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이루지 못한 월드시리즈 우승의 꿈을 위해 선택한 팀. 그는 핀스트라이프 유니폼과 함께 야구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 자칫하면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적지 않은 나이. 시범경기를 통해 또 다른 영광 재현의 가능성을 확인시켰고, 그토록 원하던 꿈을 위한 도전을 시작했다.
뉴욕 양키스맨으로 거듭난 ‘코리안 특급’ 박찬호(37)가 월드시리즈 우승이란 비원을 향해 스타트를 끊었다. 4월 5일(한국 시간)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2010년 메이저리그 개막전에 등판, 아쉽게 패전의 멍에를 썼지만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최고명문팀인 양키스의 일원으로서 대망의 2010년 새 시즌을 맞았다. 한국인 첫 메이저리거는 이제 한국인 최초로 양키스의 유니폼을 입었다. 그는 메이저리그 사상 서부의 최고명문 LA 다저스와 미국을 상징하는 동부의 뉴욕 양키스에서 활동한 몇 안 되는 선수로 기록됐다.
장밋빛 희망을 품게 한 시범경기
박찬호는 올 시즌 시범경기를 통해 불펜의 핵으로 활약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구단에 심어줬다. 시범경기 성적은 6경기 무실점, 방어율 제로. 총 7이닝을 던져 4안타만 허용했다. 무엇보다 4사구가 단 1개도 없었고, 삼진은 8개나 잡았다. 비록 6회 이후에 등판, 상대팀 주전들이 아닌 백업이나 25인 로스터에 빠지는 교체선수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지만 최고구속 150km에 육박하는 빠른 볼과 다양한 변화구 그리고 칼날 제구력은 그가 지난해에 이어 올 시즌에도 불펜 투수로 맹활약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박찬호는 4월 5일 보스턴 펜웨이파크에서 열린 라이벌 레드삭스와의 개막전에 출전하는 영광을 안았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7대 5로 앞선 7회 말 마운드에 올랐지만 더스틴 페드로이아에게 동점 홈런을 허용한 뒤 2사 2루에서 강판됐고, 후속 투수가 남아 있던 주자의 득점을 허용해 패전의 아픔까지 안았다. 두 번째 등판은 첫 패배의 아픔을 씻어내고도 남았다. 8일 보스턴전에 두 번째 등판, 1대 1로 맞선 7회부터 3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은 박찬호는 연장 10회 타선의 도움을 받아 승리 투수가 되는 기쁨을 누렸다. 시즌 초반 냉온탕을 오고간 기억은 한 시즌을 치르는 데 독보다는 약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박찬호를 영입할 때만 해도 양키스 조 지라디 감독을 비롯한 수뇌부는 그를 선발투수 조기 강판 때 등판하는 롱맨으로 기용할 생각이었다. 일단 개막전에서 등판 시점을 보면 박찬호의 임무는 지난해 필라델피아 시절과 큰 차이가 없다. 이기는 경기 7회에 투입될 가능성이 가장 높고 상황에 따라 8회 등판하거나 2이닝 정도를 소화하는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크다. 5선발에서 탈락한 조바 체임벌린과 우완 셋업맨 구실을 한다고 보면 된다. 그 밖에 지난해 안정적인 투구를 보였던 알프레도 아세베스, 서지오 미트레가 있고 좌완으로는 이번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중용됐던 분 로건이나 베테랑 다마소 마르테가 불펜 동료가 될 것이다.
양키스의 뒷문은 ‘철벽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가 지키고 있다. 박찬호가 롱맨이 아닌 8회 셋업맨으로 뛰게 되면 그는 다른 불펜 투수보다 승리 기회도 많이 갖게 될 것이다. 통산 120승을 거두고 있는 박찬호는 4승만 추가하면 일본인 노모 히데오가 보유한 아시아인 최다 승리(123승)를 넘어선다.
한때 10여 개 팀에서 러브콜을 받았던 박찬호가 2월 중순까지 소속팀을 결정하지 못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박찬호도 “지난해 12월부터 1월까지 한 달 동안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해 초조했다”고 밝혔다. 박찬호는 지난 시즌 종료 직후, 필라델피아의 재계약 오퍼를 받았다. 필라델피아는 지난해와 똑같은 조건에 ‘2년 계약’이라는 옵션을 내걸었지만, 더 좋은 조건을 바랐던 박찬호는 적잖이 실망했다. 강력한 불펜 투수를 잃은 필라델리아는 1차 협상이 결렬된 이후 275만 달러로 몸값을 올려 재계약을 시도하기도 했다.
롱맨 아니면 8회 셋업맨 보직 확정
한번 마음이 떠난 박찬호는 양키스와 레드삭스, 두 명문팀을 염두에 둔 채 윈터미팅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는 판단 착오였다. 본격적인 계약 시즌이 됐지만 연락이 없었고, 갑자기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그의 발목을 잡은 건 ‘선발을 원하는 거액의 불펜 투수’라는 사실. 그의 시장가치는 계속 떨어졌고, 2월 21일에는 결국 양키스와 시카고 컵스 두 구단의 오퍼만 남았다. 액수나 적극성에서 양키스보다 컵스가 앞섰지만 그는 이튿날 미련 없이 양키스 유니폼을 선택했다. 연봉 120만 달러에 ‘확정 불펜’이란 보직이었다.
