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검장은 사법연수원 13기 동기인 박용석 대검찰청 차장, 차동민 서울고검장 및 14기인 노환균 대구고검장과 ‘1인자’ 자리를 놓고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의 행보 하나하나가 5개월여를 앞둔 검찰총장 후임 인선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중대’ 시점에 한 전 청장이 한 지검장 앞에 홀연 나타난 것.
차기 검찰총장 앞두고 쏠린 시선
한 지검장은 서울중앙지검장 취임 전까지 일선 지검장 경력이 전무했다. 법무부 인권과장·법무심의관·법무실장, 부산지검 1차장, 서울고검장 등 수사와는 거리가 먼 직책을 주로 맡았다. 이 때문에 검찰 내에선 기획·정책통으로 일컬어지며, ‘약장(弱將)’ 이미지가 굳었다. 한 지검장의 중앙지검장 임명을 두고 검찰 내에서 “‘약장’으로 통했던 그에게 전국 검찰청 중 가장 크고, 강력한 중앙지검을 맡겨 지도력과 배포를 평가해보겠다는 취지”라는 설이 돌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 지검장도 이런 평가가 신경 쓰였을까. 2월 1일 취임 일성으로 ‘수사 패러다임 전환’을 부르짖으며 ‘검찰 개혁’의 포부를 밝혔다. 그는 “사람 중심의 수사, 보물찾기식 수사는 이제 성공할 수 없다”면서 “시대가 변하면 수사 기법과 방식도 진화해야 하며, 정보 수집·내사·조사에 이르기까지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혐의(보물)를 찾기 위한 마구잡이식 사람 수사와 압수수색으로 비판 여론이 일었던 한화·태광그룹 수사를 염두에 둔 발언이라는 분석이 우세했다. 첫 지검장 부임이라는 약점을 다른 지검장과의 차별화를 통해 희석하려는 전략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한 지검장이 주창한 ‘과학 기반 신(新)수사 패러다임’은 오래지 않아 실체를 드러냈다. 정치적 해석이 분분한 사안보다는 증거와 물증으로 ‘똑’ 떨어지는 사건에 주력하는 것이었다. 바로 ‘금융 범죄’ 수사였다.
실제 그의 부임 이후 △도이치뱅크의 ‘옵션쇼크’ 사건(지난해 11월 주가가 하락하면 이익을 얻는 ‘풋옵션’ 11억 원어치를 사전 매수한 뒤 현물 주식을 대량으로 팔아 주가지수를 급락시키는 수법으로 448억여 원의 시세차익을 챙긴 사건) △무일푼으로 코스닥 상장사를 인수한 뒤 수백억 원을 빼돌린 사건(“2000억 원대 바이오 펀드를 조성하겠다”면서 사채를 끌어들여 창업투자사 N사를 인수한 뒤 이 회사 유상증자 대금 247억 원을 빼돌려 사채 변제 등에 쓴 사건) △조세피난 지역 페이퍼컴퍼니 설립 및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로 재산을 빼돌린 뒤 수백억 원대의 세금을 탈루한 사건 등 금융 범죄 관련 결과물이 줄줄이 쏟아졌다.
강풍보다는 미풍만 불 것(?)
모두 정치적 해석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사건이다. 한 법조계 인사는 “증거와 물증이 확실한 금융 범죄 관련 수사로 정치권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것”이라며 “노환균 전 중앙지검장(현 대구고검장)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의지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노 전 지검장은 민간인 불법 사찰, 한명숙 전 총리 뇌물수수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수사하며 야권과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이와 관련해 한 지검장은 최근 송상엽 회계사의 ‘회계원리’, 김인준 서울대 교수의 ‘국제금융론’,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쑹훙빙의 ‘화폐전쟁’ 등 경제·금융 관련 수사실무 및 전문지식 서적 35권을 필독서로 정해 배포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정치적 후폭풍이 거셀 것이 불 보듯 뻔한 ‘한상률’ 건이 뚝 떨어지자 법조계의 이목은 한 지검장에게 집중됐다. 한 전 청장 사건은 ‘개인 비리’와 ‘권력형 비리’가 혼재한 복합형 비리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개인 비리 의혹은 △그림 로비 의혹(2007년 당시 국세청 차장이던 한 전 청장이 전군표 전 국세청장에게 인사 청탁 명목으로 고 최욱경 화백의 고가 그림인 ‘학동마을’을 상납했다는 것) △금품수수 의혹(S해운, A호텔, B주류업체 등의 세무조사 무마 대가로 금품을 받았다는 것) 등이다.
권력형 비리 의혹은 △청장 연임 로비 의혹(노무현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으로의 교체를 앞두고 여권 실세들에게 골프 접대 등을 하며 로비했다는 것) △태광실업 특별세무조사 관련 직권남용 의혹(태광실업 세무조사를 관할기관인 부산지방국세청이 아닌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에 배당한 것) △도곡동 땅 실소유주 관련 의혹(안원구 전 국세청 국장이 “도곡동 땅은 이명박 대통령이 실소유주”라고 발언한 것) 등으로 대별된다.
국세청의 한 인사는 “한 전 청장은 참여정부에 이어 MB정부에서도 청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면서 “이런 상황에 그가 굳이 여권 실세들에게 연임 로비할 이유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어 그는 “태광실업 수사 건은 지역 유착을 우려한 ‘교차 조사’의 일환이었지, 윗선이 개입하거나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박연차 게이트’를 수사했던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도 “한 전 청장은 박연차 게이트 수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에 대해서는 모를 것”이라면서 “검찰 수사도 ‘그림 로비’ 의혹 규명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당의 강풍보다는 야권의 미풍 선택
법조계뿐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한 전 청장에 대한 검찰 수사는 이 같은 전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우위를 점한다. 물론 ‘수사는 생물’이라는 말이 있듯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으로 번질 수도 있다.
한 유력 야당 인사는 “정권 3년 차에 즈음해 이 대통령 퇴임 이후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할 한 전 청장 건을 털고 가려는 것일 뿐이다. 권력형 비리는 건드리지 못하고 개인 차원의 비리 정도로 정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인사는 이어 “야권도 검찰 수사 발표 이후 특검 도입이나 국정조사를 요구하긴 하겠지만 의례적인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의미심장한 얘기를 했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돌연 귀국하면서 차기 검찰총장 유력 후보인 한상대 서울중앙지검장(왼쪽)에게 법조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한 전 청장이 전군표 전 국세청장에게 선물했던 그림 ‘학동마을’을 구입한 서미갤러리(오른쪽 아래). 검찰은 3월 3일 한 전 청장의 자택과 서미갤러리를 압수수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