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지근이 발달하면 속근이 약해진다. 반대로 속근이 발달하면 지근은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다. 그래서 육상에서는 속근과 지근이 골고루 발달해야 하는 중거리(800m, 1500m 등) 종목이 가장 어렵다. 빙상도 1000m, 1500m가 가장 어렵다.
산소섭취량 73.4ml, 셔틀런 159회도 최고
운동선수의 심장은 자동차 엔진 같다. 엔진이 약하면 빨리 달릴 수 없고, 오래갈 수도 없다. 배기량이 커야 언덕이나 험한 길도 힘차게 달린다. 미국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은 세계 최고 스포츠 심장 보유자다. 그 심장으로 투르 드 프랑스에서 7번 연속으로 우승했다. 평탄한 길에서는 티코나 벤츠나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강원도 한계령에 오를 땐 그 차이가 확연하다. 마찬가지로 암스트롱이나 다른 선수들이나 평지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다. 10초 이내에 20~30명이 무더기로 들어온다. 알프스에 오를 땐 암스트롱 뒤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거의 1개 구간에서 몇 분씩 차이가 난다.
암스트롱은 산소섭취량이 1분에 kg당 81ml다. 황영조가 80ml, 이봉주가 78.5ml다. 보통 20대 남성이 40ml 정도인 것과 비교해보면 엄청나다. 이승훈은 73.4ml로 황영조 이봉주엔 못 미친다. 다른 장거리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의 평균 수치 65ml보다는 높다. 지난해 9월 체육과학연구소는 한국체육대학 선수들을 대상으로 심폐지구력 테스트를 했다. 이승훈은 셔틀런(20m 왕복달리기) 결과 159회로 단연 으뜸이었다. 다른 빙상선수들은 평균 140회, 육상 장거리선수들은 141.65회로 이에 미치지 못했다.
지금까지 빙상 1만m는 유럽 선수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1924년 프랑스 샤모니 대회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래 2006년까지 19번의 대회(1928년 생모리츠 대회에서는 빙질이 나빠 취소)에서 유럽 선수가 17차례나 금메달을 가져갔다. 유럽은 또 다른 장거리 경기인 5000m에서도 17차례나 금메달을 따냈다. 아시아 선수에게는 금단의 땅이었다.
이승훈은 쇼트트랙에서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한 지 7개월밖에 안 된 풋내기다. 1만m를 이번까지 딱 3번밖에 뛰지 않았다. 그런데도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1960년 로마올림픽 마라톤에서 에티오피아 아베베 비킬라(1932~1973)가 풀코스 세 번째 도전에서 최고 기록으로 월계관을 쓴 것과 같다. 황영조도 네 번째 풀코스 도전 만에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우사인 볼트(24·자메이카)는 100m 5번 출전 만에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볼트의 주종목은 200m. 이승훈이 쇼트트랙에서 스피드스케이팅으로 바꾼 것과 닮은꼴이다.
이승훈은 체구가 작다(177cm, 70kg). 세계 최고 네덜란드 크라머(185cm, 80kg)와 비교해보면 고등학생과 대학생만큼 차이 난다. 유럽 선수들은 한 번 얼음을 지칠 때 롱다리로 쭉쭉 뻗는다. 거기에다 속도가 붙으면 더욱 빨리 뻗어간다. 다리가 짧은 아시아 선수로서는 불가항력일 수밖에 없다. 한 번 지칠 때 1cm만 차이가 나도 결승선에 들어올 땐 엄청난 간격이 생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약점은 있다. 체격이 크면 공기저항이 커 체력소모가 많다. 이승훈은 숏다리의 한계를 스피드로 메웠다.
쇼트트랙에서 익힌 코너링 기술도 한몫했다. 체격이 큰 선수는 직선주로에서 곡선주로에 접어들면 원심력이 그만큼 커져 스피드가 줄어든다. 반면 이승훈은 안쪽으로 바짝 붙어서 타면서도 스피드가 그대로 유지된다. 가속도가 붙은 스피드를 싣고 그대로 코너를 돈다.
