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冬蜘)
밤이고
밤이면 길바닥마다 거미가 집을 짓는 계절이다.
나는 쭈그려 앉아 투명한 거미집을 부순다.
양손 가득 찢겨진 거미집을 묻힌 채
얼굴을 감싸면 달이 떠오르는 소리 들린다.
타원형의 긴긴 달이 떠오르는 계절이다.
아이들이 가슴팍에 부엌칼을 숨긴 채
숨 가삐 언덕 위로 뛰어올라가는 계절이다.
머리에서 달을 닮은 뿔이 자라나고,
술에 취한 가난한 아비들이 밤마다 거미집에 걸려 전화하는 계절이다.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아비들의 목소리가 해가 뜨고 나서야 시반(屍班)처럼 퍼지는 계절이다.
손가락 끝으로 거미의 배를 누른다.
거미는 몽당연필처럼 작아지고
손가락 끝이 파랗게 언다.
손가락이 솜사탕보다 맛나던 계절이다.
자꾸만 손가락이 없어지던 계절이다.
온종일 방이 없는 집에 웅크려 있던 사람들도
참괴(慙愧)하며 구름을 생산하는 계절이다.
―김안, ‘오빠생각’(문학동네, 2011) 중에서
‘거미’는 곤충이 아니라 동물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추위가 싫었다. 추위 때문에 자연스럽게 몸이 움츠러들면 나는 가장 부자연스러운 포즈로 걸어야 했다. 이불을 돌돌 말고 귤 까먹는 것 외에는 그다지 큰 즐거움이 없는 계절. 동지(冬至)가 다가올수록 나는 왜소해졌다. 내 옆에 있다가 어느 순간 적이 돼버린 동지(同志)를 대하는 심정이었다. 손등을 호호 불며 학교에 가는 길은 언제나 너무 멀었다. “가슴팍에 부엌칼” 대신 손난로를 넣고 다녔다. 심장이 뛸 때마다 슬프게도 그것은 조금씩 차가워졌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쉬는 시간이 끝날 무렵 교실 뒤편에서 꺅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천장에서 거미가 발견된 것이다. 실처럼 얇은 줄 하나에 대롱대롱 매달려 추처럼 흔들리던 거미. 거미는 급기야 바로 다음 시간이었던 ‘슬기로운 생활’의 화두로 떠올랐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놀랄 만한 정보를 하나 알려주셨다. 거미가 곤충이 아니라 바로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반 전체는 난리가 났다. 우리가 알기로 동물은 털이 몽실몽실 나 있어야 하고 크기도 제법 커야만 했다. 응당 그래야만 했다.
선생님의 설명은 길었지만, 거미의 다리가 4쌍이라는 이유 외에 다른 건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우리의 머릿속은 이미 패닉이었다. 거미가 동물이라니! 저 손톱만 한 것이 동물이라니! 동물이라는 이유로 거미는 무시해도 되는 미물에서 금세 무시무시한 존재로 급부상했다. 토마토가 채소인 걸 알았을 때만큼의 충격이 당시에 있었다. 초대형 거미줄에 갇혀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빽빽 소리치는 심정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사이좋게 몰상식했던 것이다.
나중에야 나는 거미가 부적격 판정을 받아 곤충에서 동물이 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곤충이라는 부분집합에 속하지 못하고 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게 거미는 징그럽고 께름칙한 대상이 아닌, 구슬프고 안쓰러운 대상이 됐다. “몽당연필처럼 작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동물. 맘만 먹으면 “손가락 끝으로” 눌러 죽일 수도 있는 동물. 삼엽충을 조상으로 둔 동물.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에는 독을 발사하기도 하는, 살려고 강철보다도 더 강한 줄을 치는 동물. 전 세계에 약 3만 종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냥 ‘거미’일 뿐인 동물.
또다시 동지(冬蜘)가 다가온다. ‘겨울 거미’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할까. 거미집은 대체 어느 부위부터 지을까. 집을 완성할 때까지 거미줄을 쉬지 않고 계속 뽑아낼까. 방금 “구름”을 “생산하는” 오토바이 한 대가 휙 지나갔다.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나는 그만 “솜사탕”인 줄 알고 “손가락”을 확 깨물어버렸다. 겨울이 어느새 이만큼 와 있다.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밤이고
밤이면 길바닥마다 거미가 집을 짓는 계절이다.
