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4일 주민투표 투표율이 25.7%에 그치자 오세훈 서울시장이 착잡한 표정으로 시 청사를 빠져나가고 있다.
주민투표 결과가 정치권에 불러온 파장은 서울에서의 나비 날갯짓이 중국 베이징에 폭풍우를 몰고 온다는 카오스 이론의 나비효과처럼, 총선과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 지각 변동을 불러올 수 있다. 당장 주민투표 참여를 독려했던 여권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앞으로 두세 달 동안 여의도는 물론, 정치권 전체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갈 것이다.”
무상급식 주민투표율이 20%에도 미치지 못했던 8월 24일 오후 3시. 한나라당 A의원은 이렇게 전망했다.
“오세훈 시장이 사퇴하면 보궐선거(이하 보선)를 치러야 한다. 서울시장 보선에 누구를 내세울 것이냐를 두고 당이 술렁일 수밖에 없다. 보선 결과가 나오면 또 어떻게 되겠나. 주민투표와 서울시장 보선 후폭풍은 여권 전체를 쓰나미처럼 강타할 것이다. 결국 내년 총선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투표율이 투표함 개함 요건인 33.3%에 못 미치는 25.7%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한나라당 지도부는 정반대의 해석을 내놨다. 홍준표 대표는 ‘사실상 오세훈 시장의 승리’로 규정해 눈길을 끌었다. 한발 더 나아가 8월 2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홍 대표는 “내년 4월 총선의 희망을 봤다”고 말했다.
정치권 전체 블랙홀에 빠져들어
주민투표 결과에 대해 홍 대표가 ‘승리’를 언급한 배경은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오 시장을 뽑은 유권자, 그리고 서울시의원을 뽑는 정당별 비례대표선거에서 한나라당에 투표한 유권자보다 더 많은 수가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참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오 시장은 208만6127표를, 서울시의원을 뽑는 정당별 비례대표선거에서 한나라당은 180만7719표를 얻었다. 8월 24일 무상급식 주민투표장에 나온 유권자는 이보다 많은 215만9095명이었다.
한나라당이 ‘투표 참여’를, 야5당이 ‘투표 거부’를 외치며 운동에 나섬으로써 이번 주민투표는 사실상 반(半)공개투표였다는 점에 빗대어 홍 대표는 ‘주민투표 참여 유권자=한나라당 지지층’으로 해석한 것이다.
복지 이슈는 내분까지 몰고 올 파괴력
산술적으로 비교하면, 2008년 18대 총선에서 서울 지역 한나라당 후보가 얻은 득표수보다 이번 주민투표장에 나온 유권자가 더 많다는 점에서 한나라당이 ‘내년 총선의 희망’을 제시한 것은 일견 설득력을 지닌다(그림 참조). 서울 25개 구 가운데 18대 총선 때 한나라당 후보 득표수보다 주민투표 유권자 수가 적은 곳은 성동구, 동대문구, 서대문구 등 세 곳뿐이었다. 이 지역 국회의원은 홍 대표(동대문을)와 정두언 여의도연구소장(서대문을)이다.
홍 대표의 ‘승리’ 강변에도 오세훈발(發) 주민투표 강진 여파는 쓰나미처럼 한나라당을 덮쳤다. 친이계와 친박계 간 갈등 골이 깊은 한나라당에 주민투표는 ‘복지 vs 복지 포퓰리즘 반대’라는 또 다른 갈등의 불씨를 안겼기 때문이다. 주민투표에 중립적 태도로 일관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주민투표가 몰고 온 후폭풍에서 한발 비켜서 있다. 그렇지만 ‘복지’ 담론을 두고 한나라당에 새로운 갈등 전선이 형성된 점은 박 전 대표에게도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오 시장이 주민투표를 밀어붙이기 이전까지 정치권의 복지 담론은 재정효율성에 대한 여야 논쟁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오 시장이 주민투표를 강행하면서 ‘복지 vs 복지 포퓰리즘 반대’라는 새로운 전선을 만들었다.
