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 발자국처럼 팬 자국 가득한 장구목. 섬진강 제일의 절경으로 꼽힌다.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저무는 강으로 갑니다.
소리 없이 저물어가는
물 가까이 저물며
강물을 따라 걸으면
저물수록 그리움은 차올라
출렁거리며 강 깊은 데로 가
강 깊이 쌓이고
물은 빨리 흐릅니다.
(김용택 ‘땅에서’ 중)
시를 읊조려도 아리송하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기자는 강을 모른다. 강가에 가만히 서본 적도, 소리 없이 저무는 강물을 바라본 적도, 차오르는 그리움을 강물에 흘려보낸 적도 없다. 그래서 시구 전부가 알 듯 말 듯하다. 강물 따라 걸으면 시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8년 만의 강추위가 닥친 가을 아침, 작정하고 전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다.
전주를 거쳐 도착한 전북 임실. 이곳 바람은 서울보다 더 매섭다. 찐빵 3개 호호 불며 몸을 덥히고 배를 채운 뒤 다시 진메마을로 가는 차에 오른다.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장산)마을. 길 장(長), 메 산(山)의 ‘긴메’를 주민들이 ‘진메’라 불러 진메마을이 됐다. 오늘 걸을 구간은 진메에서 출발, 천담~구담~장구목을 잇는 왕복 4시간 코스. 섬진강 212km 중에서도 절경으로 꼽히는 길이다.
논밭을 가로질러 15분쯤 달렸을까. 잘생긴 느티나무 두 그루가 진메마을 표지를 대신한다. 나무 뒤를 살피니 납작 엎드린 소박한 가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 시인의 생가다. 김 시인은 진메마을에서 나고 자라, 인근 덕치초등학교에서 반평생 아이들을 가르쳤다. 지난해 정년퇴임한 뒤에도 고향마을을 찾는 발걸음은 여전하다. 소싯적 보따리 둘러매고 오가던 등굣길. 이제는 지겨울 법한데 걸을 때마다 새롭다 한다.
“계세요?”
큰 소리로 불러도, 툇마루에 걸터앉아 쿵쿵 발을 굴러봐도 기척이 없다. 김 시인의 모친은 지금껏 생가에 머물며 오가는 과객을 손수 맞는다. 주인 없는 집 정원을 한 바퀴 빙 둘러본다. 이곳의 문은 주인이 있거나 없거나 늘 열려 있다. 아들이 써내려간 시와 그 시를 낳은 섬진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새벽녘 발걸음이라도 환영이다. 아담하지만 정갈하게 손질된 정원과 반질반질 윤이 나는 장독 더미에서 모친의 됨됨이가 전해진다.
‘관란헌(觀瀾軒)’. 맨 왼쪽에 자리한 방에 낡은 팻말이 비뚜름히 걸렸다. 시인은 퇴계 선생의 시 구절을 따 자신의 서재에 ‘마루에서 물결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문고리를 빼곡 잡아당기니 과연 그 이름 그럼직하다. 앉은뱅이 책상머리에 가부좌 틀고 앉으니 섬진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책 냄새 맡으며 시상을 궁리하고, 시 한 구절 썼다 지우길 반복했을 시인의 젊은 날을 떠올리니 괜히 마음이 설렌다.
넉넉히 반겨주는 김용택 시인 생가
진메마을 초입의 김용택 시인 생가.
진메마을에서 천담마을까지는 4km. 느린 걸음으로도 50분이면 충분하다. 왼편은 섬진강, 오른편은 산자락. 반복되는 풍경이지만 시시각각 물빛이 변하는 까닭에 지루할 틈이 없다. 연두, 청록, 보라, 노랑…. 시선과 빛이 빚어내는 각도에 따라 공작 날개처럼 강물도 색을 갈아입는다. 물빛은 푸르다는 등식은 오늘부로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한다.
차분히 흐르는 강물, 낮고 맑은 하늘, 푸릇푸릇한 나뭇잎이 어우러진 멋진 길. 다만 그늘 하나가 아쉽다. 물결이 되쏘아낸 가을 햇살 눈부셔, 풍경을 꼼꼼히 마음에 새기기 힘들다. 하지만 4년 정도 지나면 이 길에서 멋진 그늘을 만끽할 수 있게 된다. 그때쯤이면, 어른 키만 한 이팝나무가 훌쩍 자라 양팔 드리워 그늘을 만들 것이다. 바람이 불어 하얀 이팝 흐드러지게 날리는 진풍경 볼 날이 머지않았다.
걷다 보니 어느새 흙길 대신 시멘트 길이다. 오랜 기간 섬진강 따라 도는 길은 본디 모습을 유지해왔지만 3, 4년 전부터 곳곳에 시멘트 길이 들어섰다. 천담마을 초입, 저 멀리 갈대밭이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갈대 사이사이 강아지풀도 숨어 있다. 툭, 갈대 줄기를 건드려도 꿈쩍하지 않는다. 갈대 꺾어 손에 쥐는 대신 강아지풀에 다가가 뺨을 비빈다. 부들부들한 강아지풀에 몸도 마음도 간질간질, 웃음이 난다.
