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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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내려놓고 찾은 아버지의 길

‘아버지는 매일 가출하고 싶다’

  •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10-10-25 11: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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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위 내려놓고 찾은 아버지의 길

    김희곤 지음/ 다산책방 펴냄/ 256쪽/ 1만2000원

    한가위 직후 나는 대학을 졸업한 막내딸에게 신문 연재를 새로 시작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딸이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아니, 베스트셀러 연재한다고 1년 동안 고생하다가 몸 망치고는 두 달 술을 끊은 뒤 이제 겨우 추슬렀는데, 또 연재를 시작하신다고요?”

    나는 딸이 그렇게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딸이 정말로 아빠를 걱정한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번 연재는 3주에 한 번이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하고 나서야 딸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이 일 이후 나는 아버지의 도리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요즘 아버지의 지혜를 다룬 책이 유행이다 싶을 정도로 쏟아지고 있다. 그중 ‘20년 차 철없는 아버지가 솔직하고 행복하게 사는 법’이란 부제가 달린 ‘아버지는 매일 가출하고 싶다’란 책을 제목에 이끌려 집어들었다.

    우리에게 아버지란 누구인가? 1996년 혜성처럼 등장해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아버지’(김정현 지음)에서 주인공은 췌장암 선고를 받고서 뒤늦게 가족에게 헌신하려 하지만 결국 화해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이 소설은 아버지가 늙어가는 것이 안쓰러워 눈물을 흘리는 딸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아 베스트셀러가 됐다. 우리에게 아버지는 그렇게 죽어서야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곤 했다.

    가족을 책임지는 아버지에게는 항상 힘든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아들과 딸의 아버지이자 건축가인 ‘아버지는 매일 가출하고 싶다’의 저자에게도 그랬다.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마흔다섯,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자신을 더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회사를 접고 스페인 유학을 결심했다. 그리고 10년 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는 건축경기 악화로 회사가 펑크 난 자동차처럼 주저앉았다. 저자는 몇 달간 무급 휴가를 결정했다.



    그때 저자는 입시지옥에서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 아들과 함께하기로 작정했다. 가족의 시선을 피해 도서관으로 줄행랑을 놓은 것이 아니라, 아들과 나란히 책상에 앉아 조용히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 옛날에는 부모님 3년상을 치렀지만 요즘은 자식의 3년상(고등학교 3년)을 치른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도 운이 좋아야 3년이지만 말이다.

    대한민국 보통 남자가 그렇듯 저자도 50년 넘게 자신의 삶을 화장으로 가리고 살았다. 수없이 먹이를 쫓으며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다가 결국 자신도 상처받았다. 그렇게 먹이사슬의 네트워크를 전전하며 경험한 것이 고스란히 아들의 입시로 모아졌다. 건축가라면 누구나 공개경쟁의 아픔과 희열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그는 대학입시 낙방의 아픔마저 경험했다. 그럼에도 특목고 시험에서 떨어진 딸의 아픈 마음보다 추락하는 자신의 면목을 먼저 생각한 적이 있는 아빠이기도 하다.

    저자의 행복한 순간은 늘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대출하는 것처럼 쫓기며 살았다. 하지만 스페인 유학 시절, 행복을 추구하는 스페인 사람들의 여유로운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약점을 후벼 파기보다는 장점을 바라보면서 오늘 하루에 의미를 두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인생을 즐겼다. 그들은 또 타인의 가치에 자신의 삶이 구금당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했다.

    저자가 아들과 함께하기란 쉽지 않았다. 30분 넘기가 무섭게 아들과 번갈아가며 냉장고 문을 여닫았다. 참다못한 아내에게서 ‘아예 냉장고 안에 신방을 차려!’라는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아들에게 있는 대로 엄살을 부리며 속마음을 털어놓고, 툴툴거리듯 적당히 마음을 흘렸다. 아들 곁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아버지도 사람이고 남자고 허점투성이라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아버지 권위가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마음을 열어 보이니 대화의 물꼬가 터졌다. 그러자 가족 간의 친밀감이 훨씬 커지면서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욕심을 다스리는 법과 가족의 마음을 얻는 아버지의 길을 찾은 것이다.

    책 제목은 저자의 실제 행동과는 정반대다. 골프도 포기하고, 술자리도 줄이고, 산책과 운동으로 육신과 영혼에 자유를 주기 시작한 저자는 집으로 돌아왔다. 책을 덮으며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얻은 지혜도 있다. ‘멀리 보이는 기암절벽을 오르는 것도 좋지만, 내 집 안마당의 나무를 감상하는 것이 더 값진 삶’이라는 깨달음이다. 나도 이제 아버지의 최대 장점인 세월이 가르쳐준 뻔뻔함으로 가족에게 더욱 솔직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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