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인수대비)가 묻힌 경릉은 동원이강형으로 조성됐다. 사진은 덕종의 능침.
의경세자는 세조의 맏아들로 이름은 장(暲), 자는 원명(原明)이다. 1455년 세조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면서 왕세자로 책봉됐다. 단종과는 사촌지간으로 나이는 세 살이 더 많았다. 의경세자는 한확의 딸 한씨와 결혼해 월산대군을 낳고, 세자 책봉 후인 1457년 자을산군(성종)을 낳았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스무 살에 요절했다.
세자가 병이 나자 왕실은 환구단(원구단), 종묘, 사직 등에서 기도를 드리며 온갖 정성을 기울였으나 9월 2일 본궁(경복궁) 정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이 된 단종은 다시 노산군으로 강봉돼 영월로 유배되고, 단종 추종세력이 복위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서예를 잘했던 의경세자는 승하 직전 ‘비바람 무정하여 모란꽃이 떨어지고, 섬돌에 펄럭이는 붉은 작약이 주란(朱欄·붉은 칠을 한 난간)에 가득 찼네. 명황(明皇)이 촉(蜀·중국 삼국시대에 유비가 세운 나라) 땅에 가서 양귀비를 잃고 나니, 빈장(嬪·임금의 수청을 들던 궁녀)이야 있었건만 반겨보지 않았네’라는 시를 썼다. 세자를 간호하던 사람들이 이 시를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며 걱정했다. 아버지의 왕위찬탈 과정을 지켜본 세자의 중압감을 표현한 글이라고 했다.
결국 세자가 사망하자 세조는 수차례 묏자리를 물색하게 하고 산형도(山形圖)를 그려 친히 선지를 했다. 양주 대방동, 광주, 과천, 양덕원, 공주 원평, 한강나루, 건원릉 근처, 헌릉 근처, 용인, 교하, 원평, 양근, 풍양도원 등 수많은 곳을 찾았으니 기록상 역대 가장 많은 곳의 상지(相地·자리 잡기)였다. 마지막에 오늘날의 고양으로 결정됐다.
세조가 묏자리 물색 후 직접 전작
1457년 10월 24일 세조는 세자의 조묘도감(왕릉을 조성하는 기관은 ‘산릉도감’이라 하고, 세자와 왕세자비 등의 능은 조묘도감에서 조영한다)에 “석실 및 석상·장명등·잡상은 세자 묘 형식을 따르고, 사대석·삼면석·석난간·삼개석은 설치하지 말라”는 전지를 내렸다. 같은 날 단종은 사사돼 시신이 동강에 버려졌으나 엄흥도가 이를 몰래 수습해 매장했다.
단종의 장릉과 의경세자의 경릉, 두 능의 입지와 규모, 석물은 비교될 수밖에 없다. 폐위된 단종의 무덤은 유배지에 초라하게 마련됐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의경세자는 부왕이 진두지휘하는 가운데 수도권에 거대하게 조영됐다. 이런 상황을 하늘에 있는 할아버지인 세종은 알고 있었을까.
1 인수대비(소혜왕후)의 묘는 손자인 연산군이 조영했으나 석물 등의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2 추존왕 덕종의 능침. 사실상 조선시대 최초로 조영된 세자의 묘다.
세조는 조묘도감에 어찰을 내려 “무덤 안은 마땅히 후하게 하고, 무덤 밖의 석물은 간소하게 하라”고 했다. “백성을 번거롭게 하고, 죽은 자에게는 유익할 것이 없다”는 세조의 능역 간소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현궁 안은 충분한 예우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필자가 조선시대 능역을 측량한 결과, 경릉이 석물의 수는 적으나 조각이 정교하고 봉분의 지름도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실로 그 내부가 궁금하다. 국제학술대회 때도 외국 학자들이 조선 왕릉의 내부에 많은 관심을 가졌듯이, 당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 조묘도감 의궤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임진왜란 때 소실돼 더욱 궁금증을 자아낸다.
실록의 내용을 토대로 내부를 추정해보면 현궁은 북쪽으로 머리를 하고 가운데에 있으며 애책(哀冊·죽음을 애도해 쓴 글)을 서쪽, 증옥(贈玉·죽은 사람의 무덤에 함께 묻던 옥돌)과 증백함(贈帛函·비단 선물함)을 남쪽에 두고 그 옆에 명기(明器·그릇 등 도기)와 복완(服玩·일상 집기와 애장품)을 나열했다. 나머지 것은 문비석(門扉石·남문의 문짝) 밖의 편방(便方)에 넣었다. 지석(誌石)은 남쪽 봉분과 석상 사이 북쪽에 묻었다 한다. 이곳은 1471년 의경세자가 둘째 아들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되면서 능호를 경릉이라 했다.