과거 프리에이전트(FA)로 5년간 6500만 달러의 대형 계약에 성공했던 박찬호에겐 120만 달러는 헐값으로 보일 수 있는 금액. 더구나 필라델피아가 내건 조건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박찬호는 돈보다 ‘월드시리즈 우승 가능성’에 주목했다. 챔피언 반지를 끼고 싶은 강한 열망 때문이었다. 2008년 양키스는 14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라는 아픔을 맛봤다. 2009년 대대적인 전력보강으로 팀을 재건한 뒤 정규 시즌에서 103승을 기록했고, 월드시리즈에서도 필라델피아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상대팀이었던 박찬호가 미련 없이 양키스를 선택한 것은 이 때문이다.
양키스는 올해 스토브리그에서 돈을 쓰지 않았지만 여전히 30개 구단 중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수호신’ 리베라가 버티고 있는 마무리는 확고부동하다. 중견수 커티스 그랜더슨, 좌익수 랜디 윈 혹은 브렛 가드너, 지명 타자 닉 존슨을 제외하고 지난해 우승 멤버가 건재한 타선은 여전히 가공할 위력을 자랑한다. 알렉스 로드리게스, 마크 테세이라, 데릭 지터의 화력은 건재하다. 또 CC 사바시아, AJ 버넷, 앤디 페티트, 하비에르 바스케스로 이어지는 선발진은 안정감을 준다.
박찬호는 양키스맨이 된 후 국내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마지막 선수생활은 한국에서 하고 싶다는 뜻을 재차 강조했다. 지난해 그가 서울 성수동에 아파트를 구입한 것도 언젠가 한국에서 뛸 날을 위해서다. 박찬호는 유소년 야구 발전을 위해 기여할 뜻도 있다. 그가 가장 큰 애정을 갖고 있는 것도 ‘박찬호기 전국초등학교 야구대회’. 그는 현역 생활을 마감하면 국내 프로팀 감독보다는 유소년 야구팀을 맡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하기도 했다.
1973년생인 박찬호는 이제 마흔을 눈앞에 두고 있다. 조금씩 메이저리그 생활을 정리할 때가 가까워오고 있음을 그도 알고 있다. 그래서 올 시즌 그의 각오는 남다르다. 1994년 미국 진출 이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월드시리즈 우승 감격. 그 감흥에 목마른 박찬호에게 의미가 큰 2010년,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뉴욕 양키스맨으로 거듭난 ‘코리안 특급’ 박찬호(37)가 월드시리즈 우승이란 비원을 향해 스타트를 끊었다. 4월 5일(한국 시간)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2010년 메이저리그 개막전에 등판, 아쉽게 패전의 멍에를 썼지만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최고명문팀인 양키스의 일원으로서 대망의 2010년 새 시즌을 맞았다. 한국인 첫 메이저리거는 이제 한국인 최초로 양키스의 유니폼을 입었다. 그는 메이저리그 사상 서부의 최고명문 LA 다저스와 미국을 상징하는 동부의 뉴욕 양키스에서 활동한 몇 안 되는 선수로 기록됐다.
장밋빛 희망을 품게 한 시범경기
박찬호는 올 시즌 시범경기를 통해 불펜의 핵으로 활약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구단에 심어줬다. 시범경기 성적은 6경기 무실점, 방어율 제로. 총 7이닝을 던져 4안타만 허용했다. 무엇보다 4사구가 단 1개도 없었고, 삼진은 8개나 잡았다. 비록 6회 이후에 등판, 상대팀 주전들이 아닌 백업이나 25인 로스터에 빠지는 교체선수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지만 최고구속 150km에 육박하는 빠른 볼과 다양한 변화구 그리고 칼날 제구력은 그가 지난해에 이어 올 시즌에도 불펜 투수로 맹활약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박찬호는 4월 5일 보스턴 펜웨이파크에서 열린 라이벌 레드삭스와의 개막전에 출전하는 영광을 안았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7대 5로 앞선 7회 말 마운드에 올랐지만 더스틴 페드로이아에게 동점 홈런을 허용한 뒤 2사 2루에서 강판됐고, 후속 투수가 남아 있던 주자의 득점을 허용해 패전의 아픔까지 안았다. 두 번째 등판은 첫 패배의 아픔을 씻어내고도 남았다. 8일 보스턴전에 두 번째 등판, 1대 1로 맞선 7회부터 3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은 박찬호는 연장 10회 타선의 도움을 받아 승리 투수가 되는 기쁨을 누렸다. 시즌 초반 냉온탕을 오고간 기억은 한 시즌을 치르는 데 독보다는 약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박찬호를 영입할 때만 해도 양키스 조 지라디 감독을 비롯한 수뇌부는 그를 선발투수 조기 강판 때 등판하는 롱맨으로 기용할 생각이었다. 일단 개막전에서 등판 시점을 보면 박찬호의 임무는 지난해 필라델피아 시절과 큰 차이가 없다. 이기는 경기 7회에 투입될 가능성이 가장 높고 상황에 따라 8회 등판하거나 2이닝 정도를 소화하는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크다. 5선발에서 탈락한 조바 체임벌린과 우완 셋업맨 구실을 한다고 보면 된다. 그 밖에 지난해 안정적인 투구를 보였던 알프레도 아세베스, 서지오 미트레가 있고 좌완으로는 이번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중용됐던 분 로건이나 베테랑 다마소 마르테가 불펜 동료가 될 것이다.
