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사진) 오디션장 밖 복도. 지원자들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뮤지컬 배우들에게는 진리로 통하는 말이다. 뮤지컬 배역은 제작자가 처음부터 특정 배우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만들거나, 무대 경험이 많아 실력이 검증된 A급 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하는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디션으로 결정한다. 사실 A급 배우도 대부분 오디션에 참여한다. 오디뮤지컬컴퍼니 신춘수 대표는 “뮤지컬 배우에게 오디션은 숙명”이라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뮤지컬 오디션은 교사가 학생의 성적을 매기듯 지원자의 실력을 평가하는 작업이 아니다. 작품 속 배역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를 찾는 것이 오디션의 목적이다. 그래서 인기 연예인이나 유명 뮤지컬 배우도 오디션을 봐야 하는 일이 많다.”
실력+이미지+가능성 있는 배우 발굴
2월 21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서울시뮤지컬단 연습실을 찾았다. 이곳에서 뮤지컬 ‘투란도’의 공개 오디션이 열렸기 때문. 이번 공연은 서울시뮤지컬단 김효경 단장이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뮤지컬로 재창작한 작품. 이날 오디션에 응시한 지원자는 120여 명으로 경쟁률이 30대 1이 넘는다.
일반적으로 오디션 지원자 중에는 연극영화과나 무용과 전공자가 많다. 서울시뮤지컬단 홍보팀 박향미 씨는 “이번 오디션에는 유난히 성악과 출신 지원자가 많다”며 “이번 작품이 오페라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뮤지컬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날 오디션에서 심사위원들이 평가할 항목은 자유곡·지정곡 부르기와 연기 및 움직임 테스트. 지정곡은 ‘나를 인도하던 별’(남성 지원자)과 ‘그 누가 알까’(여성 지원자)로, ‘투란도’에서 쓰일 곡이다. 지정곡은 오디션 20여 일 전에 지원자들에게 알렸다. 이와 달리 연기 대본과 지정 움직임은 오디션 당일 공개했다.
심사위원으로 자리한 가수 윤복희 씨(왼쪽에서 두 번째)와 서울시뮤지컬단 김효경 단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 지원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매섭다.
홍금단(34) 씨는 ‘오페라의 유령’ ‘카르멘’ 등 여러 뮤지컬 무대에 서본 11년 차 베테랑 배우다. 그는 “이젠 오디션이 익숙할 법한데도 매번 떨린다”며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2006년부터 뮤지컬 배우로 활동해온 박인배(29) 씨는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다. 박씨는 “다른 오디션장과 달리 성악과 출신이 많아 조금 부담스럽다”면서도 “성악 전공자보다 연기는 나을 것이다. 노래를 할 때도 노랫말에 감정을 실어 더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다. 꼭 불리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번 들어오세요.” 오디션 진행요원이 지원자의 지정번호를 호명하자 지원자가 오디션장에 들어섰다. 지원자의 맞은편에는 서울시뮤지컬단 단장이자 이번 작품의 연출을 맡은 김효경 단장을 비롯해 서울시오페라단 박세원 단장, 엄기영 음악감독, 가수 윤복희 씨 등 7명의 심사위원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번 오디션의 가장 큰 취지는 참신하고 실력 있는 배우를 발굴하는 것. 그 때문일까. 심사위원들의 눈빛이 유독 날카로웠다.
한 여성 지원자가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 지원자는 신영미(32) 씨로 “일본에서 뮤지컬 배우로 활동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신씨가 자유곡과 지정곡을 부르고 나자 윤복희 씨가 “지정곡의 후렴구를 다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신씨가 후렴구를 부르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김 단장이 “쭉쭉 가세요” “몸을 움직이지 말고 누에가 실을 뽑듯 다시 불러보세요. 투란도는 도도한 공주라는 걸 유념하고요” 하고 소리쳤다. 기자 옆에 앉은 한 진행요원은 “심사위원이 노래를 다시 시키거나 무언가를 더 지시하면 합격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라고 귀띔했다.
한 남성 지원자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당당하게 들어와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넘버 ‘지금 이 순간’을 열창했다. 심사의원들의 표정이 만족스러운 듯했다. 하지만 지원자가 지정곡을 부르자 김 단장은 “연습이 부족한 것 같다”며 날카롭게 지적했다.
오디션장에 들어선 지원자 중에는 노래를 시작할 타이밍을 놓치거나, 노래 부르는 도중에 음 이탈을 한 이도 있었다. 아쉬움과 실망이 가득한 표정에 심사위원들도 안타까운지 “긴장하지 말고, 편안하고 여유 있게 하세요”라고 격려했다.
매 작품에 어울리는 지원자가 중요
심사위원들은 “지원자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입을 모았다.
그렇다면 심사위원들은 어떤 지원자에게 높은 점수를 줄까. 앞에서도 언급했듯 작품 속 배역과 잘 어울리는 이미지를 가진 지원자가 유리하다. ‘투란도’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엄기영 음악감독은 “음색, 외모, 노래하는 스타일 등 전반적인 부분이 배역과 어울려야 한다”며 “다시 말해 오디션에서 탈락했다고 해서 합격자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투란도 역의 경우, 품위를 갖춘 공주이기 때문에 지원자의 외모도 무시할 수 없다.
지원자의 ‘성장 가능성’도 중요한 평가 요소다. 연출자가 작품에서 강조하려는 바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배우고 무대에서 표현할 수 있는 지원자가 합격할 확률이 높다. ‘투란도’는 오페라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이기 때문에 일반 뮤지컬보다 노래의 난이도가 높은 편. 김 단장은 “이번 공연 곡의 전반적인 특징은 진성과 가성을 수시로 넘나든다는 점이다. 노랫말 역시 한 곡 안에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즉 음역대가 넓고, 진성과 성악 발성을 자연스럽게 구현할 수 있는 지원자가 유리하다.
엄 감독은 “노래 가사의 전달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단지 성악적인 기술로만 뮤지컬 노래를 부르려는 지원자가 있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오히려 말하듯이 가사를 정확히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 관객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다음 가사가 무엇인지 궁금해야 한다. 노래를 자신의 이야기 들려주듯 부르는 지원자에게 좋은 점수를 줬다.”
‘투란도’ 오디션의 평가 항목 중에는 연기와 움직임이 포함됐지만 심사위원들은 대부분 지원자에게 이를 요구하지 않았다. 김 단장은 “심사 경험이 풍부한 심사위원들은 지원자의 걸음걸이, 몸가짐만 봐도 무용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기 역시 마찬가지. 뮤지컬 노래를 부르는 모습만 봐도 연기 수준을 평가할 수 있다는 설명.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오디션은 오후 7시20분이 훌쩍 넘어서야 끝났다. 오디션 현장을 참관한 기자 역시 지원자들의 뛰어난 실력에 여러 차례 감탄했다. 심사위원들은 하나같이 “오디션을 볼 때마다 실력이 뛰어난 지원자가 넘쳐나 고심한다”며 “실력을 충분히 갖췄다면 오디션 과정을 즐기라”고 조언했다.
“오디션은 적절한 배역을 찾는 과정이다. 적극적으로 임하되 좌절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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