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4일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에서 이례적인 보도자료를 내놓았다. 유업계 1위인 서울우유가 9월 10일 서울우유 1ℓ등 주요 제품 가격을 약 200원 인하한 이후 남양유업, 매일유업, 빙그레 등 4개 업체도 평균 10% 내외로 가격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공정위는 “업체의 가격 인하로 우유 부문 소비자물가지수가 1.9% 하락했다”며 “유업계의 자발적인 가격인하 사례가 타 생필품 분야로도 확산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사장단·실무진 협의로 가격인상 시기, 폭 결정
업체의 담합 및 불공정행위를 조사하는 공정위가 이처럼 ‘우수 사례’를 홍보한 것은, 최근 물가폭등 원인이 업체들의 담합이라는 비판이 커지면서 이를 예단하지 못한 공정위에 책임론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10월 5일 국회 정무위원회에 제출한 업무보고를 통해 “우유, 커피, 비료, 농약, 자동차 정비수가 분야의 담합 등 불공정행위를 조사 중”이라고 밝힌 것처럼 최근 서민 생활에 밀접한 생필품 관련 담합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1위 업체인 롯데칠성음료가 가격을 인상하면, 4개 업체도 뒤따르는 걸로 하죠.”
2007년 11월 30일. 롯데칠성음료, 해태음료, 웅진식품 등 8대 음료업계 사장단이 모임을 가졌다. 청량음료실무자협의회(이하 청실회)란 이름의 이 모임에서 사장단은 월별 매출목표, 매출실적, 판촉정보, 영업전략 등 정보를 교환하고 가격인상 계획 및 내역을 교환했다. 이들은 “가격을 인상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 인상 방법과 시기 등을 합의했다. 이후 5사(롯데칠성음료, 코카콜라음료, 해태음료, 동아오츠카, 웅진식품)의 실무자는 전화, e메일, 메신저 등으로 자료를 주고받으며 가격인상 정보를 교환했다. 그 결과 2008년 2월 5개사는 동시에 과실음료는 10%, 탄산·기타음료는 5% 인상했다.
(위)공정위는 삼성전자 등 3사가 공공기관에 납품하는 TV, 에어컨 값을 담합한 사실을 적발했다. (아래)공정위가 담합 조사를 하자 유업계는 재빠르게 우윳값을 내렸다.
2009년 8월 공정위의 시정 조치가 떨어지기 직전에 4개 업체는 자발적으로 각 2~4% 가격을 내렸다. 하지만 공정위는 롯데칠성음료에 217억 원, 해태음료에 23억 원, 웅진식품에 15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또한 이 중 상습성이 짙은 롯데칠성음료와 해태음료를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고발, 10월 18일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는 롯데칠성음료와 해태음료 및 두 업체의 대표이사를 각각 불구속 기소했다.
공공기관에 시스템 에어컨과 TV를 납품하는 삼성전자, LG전자, 캐리어 등 가전회사도 10월 14일 가격을 담합한 사실이 적발됐다. 공정위는 3개 업체에 총 191억670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3개 업체는 2007년부터 3년간 정부에 제품을 판매하는 가격을 담합해 유지 또는 인상했다. 에어컨 ‘T분기관’의 경우 2008년 3개 업체 모두 4만7800원으로 정부에 납품했으나, 2009년에는 담합해서 모두 8만7000원을 받았다. 전력제어 시스템의 경우 “최소 300만 원 이상 인상해 가격을 현실화하자”고 합의해 각 업체는 2008년보다 60만~90만 원 인상된 가격으로 정부에 납품했다. 이들은 “제시하는 가격이 똑같으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며 가격을 제시할 때 각각 1000원 정도 차이를 두는 치밀함도 보였다. 위의 에어컨과 TV는 주로 초중고, 대학교, 교육청 등 교육 관련 기관에 공급됐다. 공정위 측은 “3사의 담합이 없었다면 더 많은 초중고교에 에어컨과 TV를 공급할 수 있었다”고 비판했다.
소비자 피해액 10%도 안 되는 과징금 처벌
최근 두 달 새 보험료는 약 7%나 올랐다. 9월 자동차보험 업체들이 일제히 보험료를 평균 4% 올렸고, 10월에는 온라인전용 보험사 4곳과 일부 손해보험사가 2∼3% 선으로 올린 것.
공정위는 “인상률도 천편일률적이어서 담합 의혹이 있다”며 조사에 나섰다. 이에 보험업계는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12개 중 8개 업체의 손해율이 80%가 넘는다. 손해율을 따지자면 인상폭을 6~7%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업체들이 모두 같은 시기에 가격을 올린 것에 대해 “정부 및 시민단체의 감시와 비판 때문에 한 업체만 보험료를 인상하기가 쉽지 않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 모든 업체가 비슷한 시기에 올린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보험료 담합 행위는 매년 빠지지 않는 공정위의 적발 메뉴다. 공정위는 2009년에도 삼성생명, 대한생명, 교보생명 등 12개 생명보험사의 퇴직보험 및 단체보험을 집중 조사해 담합한 정황과 증거를 확보, 총 100억 원이 넘는 과징금을 부과한 바 있다.
“편의점보다 치킨집이 많은 시대인데, 치킨 가격이 1만6000~1만8000원으로 대동소이합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민주당 이성남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치킨값 담합 의혹을 제기했다.
공정위에서 지속적으로 감사를 해도 담합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은 “담합이 적발됐을 때 내는 과징금이 지나치게 적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실련에 따르면 2006년부터 2010년 7월까지 공정위가 적발한 기업 담합은 총 79건. 관련 상품 매출액도 76조4021억 원에 이른다. 기업 담합으로 빚어지는 피해액을 관련 매출액의 15∼20%로 추정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을 적용하면 지난 5년간 국내에서 발생한 소비자 피해추정액은 11조5000억 원 내외. 하지만 당국이 기업에 매긴 과징금은 추정액의 12%인 1조3000억 원에 그쳤다. 경실련 관계자는 “과징금이 소비자들이 본 피해에 턱없이 못 미치고, 검찰 고발도 많지 않은 등 공정위가 솜방망이 처벌을 하니까 기업들이 계속 담합하는 것”이라며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간다”고 비판했다.
또한 담합이 적발돼도 가격이 인상 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 역시 담합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담합 업체에 과징금은 부과해도 가격을 강제로 인하하게 할 수는 없어 업체의 자발적인 가격 인하를 바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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