강물 오른쪽으로 따라 난 길 끝, 천담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한때 시인이 머물던 천담분교는 황폐한 모습이다. 10년 전 마지막 학생이 떠나면서 문을 닫은 분교는 수련원으로 모습을 바꿨다. 분교는 사라졌지만, 장마철 강을 건너지 못해 발 동동 굴리던 아이들의 마음은 시인의 시 ‘천담분교’에 남았다.
천담마을을 지나면 아스팔트 포장길이 펼쳐진다. 이 길 따라 2.5km를 걸으면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구담마을. 지금은 쏘가리 천지지만, 그 옛날 강 구석구석 자라가 활개를 쳐 ‘거북이 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 구담마을은 매화와 설경으로도 유명하다. 매화 수만 그루가 꽃 틔운 봄과 사방이 눈산에 둘러싸인 겨울이면, 전국에서 화가들이 몰려든다.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구담마을 언덕배기에는 초가와 양옥 1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언덕배기 한가운데에는 상서로운 기운의 마당이 자리한다. 느티나무 대여섯 그루가 빙 둘러싼 아담한 마당. 마을 사람들이 정월 대보름이면 당산제를 펼치던 곳이다. 삼신할머니 모셔다 나무에 금줄 치고 풍년과 다복을 빌던 곳.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당산제가 사라진 자리, 이제는 마을 어르신들의 놀이터가 됐다.
“홍시 달디. 먹어먹어.”
키보다 3배는 긴 채로 감을 따던 어르신이 묻지도 않고 홍시를 건넨다. 적당히 떫고 적당히 달다. 감씨와 홍시 껍질 버릴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기자에게 어르신이 한마디 던진다.
“아무 데나 뱉어. 아무 데서나 오줌을 눠도 거름이여.”
기기묘묘한 장구목 풍경에 눈이 행복
장구목에서 내룡마을로 돌아가는 오솔길.
내룡마을부터 장구목까지는 마을길이다. 논밭 사이로 시멘트 길이 길게 이어져 있다. 길 위로 키 낮은 나무와 갈대 그림자가 빼곡하다. 길바닥에는 뭉개져 들러붙은 감, 속이 터진 밤송이, 죽은 벌레가 질서 없이 흩어져 있다. 그림자 꾹꾹 눌러 밟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장구목이다.
장구목이 가까워오니 절로 발꿈치에 힘이 들어간다. 멀리서 봐도 기기묘묘한 풍경에 어서 가까이 가닿고 싶다. 이곳 절경의 일등공신은 움푹움푹 팬 바위. 운동장 4분의 1만 한 크기의 납대대한 바위들은 공룡이 밟고 지나간 것처럼 군데군데 패어 있다. 발자국을 밟아도 보고, 냉큼 그 구멍에 앉아도 본다. 아무래도 신기하고 재미있다. 예전에 소리꾼들이 종종 득음을 하러 찾아들었다는데, 과연 큰 울음 울 만한 곳이다.
모든 바위 모양이 특이하지만, 꼭 봐야 할 바위가 있다. 요강바위다. 무게가 25t에 달하는 이 바위에는 깊이 1.8m의 큰 구멍이 패어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큼 깊다. 이 바위 가운데에 소변을 보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전해온다. 잘생긴 탓에, 1993년 중장비를 동원한 도둑이 바위를 훔쳐간 걸 되찾아온 사연도 있다.
장구목 바로 옆 장구목가든의 문을 두드리니 주인장이 오디(뽕나무 열매) 술 두 잔을 내준다. 술기운에 몸이 뜨뜻해지고 눈앞이 아른거린다. 비틀걸음으로 되돌아오는 섬진강 길은 또 다른 속살을 내어보인다. 겹겹이 섬진강을 휘감아 도는 먼 옛날 빨래 방망이질 소리, 닥나무 뜯는 소리, 물고기 잡는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날이 저물고, 다시 출발점인 진메마을에 선다. 시구는 여전히 아리송하지만 별세상에 다녀온 듯 기분이 붕붕 나른다. 벌써부터 섬진강 설경(雪景)이 기다려진다.
Basic info.
☞ 교통편
승용차 | 호남고속도로 전주IC로 진입 →전주시내(동부우회도로)를 관통해 17번 국도를 타고 전주에서 남원 방면으로 약 30km →임실군
대중교통 | 서울 남부고속버스터미널-임실 고속버스 1일 14회 운행
문의 | 임실군 문화관광과 063-640-2344
숙박 | 장구목에는 장구목가든 등 민박을 하는 집이 몇 곳 있다. 구담마을은 11월 50여 명 수용 규모의 숙소가 문을 열 예정이다. 임실군 문화관광과로 문의하면 적당한 민박을 소개해주기도 한다. 단체로 방문할 때는 지역 해설사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