인수대비와 손자 연산군의 악연
소혜왕후는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 왕위(성종)에 오르면서 인수대비로 책봉됐다. 인수대비는 청주의 세가 출신으로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 자문했으며, 경전의 불경을 언해하고 부녀자의 도리인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다.
인수대비는 1504년, 덕종이 승하하고 47년이 지나 손자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 되던 해 한여름 창경궁 경춘전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가 사약 받은 사건에 연관된 사람들을 숙청하려 하자 인수대비는 이를 꾸짖다가 연산군의 머리에 받혀 사망했다고 한다.
인수대비가 승하한 뒤 연산군은 “대행대비께서 조정에 임하신 지 오래이나 나라에 이렇다 하게 한 일이 없으며 다만 자친(慈親)으로 섬겼을 뿐이니, 의경세자보다는 높게 하고 안순왕후(예종의 계비, 인수대비의 손아래 동서)보다는 좀 낮추어 세자빈의 예를 따르라”고 했다. 대행대비의 시호는 소혜(昭惠), 휘호는 휘숙명의(徽肅明懿)로 결정했다. 할머니 소혜왕후를 머리로 들이받아 사망케 한 연산군이 능원을 조성했으니 정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왕과 왕비의 발인은 원래 5개월과 3개월 중 논의를 거쳐 결정하나, 연산군은 62일을 제안했다. 신하들이 “천자는 7개월이 돼야 방궤(方軌·여러 수레)가 다 이르고, 제후는 5개월이 돼야 동맹이 다 이르게 된다”고 했으나 연산군은 결국 27일로 장례기간을 단축했다.
이때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시호를 제헌왕후(齊獻王后), 능호를 회릉(懷陵)으로 하여 정성 들여 능의 격식에 따라 추숭(追崇)을 하고 있었다. 소혜왕후의 상기를 단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연산군은 의금부를 시켜 어머니의 폐비에 앞장서고 사약을 내리는 데 관여한 한명회의 묘를 파헤쳐 머리를 잘라 청주 저잣거리에 효수하게 했다.
신장 크고 당당한 문인석이 특징
소혜왕후 능침의 무석인.
발인 때도 당일 지송(祗送·백관이 임금의 거가를 공경해 보냄)을 하지 않고 전날 백관을 거느리고 조전(祖奠·발인 전에 영결을 고하는 제사의식)을 행했다. 발인 날 백관과 유생, 노인들도 모화관 앞에서 지송하게 했다. 이는 법도에 없는 일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인수대비의 능침 조영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인수대비 능침의 석물은 조각의 질이 떨어지고 석질이 무르다. 또한 우왕좌비의 원칙을 벗어나 우비좌왕의 특이한 형태다.
좌측 능선에 있는 덕종의 능침은 난간석이나 망주석이 없고, 석양과 석호도 2쌍이 아닌 1쌍만 있다. 이는 덕종이 세자로 있을 때 승하했기 때문이다. 성종은 아버지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능역도 왕릉의 형식으로 재조성하려 했으나, 인수대비가 선왕 세조의 유시에 따라 검소하게 할 것을 명해 석물을 더 세우지 않고 간소화했다. 덕종의 능침에는 문인석만 있는데 조각의 머리 부분이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크고, 신장이 매우 커서 당당해 보이는 게 특징이다. 전면의 관대에는 문양이 없고 뒷면 관대도 4각 외형만 5개 있다. 요대 역시 문양 없이 좌에서 우로 사선형을 이룬다. 덕종 능침의 팔각 장명등은 조선 초기의 형태로 규모가 크고, 장명등 옥개석 아래의 처마 밑 처리가 한옥의 다포 양식으로 돼 있어 당시의 처마 모습을 볼 수 있다.
우측의 소혜왕후 능침은 덕종의 능침과 달리 난간석이 있다. 석양과 석호 등의 동물상도 각각 2쌍이 있으며, 문석인과 무석인까지 모두 갖춰 다른 왕릉의 석물 배치와 다를 바가 없다. 단, 문석인과 무석인은 마모가 심하다. 무석인은 체구에 비해 손이 크고 우람하며 흉갑의 문양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연산군이 서둘러 조영한 탓으로 보인다. 왼쪽의 청룡 언덕 너머 입구에 있는 재실 터는 ‘경릉지’ 등에 현장 그림이 있어 복원이 가능하다.
제향공간의 중간에는 정자각이 하나 있다. 경릉은 전위공간이 넓어 마치 골프장의 잔디 곡선처럼 아름답다. 정자각 전면에는 왼편에 수복방 세 칸이 있으며, 좌측의 수라청은 소실됐다.
덕종과 소혜왕후 사이의 둘째인 성종의 능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산131번지에 있으며 능호는 선릉(宣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