빙판 강호에 절세무공 고수 출현
육상에선 단거리에서 장거리로 갈수록 선수들 키가 작아진다. 역대 올림픽 단거리 육상 남자선수의 평균 신체 크기는 183cm에 68kg이다. 마라톤 남자선수는 169cm에 56kg(이봉주 168cm, 55kg) 정도. 빙상 단거리는 육상과 비슷하다. 키가 크고 체격이 우람하다. 하지만 장거리는 여태까지 육상과 달랐다. 하나같이 체구는 날씬하지만 키가 크고 다리가 길었다. 크라머(185cm, 80kg)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적어도 장거리 분야에선 땅과 얼음의 우승 논리가 달랐다. 이런 면에서 이승훈의 우승은 빙상 장거리에서도 육상 장거리 논리가 적용되는 첫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
단거리선수와 장거리선수는 근육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단거리선수는 근육이 울퉁불퉁하고 우람한 반면, 마라톤 선수는 뼈에 가죽만 씌워놓은 것 같다. 보통 사람의 근육은 속근(速筋)과 지근(遲筋)으로 나뉜다. 속근은 순간적인 힘을 발휘하는 데 적합하고, 지근은 지구력을 발휘할 때 좋다. 속근은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면 발달한다. 역도선수나 단거리선수의 근육이 울퉁불퉁한 것도 다 이 때문이다. 보기와는 달리 역도 선수의 순발력이 태릉선수촌에서 1, 2위를 다투는 것도 바로 속근 덕분이다.
지근은 작고 섬세한 근육으로 이뤄진다. 지근은 조깅 등 유산소운동을 해야 발달한다. 짐승 중에서도 사자, 호랑이 등 육식동물은 속근이 발달해 덩치가 우람하지만, 사슴이나 얼룩말 등 초식동물은 지근이 발달해 날씬하다. 사슴은 사자에게 쫓길 때 500m 정도만 도망가는 데 성공하면 살 수 있다. 지근이 발달하지 못한 사자는 먼 거리까지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뒤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 마라톤 감독들은 선수를 데려올 때 ‘사슴 같은 발목’ ‘통자형의 두툼한 가슴’ ‘작은 머리’를 가진 선수를 최고로 친다. 이런 선수들이 지근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작은 머리는 달릴 때 그만큼 부담이 덜 간다.
이승훈은 참나무근육이다. 속이 단단하고 꽉 찼다. 근육의 지구력이 강해서 끝까지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힘이 떨어지면 몸의 중심이 높아지고 그만큼 스피드가 떨어진다. 이승훈은 스피드를 몸에 싣고 가는 기술이 탁월하다. 마지막 25바퀴에서도 무릎을 깊게 굽히며 스피드를 붙여 돌진했다.
이승훈은 낮은 자세로 코너를 미끄러지듯 잘근잘근 썰며 돈다. 장거리선수는 보통 직선주로에서 뒷짐을 지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곡선주로에선 왼손은 가만히 있고 오른손만 흔들며 속도를 조절한다. 곡선주로에서 팔은 날개와 같다. 몸의 균형을 잡아주고 속도를 유지한다. 팔은 빨리 흔들수록 스피드가 빨라진다. 마라톤이나 빙상선수는 팔 운동도 발 못지않게 하는 이유다. 이승훈은 마지막 바퀴에서 두 팔을 혼신의 힘으로 흔들며 들어왔다. 마지막 400m 랩타임이 이날 25바퀴 중 가장 빠른 30초29였다. 맨 첫 바퀴 33초89보다 무려 2초60이나 빨랐다.
이승훈은 아직 젊다. 그가 경험만 더 쌓는다면 천하무적이 될 것이다. 강호에 홀연히 절세무공의 고수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