양키스의 뒷문은 ‘철벽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가 지키고 있다. 박찬호가 롱맨이 아닌 8회 셋업맨으로 뛰게 되면 그는 다른 불펜 투수보다 승리 기회도 많이 갖게 될 것이다. 통산 120승을 거두고 있는 박찬호는 4승만 추가하면 일본인 노모 히데오가 보유한 아시아인 최다 승리(123승)를 넘어선다.
한때 10여 개 팀에서 러브콜을 받았던 박찬호가 2월 중순까지 소속팀을 결정하지 못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박찬호도 “지난해 12월부터 1월까지 한 달 동안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해 초조했다”고 밝혔다. 박찬호는 지난 시즌 종료 직후, 필라델피아의 재계약 오퍼를 받았다. 필라델피아는 지난해와 똑같은 조건에 ‘2년 계약’이라는 옵션을 내걸었지만, 더 좋은 조건을 바랐던 박찬호는 적잖이 실망했다. 강력한 불펜 투수를 잃은 필라델리아는 1차 협상이 결렬된 이후 275만 달러로 몸값을 올려 재계약을 시도하기도 했다.
롱맨 아니면 8회 셋업맨 보직 확정
한번 마음이 떠난 박찬호는 양키스와 레드삭스, 두 명문팀을 염두에 둔 채 윈터미팅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는 판단 착오였다. 본격적인 계약 시즌이 됐지만 연락이 없었고, 갑자기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그의 발목을 잡은 건 ‘선발을 원하는 거액의 불펜 투수’라는 사실. 그의 시장가치는 계속 떨어졌고, 2월 21일에는 결국 양키스와 시카고 컵스 두 구단의 오퍼만 남았다. 액수나 적극성에서 양키스보다 컵스가 앞섰지만 그는 이튿날 미련 없이 양키스 유니폼을 선택했다. 연봉 120만 달러에 ‘확정 불펜’이란 보직이었다.
과거 프리에이전트(FA)로 5년간 6500만 달러의 대형 계약에 성공했던 박찬호에겐 120만 달러는 헐값으로 보일 수 있는 금액. 더구나 필라델피아가 내건 조건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박찬호는 돈보다 ‘월드시리즈 우승 가능성’에 주목했다. 챔피언 반지를 끼고 싶은 강한 열망 때문이었다. 2008년 양키스는 14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라는 아픔을 맛봤다. 2009년 대대적인 전력보강으로 팀을 재건한 뒤 정규 시즌에서 103승을 기록했고, 월드시리즈에서도 필라델피아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상대팀이었던 박찬호가 미련 없이 양키스를 선택한 것은 이 때문이다.
양키스는 올해 스토브리그에서 돈을 쓰지 않았지만 여전히 30개 구단 중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수호신’ 리베라가 버티고 있는 마무리는 확고부동하다. 중견수 커티스 그랜더슨, 좌익수 랜디 윈 혹은 브렛 가드너, 지명 타자 닉 존슨을 제외하고 지난해 우승 멤버가 건재한 타선은 여전히 가공할 위력을 자랑한다. 알렉스 로드리게스, 마크 테세이라, 데릭 지터의 화력은 건재하다. 또 CC 사바시아, AJ 버넷, 앤디 페티트, 하비에르 바스케스로 이어지는 선발진은 안정감을 준다.
박찬호는 양키스맨이 된 후 국내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마지막 선수생활은 한국에서 하고 싶다는 뜻을 재차 강조했다. 지난해 그가 서울 성수동에 아파트를 구입한 것도 언젠가 한국에서 뛸 날을 위해서다. 박찬호는 유소년 야구 발전을 위해 기여할 뜻도 있다. 그가 가장 큰 애정을 갖고 있는 것도 ‘박찬호기 전국초등학교 야구대회’. 그는 현역 생활을 마감하면 국내 프로팀 감독보다는 유소년 야구팀을 맡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하기도 했다.
1973년생인 박찬호는 이제 마흔을 눈앞에 두고 있다. 조금씩 메이저리그 생활을 정리할 때가 가까워오고 있음을 그도 알고 있다. 그래서 올 시즌 그의 각오는 남다르다. 1994년 미국 진출 이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월드시리즈 우승 감격. 그 감흥에 목마른 박찬호에게 의미가 큰 2010년,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