘한국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외쳤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최인훈 소설 ‘광장’ 이야기를 꺼냈다.
“1960년대 남북의 이념과 고뇌에 대해 글을 썼다는 건 아주 놀라운 일이지만, 그 사건을 겪은 사람으로서 이야기하자면 최인훈 씨 소설에는 오류가 많습니다.”
일단 소설 속 이명준은 남과 북에 대한 환멸 때문에 제3국을 택했지만, 포로 76명의 생각은 제각각이었다. 현씨는 “나처럼 유학을 가려는 사람도 있었고 자유롭게 사업하고 싶어 제3국을 택한 이도 있었다”며 “우리가 모두 이념적 선택을 한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선장실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우정을 나누지만, 사실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당시 배에는 인도 군인 수백 명도 함께 타고 있었고, 포로가 도망갈까 봐 홍콩에 정박도 하지 않을 정도로 규율이 엄격했다는 것. 또 소설에선 타고르호가 3000t이라고 했지만 그들이 탄 아스토리아호는 2만4500t 선박이었다는 점, 소설에서는 배가 홍콩과 마카오를 거쳐 인도 캘커타(현 콜카타)로 갔지만, 실제로는 홍콩과 싱가포르를 거쳐 인도 남부의 첸나이에 정박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러한 ‘사소한 오류’ 말고도 현씨가 “광장은 100% 픽션”이라 주장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소설 속 이명준은 월북 후 로동신문사 편집국에 근무하는데, 북한 사정상 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
“이건 북한의 사고방식을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북한은 아무리 아버지가 고관이라도 남한 출신이면 절대 큰일을 안 줘요. 남로당 박헌영을 숙청하는 게 북한이죠. 똑똑하고, 무조건 찬양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은 다 위험요인으로 보거든요. 만에 하나 북한 위주 통일이 된다면 북한이 가장 먼저 처형할 사람이 남한 내 종북좌파 세력이에요. 그런데 남한에서 온 대학생을 바로 로동신문 기자를 시킨다? 말도 안 돼요. 특히 당시 로동신문은 신민당 기관지랑 공산당 기관지가 통합한 신문이었기 때문에 북한의 정치권력 중심에 있었어요. 실제 권력은 장차관보다 셌죠. 그리고 소설이 북한의 억압적인 통치 실상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아 아쉬웠어요. 소설보다 몇 배는 더 처절하고 숨 막히는 일을 내가 목격했는걸요. 소설 쓰기 전에 최 선생이 나랑 한 번 만났다면 훨씬 좋은 작품이 나왔을지도 모르죠(웃음).”
1년에 네 차례 이상 한국 방문
1954년 인도에 온 인민군 포로 76명은 2년간 뉴델리 야전병원에서 생활했다. 상당수 포로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로 떠났다. 현씨는 멕시코를 거쳐 미국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기다렸지만 멕시코는 끝내 포로 입국을 허용치 않았다. 그러다 결국 포로 4명만 인도에 남았다.
당시 인도정부는 이들의 자립을 위해 각 1만 루피씩 융자를 해줬다. 공부를 포기한 그는 그때부터 사업에 매달렸다. 델리 인근에 큰 양계장을 차려 성공했다. 이후 인도 힌두교사원에서 머리카락을 사 한국 가발공장에 수출했다. 힌두교도는 소원을 빌 때 머리카락을 잘라 사원에 바치는데, 사원은 이 머리카락을 모아 경매에 부친다. 1970년 현씨는 한국 기업을 도와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섬유공장을 세웠다. 이 밖에도 무역회사, 여행사 등을 차려 성공했다. 그는 “대한민국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사실 나는 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가장 힘들 때 나 혼자 잘되겠다는 생각으로 조국을 등지고 이곳에 왔잖아요. 거기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요. 그만큼 한국이 잘되게 백방으로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죠.”
그는 1962년 대한민국 국적을 획득했다. 지금도 1년에 네 차례 이상 한국을 방문한다. 두 자녀 모두 한국에서 대학을 마쳤다. 하지만 아직도 고향 함북 청진에는 가보지 못했다. 그는 “북한 처지에서 나는 민족 반역자인데, 죽기 전에 고향에 갈 수 있겠어?”라며 웃었다. 그는 2011년 초 강원 양구를 찾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6·25전쟁이 1951년에 끝나지 않은 이유는 반공 포로 때문이거든요. 북에 안 가겠다는 반공 포로 때문에 유엔군과 소련군이 이념적으로 옥신각신하다 보니 휴전하는 데 2년이나 걸린 거죠. 그때 양구에 가서 제4 땅굴을 봤는데 ‘아, 여기서 많은 육군, 유엔군이 죽었겠구나’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그게 나 같은 반공 포로 때문이잖아요. 가슴이 너무 벅차오르더라고요.”
12월 1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하자 그는 한 국내 언론과의 통화에서 “중국도 마오쩌둥 사망 후 급격히 사회가 바뀌었듯 북한 사회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짧게 답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가 빙긋이 웃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하트마 간디는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도 수단과 방법이 좋지 않으면 목적을 이루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북은 ‘목적을 달성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고 가르친단 말이죠. 북한에서 지금까지 반체제 사상을 가진 많은 젊은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어요. 현재 인민을 꽁꽁 묶어놨지만 여전히 사회 불만이 상당하죠. 이렇게 가면 통일은 결국 꼭 될 거예요. 내가 죽기 전에 통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2011년 11월 말 인도 현지에서 마지막 반공 포로 현씨를 만났다. 고향을 떠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진한 북한 말씨가 남아 있었다. 그의 집 응접실 탁자에는 조선 민단 신문과 인도 한인신문이 흩어져 있었다. 그의 인생은 굴곡진 대한민국 분단 역사 그 자체였다.
