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광주 금남로에서.
“5·18 때 아지매들이 만들어 날랐던 그거 그대로랑께.”
5·18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아 광주의 번화가 금남로는 완전히 통제됐다. 도로 중앙에는 큰 특설무대가 마련됐다.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에서 판소리, 사물놀이, 난타 등 공연을 했다. 흥이 난 사람들은 덩실덩실 춤을 췄고, 많은 사람이 우산을 받치고 선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5월 셋째 주 월요일, 성년의 날과 겹친 탓에 빨간 장미꽃을 들고 가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었지만 공연을 구경하는 사람은 대부분 50대 이상이었다.
“저건 다 헛짓이여. ‘광주사태’가 뭔지도 모르는 놈들이….”
이날 오후 9시. 술에 취한 이지훈(55) 씨는 팔을 휘휘 저으며 30년 전처럼 금남로 한복판을 걸었다.
“갑자기 놈들이 총을 ‘따당’ 쐈어. 놀라서 저기 우리은행 있는 건물에서 당시 공사하던 이 지하도까지 엉금엉금 기었지. 그러다 겨우 지하도로 들어갔는데 그 안에 최루탄을 터뜨려서….”
공포에 떨던 그는 막내 남동생이 사흘째 돌아오지 않아 다시 집을 나섰다. 혹시라도 동생이 있을까 도청 앞 시체더미를 뒤졌다. 친구 집에 숨어 있던 동생은 다행히 사흘 만에 돌아왔다. 50대 중반이 된 그는 지금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날 갑자기 잊고 지냈던 30년 전 일이 떠올라 금남로를 찾았다고 했다.
기억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5·18
“나는 유공자도 아니고 부상자도 아니지만, 그때 광주에 살았다는 죄로 지금까지 아프고 화가 나. 축제? 웃기지 말라고 해. 그때 죽은 사람들 원통함은 어쩌라고.”
밤늦게까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비가 쏟아지는데도 학생들은 우비를 입은 채 가수들의 공연에 열광했다. 10여 명의 친구와 어울리던 전남대 응용화학공학부 1학년 김모(19) 씨는 “고등학생 때 교과서에서 5·18민주화운동을 배웠다. 실감 난다기보다는 그냥 중간고사도 끝났고, 이런 공연이 있다고 해서 친구들이랑 나왔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내일 추모식에도 참여할 거냐?”고 물으니 “글쎄요…”라며 자리를 떠났다. 비를 피하러 도청 건너편 커피숍에 들어갔을 때 만난 한 여고생은 오히려 기자에게 “오늘 왜 길까지 막은 거예요?”라고 물었다.
“이제 5·18도 서른 살이니 한 세대가 지났죠. 지금 세대는 경험하지 못한 일이니 무덤덤할 수밖에요. 가르치지 못한 우리의 잘못도 크고요.”
늦게나마 대학 국문과에 입학해 작가가 되길 꿈꿨던 스무 살 청년. 하지만 5·18민주화운동은 그를 투사로 만들었다. ‘5·18민주화운동 구속부상자회’ 김공휴(50) 이사는 당시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다 27일 새벽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제대로 된 직장을 갖지 못했고 고문 후유증으로 지금도 술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다. 덤덤하게 당시 이야기를 하던 그는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정부는 젊은 세대에게 5·18을 가르치기는커녕 지역 문제, 진보세력 문제로 축소하려고 하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못 부르게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평생 불러온 분신 같은 노래, 어떤 핍박도 견디게 한 버팀목 같은 노래를 빼앗다니요.”
‘5·18 30주년 행사위원회’ 정동년(67) 공동상임위원장 역시 “5·18 정신을 계승하기는커녕 사소한 것조차 걸고넘어져 갈등을 조장하는 정부의 의도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그리고 두 곳의 기념식
5월 18일, 비는 더욱 세차졌다. 오전 8시 30분경, 망월동 구 묘역 조그만 봉분 앞의 영정사진도 빗방울을 머금었다. 공식 행사가 진행되는 국립5·18민주묘지로 가던 길에 들른 사람도 있고, 공식 행사에는 불참하고 이곳으로 온 유족이나 관계자도 많았다. 이번 갈등의 시작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노래 부르면 아들 생각이 나니께. 부르면서 ‘엄마는 잘 살고 있다’ 하는 거지. 그런 노래를 못 부르게 하는데, 쓰겄어?”
공식 행사 시작 30분 전인 오전 9시 30분. 고(故) 김남석(당시 20세) 씨의 어머니 전광옥(81) 씨는 ‘5·18 희생자유족회’ 어머니들과 행사장에 나와 ‘민주의 문’에 모였다. 100여 명이 모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10여 차례 부른 뒤에야 자리로 돌아갔다. 전씨는 “이젠 눈물도 말라버렸다”고 말했지만 눈에는 눈물이 찰랑였다.
“만약 그놈이 살아 있으면 올해 쉰이겠네. 얼굴도 잘생기고 공부도 잘했던 우리 아들이 지금까지 살았으면, 난 얼마나 편히 살았을 것이여. 시신도 못 찾다가 암매장된 걸 2002년에야 DNA 검사하고 찾았어. 얼마 전 천안함 사건으로 엄마들이 아들 시신도 못 찾고 우는데, 내 가슴이 다 찢어지더랑께.”
15년째 현장을 찾는다는 한 시민은 “5년 전만 해도 여기 올라오는 길에 새까맣게 시민단체,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 학생들이 있었는데 오늘은 한산하다”고 말했다. 그는 “궂은 날씨 때문일 수도 있지만 확실히 5·18의 직접적인 피해자, 가족이 아닌 이상 5·18을 기억 못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당시 시아버지를 잃은 유족회 조미나(42) 씨도 “서서히 추모 분위기가 식어가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이제는 한을 풀고 5·18도 축제로 즐기라고 하대요. 하지만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족이 해체되고, 2세들은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취직도 어려워요. 그 상처가 아직도 남아 우리 아들 세대로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이미 원한은 우리 뼛속 깊이 새겨져 있고, 아직 화해를 못했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요.”
광주를 떠날 때까지 비는 그치지 않았다.
1 전 광주일보 건물에서 바라본 광주 금남로 거리. 30년 전 시민군과 계엄군이 대치했던 장소다. 2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은 추모객들. 3 전 전남도청에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됐다. 4 당시 모습을 재현한 퍼포먼스. 5 금남로 한복판에서 5·18 전야제가 성대히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