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 중수부는 10월 21일 서울 중구 광교동 C&그룹 사옥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였다.
검찰의 이런 행보는 장기간의 철저한 내사 과정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수사 착수와 동시에 비자금의 전달루트(사용처) 확인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즉 비자금의 윤곽은 이미 파악을 끝냈고, 이제 그 흐름만 잡아내면 된다는 얘기다. 오히려 시중의 관심은 중수부의 잘 벼른 칼날이 C·그룹에 이어 어느 기업으로 향할지에 모아지고 있다. 검찰 살생부에 올랐다는 소문이 도는 대기업들은 서울 서초동 대검청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분위기다.
Y, L, S 등 살생부 오르내려
C·그룹은 2002년에서 2006년까지 4년 동안 은행 차입금을 통해 문어발식으로 사세를 확장하다 2007년과 2008년 사이엔 해운업이 쇠하면서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검찰은 C·그룹이 이 두 시기에 각각 다른 이유로 정치권, 금융권 등에 폭넓게 로비를 한 것으로 본다. 전자는 M·A(기업 인수합병)와 사세 확장을 위해, 후자는 부도 방지와 연명을 위해 자금 대출 또는 확보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정재계에 전방위 로비를 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현금 동원이 가능했던 C·우방, C·상선, C·해운, C·라인 등 4개 계열사를 통해 비자금을 집중 조성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C·그룹 전직 간부도 “C·우방, C·상선, C·해운 3개 계열사가 주된 비자금 조성 창구였고, 여러 계열사를 통해 2000억 원대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C·그룹의 해외 비자금 규명에도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검찰은 C·그룹이 핵심 계열사인 C·중공업, C·라인 등의 해외법인을 통해 ‘역외탈세’ 수법으로 수백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 비자금은 탈세·횡령 등 기업비리 사건에서 자주 등장한다. 사실상 기업이 다양한 방법으로 해외로 빼돌린 자금은 당국의 통제권을 벗어나기 때문에 기업 차원의 ‘로비 자금’이나 총수 개인의 ‘쌈짓돈’으로 전용되기 쉽다. C·그룹도 “해외법인이 비자금을 조성해 임 회장의 개인 금고 역할을 한다”는 소문이 그룹 내에 파다했다.
C·그룹 로비와 관련된 ‘정치권 살생부’의 윤곽도 또렷해지고 있다. 검찰은 C·우방 등 계열사 4곳을 통해 조성한 비자금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 유력 정치인 5~6명에게 흘러들어간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법조계와 정치권 안팎에서 떠돌던 10여 명에서 3~4명 줄어들었다. 검찰이 해당 정치권 인사들의 관련성을 구체화하면서 소환 대상 범위를 좁히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당초 검찰의 사정권에 든 인물은 야권의 486 전·현직 의원 6명과 거물급 중진 3~4명 등 8~9명에 달했으나 현재는 Y, L, S 등 486 의원 4~5명과 거물급 중진 1~2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전해졌다. 여당 의원 중에서도 L의원 등 2명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검찰은 임 회장이 영장실질심사 때 “정치인을 만났다”고 한 진술도 주목하고 있다.
검찰은 임성주(66) C·그룹 부회장, P의원의 측근인 K씨 등을 불러 정치권과 금융권에 대한 로비 혐의를 보강 수사한 뒤, 사실관계가 확인된 의원부터 소환조사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정당국 관계자는 “정치인 소환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우병우 대검 수사기획관도 “C·그룹이 공적자금 1조7000억 원 정도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비리를 저질러 금융권에 1조 원 이상의 부실을 가져왔다”면서 “이와 관련한 수사를 진행하면서 로비가 확인되면 수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해당 인사들은 C·그룹과의 관련성을 적극 부인하고 있다.
중수부가 정치권 로비 수사에 직접 나선 만큼 정치인 1~2명 소환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의혹 수사 때도 중수부는 ‘리스트’ 존재를 부인했지만, 결국 박 전 회장의 여비서가 쓴 다이어리가 결국 살생부가 된 적이 있다. 10여 년 비서로 근무해온 여직원이 박 전 회장이 만난 사람과 장소, 일시, 접대물품 등을 수첩에 깨알같이 적어둔 것이 정·관가를 뒤흔든 ‘핵폭탄’이 됐다.
‘게이트’ 수준으로 파장 번질 듯
공기업을 제외한 한국 10대 재벌기업.
우리은행은 2007년 11월부터 2008년 3월 사이 C·구조조정 유한회사와 C·중공업에 ‘유효담보가액’을 뻥튀기하는 수법으로 대출한도를 초과해 불법대출을 일삼았다. C·구조조정 유한회사는 2007년 11월 우리은행에 765억 원의 대출을 신청했다. 우리은행은 C·그룹 계열사 4곳의 주식가격을 63%, 48%, 41% 등 은행법보다 높게 산정해 유효담보가액을 639억 원으로 책정한 뒤 625억 원을 대출해줬다. 사정당국 관계자는 “은행법에는 주식회사의 발행주식에 대해 그 가격의 ‘100분의 20’(20%)을 초과해 담보를 설정할 수 없도록 돼 있다. 이는 곧 그 이상 대출하면 불법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은행은 이런 규정을 무시했다”고 설명했다. 우리은행으로부터 2177억 원을 대출받은 C·중공업도 2008년 3월 이 같은 편법으로 100억 원을 추가로 대출받았다.
중수부가 대기업 수사에 직접 나선 것은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종료된 지난해 6월 이후 1년 4개월 만이다. 그동안 갈고 벼른 중수부의 사정 칼날이 C·그룹으로 향하자 법조계, 재계 등에서는 의외라는 반응이다. 중수부가 주로 대형 ‘권력형 비리’를 다뤄온 점에 비춰볼 때, 재계 서열 71위로 청산 절차를 밟고 있는 C·그룹 수사는 ‘격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수사는 대기업 사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신호탄’ 및 중수부의 ‘몸 풀기’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한화그룹, 태광그룹 등에 대한 수사가 서울서부지검에서 진행 중인 점으로 미뤄볼 때 중수부의 다음 타깃은 적어도 재계 서열 10위 안에 드는 대기업일 가능성이 크다.
검찰과 재계 등에서는 ‘포스트 태광’ 후보 기업으로 S, L, K 같은 대기업 이름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재계 10위권인 한화그룹보다 더 큰 그룹의 계열사가 역외펀드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도 나온다. 중수부는 이들 기업 중 한 그룹의 비자금 조성과 정관계 로비 등의 정황을 포착하고, G20 정상회의가 끝난 후 수사에 착수한다는 방침이다. 검찰수사가 대기업 비리에 집중된다면 ‘게이트’ 수준의 사건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