현씨는 1932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50년 사동군관학교를 졸업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인민군 중위로 참전했다. 당시 나이 열여덟. 그는 그해 10월 포로로 잡혔다. 약 2년간 거제포로수용소에 수감돼 국군에 귀순했지만 그는 종전 후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국을 택했다.
“인민군으로 참전할 때부터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컸어요. 그 당시 이북에서 머리가 좀 있는 사람은 모두 공산주의를 싫어했고 이남에서 똑똑한 사람은 이북을 동경했죠. 그때는 남한에 남느니 미국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는데 미국은 바로 갈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제3국 멕시코로 가겠다고 한 거죠. 밀입국을 해서라도 꼭 미국에 가고 싶었으니까요.”
“소설 ‘광장’은 100% 픽션”
1954년 1월 중립국을 택한 인민군 포로 76명과 중공군 포로 12명은 인도 군인과 함께 인도로 가는 아스토리아호에 몸을 실었다.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비장한 생각에 빠졌는데 선착장에서 반공 청년단 150명이 ‘한국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외쳤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최인훈 소설 ‘광장’ 이야기를 꺼냈다.
“1960년대 남북의 이념과 고뇌에 대해 글을 썼다는 건 아주 놀라운 일이지만, 그 사건을 겪은 사람으로서 이야기하자면 최인훈 씨 소설에는 오류가 많습니다.”
일단 소설 속 이명준은 남과 북에 대한 환멸 때문에 제3국을 택했지만, 포로 76명의 생각은 제각각이었다. 현씨는 “나처럼 유학을 가려는 사람도 있었고 자유롭게 사업하고 싶어 제3국을 택한 이도 있었다”며 “우리가 모두 이념적 선택을 한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현동화 씨 가족사진. 현씨의 두 자녀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이러한 ‘사소한 오류’ 말고도 현씨가 “광장은 100% 픽션”이라 주장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소설 속 이명준은 월북 후 로동신문사 편집국에 근무하는데, 북한 사정상 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
“이건 북한의 사고방식을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북한은 아무리 아버지가 고관이라도 남한 출신이면 절대 큰일을 안 줘요. 남로당 박헌영을 숙청하는 게 북한이죠. 똑똑하고, 무조건 찬양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은 다 위험요인으로 보거든요. 만에 하나 북한 위주 통일이 된다면 북한이 가장 먼저 처형할 사람이 남한 내 종북좌파 세력이에요. 그런데 남한에서 온 대학생을 바로 로동신문 기자를 시킨다? 말도 안 돼요. 특히 당시 로동신문은 신민당 기관지랑 공산당 기관지가 통합한 신문이었기 때문에 북한의 정치권력 중심에 있었어요. 실제 권력은 장차관보다 셌죠. 그리고 소설이 북한의 억압적인 통치 실상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아 아쉬웠어요. 소설보다 몇 배는 더 처절하고 숨 막히는 일을 내가 목격했는걸요. 소설 쓰기 전에 최 선생이 나랑 한 번 만났다면 훨씬 좋은 작품이 나왔을지도 모르죠(웃음).”
1년에 네 차례 이상 한국 방문
6·25전쟁 당시 거제포로수용소.
당시 인도정부는 이들의 자립을 위해 각 1만 루피씩 융자를 해줬다. 공부를 포기한 그는 그때부터 사업에 매달렸다. 델리 인근에 큰 양계장을 차려 성공했다. 이후 인도 힌두교사원에서 머리카락을 사 한국 가발공장에 수출했다. 힌두교도는 소원을 빌 때 머리카락을 잘라 사원에 바치는데, 사원은 이 머리카락을 모아 경매에 부친다. 1970년 현씨는 한국 기업을 도와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섬유공장을 세웠다. 이 밖에도 무역회사, 여행사 등을 차려 성공했다. 그는 “대한민국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사실 나는 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가장 힘들 때 나 혼자 잘되겠다는 생각으로 조국을 등지고 이곳에 왔잖아요. 거기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요. 그만큼 한국이 잘되게 백방으로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죠.”
그는 1962년 대한민국 국적을 획득했다. 지금도 1년에 네 차례 이상 한국을 방문한다. 두 자녀 모두 한국에서 대학을 마쳤다. 하지만 아직도 고향 함북 청진에는 가보지 못했다. 그는 “북한 처지에서 나는 민족 반역자인데, 죽기 전에 고향에 갈 수 있겠어?”라며 웃었다. 그는 2011년 초 강원 양구를 찾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6·25전쟁이 1951년에 끝나지 않은 이유는 반공 포로 때문이거든요. 북에 안 가겠다는 반공 포로 때문에 유엔군과 소련군이 이념적으로 옥신각신하다 보니 휴전하는 데 2년이나 걸린 거죠. 그때 양구에 가서 제4 땅굴을 봤는데 ‘아, 여기서 많은 육군, 유엔군이 죽었겠구나’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그게 나 같은 반공 포로 때문이잖아요. 가슴이 너무 벅차오르더라고요.”
12월 1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하자 그는 한 국내 언론과의 통화에서 “중국도 마오쩌둥 사망 후 급격히 사회가 바뀌었듯 북한 사회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짧게 답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가 빙긋이 웃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하트마 간디는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도 수단과 방법이 좋지 않으면 목적을 이루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북은 ‘목적을 달성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고 가르친단 말이죠. 북한에서 지금까지 반체제 사상을 가진 많은 젊은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어요. 현재 인민을 꽁꽁 묶어놨지만 여전히 사회 불만이 상당하죠. 이렇게 가면 통일은 결국 꼭 될 거예요. 내가 죽기 전에 통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