나는 쭈그려 앉아 투명한 거미집을 부순다.
양손 가득 찢겨진 거미집을 묻힌 채
얼굴을 감싸면 달이 떠오르는 소리 들린다.
타원형의 긴긴 달이 떠오르는 계절이다.
아이들이 가슴팍에 부엌칼을 숨긴 채
숨 가삐 언덕 위로 뛰어올라가는 계절이다.
머리에서 달을 닮은 뿔이 자라나고,
술에 취한 가난한 아비들이 밤마다 거미집에 걸려 전화하는 계절이다.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아비들의 목소리가 해가 뜨고 나서야 시반(屍班)처럼 퍼지는 계절이다.
손가락 끝으로 거미의 배를 누른다.
거미는 몽당연필처럼 작아지고
손가락 끝이 파랗게 언다.
손가락이 솜사탕보다 맛나던 계절이다.
자꾸만 손가락이 없어지던 계절이다.
온종일 방이 없는 집에 웅크려 있던 사람들도
참괴(慙愧)하며 구름을 생산하는 계절이다.
―김안, ‘오빠생각’(문학동네, 2011) 중에서
‘거미’는 곤충이 아니라 동물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추위가 싫었다. 추위 때문에 자연스럽게 몸이 움츠러들면 나는 가장 부자연스러운 포즈로 걸어야 했다. 이불을 돌돌 말고 귤 까먹는 것 외에는 그다지 큰 즐거움이 없는 계절. 동지(冬至)가 다가올수록 나는 왜소해졌다. 내 옆에 있다가 어느 순간 적이 돼버린 동지(同志)를 대하는 심정이었다. 손등을 호호 불며 학교에 가는 길은 언제나 너무 멀었다. “가슴팍에 부엌칼” 대신 손난로를 넣고 다녔다. 심장이 뛸 때마다 슬프게도 그것은 조금씩 차가워졌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쉬는 시간이 끝날 무렵 교실 뒤편에서 꺅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천장에서 거미가 발견된 것이다. 실처럼 얇은 줄 하나에 대롱대롱 매달려 추처럼 흔들리던 거미. 거미는 급기야 바로 다음 시간이었던 ‘슬기로운 생활’의 화두로 떠올랐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놀랄 만한 정보를 하나 알려주셨다. 거미가 곤충이 아니라 바로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반 전체는 난리가 났다. 우리가 알기로 동물은 털이 몽실몽실 나 있어야 하고 크기도 제법 커야만 했다. 응당 그래야만 했다.
선생님의 설명은 길었지만, 거미의 다리가 4쌍이라는 이유 외에 다른 건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우리의 머릿속은 이미 패닉이었다. 거미가 동물이라니! 저 손톱만 한 것이 동물이라니! 동물이라는 이유로 거미는 무시해도 되는 미물에서 금세 무시무시한 존재로 급부상했다. 토마토가 채소인 걸 알았을 때만큼의 충격이 당시에 있었다. 초대형 거미줄에 갇혀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빽빽 소리치는 심정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사이좋게 몰상식했던 것이다.
나중에야 나는 거미가 부적격 판정을 받아 곤충에서 동물이 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곤충이라는 부분집합에 속하지 못하고 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게 거미는 징그럽고 께름칙한 대상이 아닌, 구슬프고 안쓰러운 대상이 됐다. “몽당연필처럼 작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동물. 맘만 먹으면 “손가락 끝으로” 눌러 죽일 수도 있는 동물. 삼엽충을 조상으로 둔 동물.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에는 독을 발사하기도 하는, 살려고 강철보다도 더 강한 줄을 치는 동물. 전 세계에 약 3만 종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냥 ‘거미’일 뿐인 동물.
또다시 동지(冬蜘)가 다가온다. ‘겨울 거미’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할까. 거미집은 대체 어느 부위부터 지을까. 집을 완성할 때까지 거미줄을 쉬지 않고 계속 뽑아낼까. 방금 “구름”을 “생산하는” 오토바이 한 대가 휙 지나갔다.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나는 그만 “솜사탕”인 줄 알고 “손가락”을 확 깨물어버렸다. 겨울이 어느새 이만큼 와 있다.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