한 전직 의원은 “박 전 대표는 생애맞춤형 복지를 주장한다. 그런데 오 시장이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을 막겠다며 주민투표를 밀어붙였다. 복지 이슈를 두고 한나라당 내에서 이견을 노출한 것이다. 이 같은 차이는 한나라당 분란의 새 불씨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일각에서 “주민투표 결과를 둘러싸고 이념 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복지 담론에 대한 보수 진영의 이견이 주민투표 이후 더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경희대 학부대학 김민전 교수는 “복지 이슈는 한나라당을 내분으로 몰고 갈 파괴력을 지닌다”면서 “‘복지 포퓰리즘 반대’라는 보수 이념을 끝까지 밀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나라당) 인사들은 이번 주민투표 결과를 두고서도 오히려 ‘보수 진영 전체가 보수 이념을 더욱 뚜렷이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김 교수는 다만 “오 시장이 주도한 주민투표 이슈는 한나라당 지도부가 어찌할 수 없었던 사안인 만큼, 당 지도부에 미칠 충격은 크지 않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렇지만 오 시장이 주민투표 이후 즉각 시장직에서 물러나면 한나라당 지도부는 주민투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서울시장 보선을 치러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후보 선정에서부터 당내 잡음이 재연될 수밖에 없고, 보선 결과에 따라서는 책임론이 불거질 수도 있다.
이재오 특임장관 복귀 또 다른 변수
이재오 특임장관.
민주당 우상호 전 의원은 “서울시장 보선 통합 후보를 누구로 할지를 논의하다 보면, 서울시 공동 행정부 구성이나 내년 총선 지분 약속 등이 뒤따를 것”이라며 “서로 한 발씩 양보하면 큰 무리 없이 통합 후보를 선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민전 교수는 “총선에서 이명박 정부 심판 프레임을 활용할 수 있는 야권에 일단은 유리한 형국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선거는 후보가 누구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만큼 (서울시장) 보선과 총선 결과를 속단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주민투표 후폭풍이 올해는 물론, 내년 총선에까지 여권 측에 악재로 작용하리라는 분석도 있다. 정치 관련 여론조사 전문가 B씨는 “주민투표에 나타난 민심을 확인한 한나라당 서울 지역구 의원들은 총선 패배 위기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며 “총선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대대적인 공천 물갈이나 이명박 대통령과의 차별화 등 자구책을 강구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친이계와 친박계 간 갈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명박 대통령 재임 5년 차에 치르는 내년 총선은 ‘정권 심판’적 성격이 강해 공천 물갈이 대상 역시 대통령 측근이 될 개연성이 높다. 이 때문에 ‘물갈이 공천=친이계 학살 공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당내 중도 성향 인사들은 친박계 투항이 용이하지만, 박 전 대표 대척점에 서 있던 친이계 인사들은 공천 국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
정치컨설턴트 C씨는 “위기감이 고조된 친이계 진영이 ‘앉아서 죽으나 서서 죽으나 매한가지’라는 극단적 판단을 하면 반(反)박근혜 전선을 분명히 하고 박근혜 대항마 띄우기에 일찌감치 나설 것”이라면서 “주민투표 이후 친이계와 친박계 간 대립 구도에서 친박계와 반박계 간 대립 구도로 당이 급속히 재편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권에서 박 전 대표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이재오 특임장관이 조만간 당에 복귀하는 것도 한나라당 내 갈등을 키우는 또 다른 요소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이 장관이 당에 돌아와 어떻게 움직이든 박 전 대표 처지에서는 껄끄러울 것”이라며 “이 장관이 직접 대항마로 뛰든, 대항마 띄우기에 앞장서든 이 장관은 내년 총선 전까지 박 전 대표와 힘겨루기를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말했다. 여론조사 전문가 B씨는 “총선 이전에 친이계와 친박계 간 갈등을 봉합하지 못하면, 공천 국면에서 최악의 경우 당이 쪼개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오 시장이 펄럭인 주민투표 날갯짓이 정치권에 어떤 지각 변동을 몰고 올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