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식 시계의 부품들이 은하 먼지처럼 흩어져 ‘작은 우주’를 이루고 있다. 시간당 36만 번의 진동수를 자랑하는 태그호이어 ‘칼리버 360 크로노그래프’의 부품들.
직원들이 갑자기 시계 공부 삼매경에 빠진 까닭은 명품시계가 이 백화점이 주력하는 상품군 중 하나로 자리잡았기 때문. 2009년 현대백화점 상품군별 매출 신장률을 보면 ‘바쉐론 콘스탄틴’ ‘브레게’ ‘반클리프 아펠’ ‘오메가’ ‘롤렉스’ 등 명품시계군이 전체 상품군 중 1위를 차지했다. 2009년 1~10월 누계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48% 증가했다. 이 백화점은 2007년 압구정 본점, 2008년 무역센터점에 이어 올 11월 초 목동점에도 ‘까르띠에’ ‘JLC’ ‘IWC’ ‘크로노스위스’ ‘보메 메르시에’ 등을 판매하는 명품시계 편집매장을 오픈했다.
백화점 매출 증가 1등공신
롯데백화점도 2008년 기준, 명품시계의 매출 신장률이 전년 대비 48%에 이른다. 일반 잡화의 신장률 16.7%와 크게 비교되는 수치. 올 들어서도 상승세를 유지해 11월 현재, 지난해 동기 대비 36.3%의 신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2007년 7월 스위스 시계그룹 ‘스와치’의 고급 브랜드들로 구성된 멀티숍 ‘이퀘이션 두 땅’을 열고, ‘브레게’ ‘블랑팡’ ‘자케드로’ 같은 최고급 브랜드를 선보인 바 있다. 현재 이 멀티숍의 매출 규모는 전년 대비 2배에 달한다. 롯데백화점 측은 이 같은 성장세에 힘입어 에비뉴엘, 부산 본점에 이어 2008년 2월과 3월 각각 강남점과 분당점에 명품시계 멀티숍을 오픈했다.
신세계백화점도 비슷한 상황이다. 올 하반기(7~11월) 명품시계의 매출은 지난해 동기 대비 59.6% 증가했다. 같은 기간 명품의류의 매출 신장률 43.9%보다 높은 수치다. 신세계백화점 잡화·시계 담당 민병도 바이어는 “롤렉스나 까르띠에처럼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들은 물론, 위블로 등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브랜드들까지 고루 인기를 얻는 것이 특징”이라면서 “명품시계 시장의 확대 추이를 지켜본 뒤 조만간 기존에 소개되지 않은, 희소성 있는 브랜드들도 추가로 도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태그호이어가 자동차의 엔진 구조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혁신적 모델 ‘모나코 V4’는 2010년, 전 세계에서 150점만 한정 판매될 예정이다.
각 시계 브랜드들 역시 글로벌 경제위기에도 두 자릿수의 매출 신장률을 보이는 한국 시장에 큰 관심을 쏟고 있다. 최고경영자들이 줄지어 한국을 찾고,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신규 브랜드들도 속속 한국 상륙을 선언하고 있는 것.
스와치코리아는 독일 브랜드 ‘글라슈테 오리지널’을 올 연말까지 국내에 들여올 예정이다. 또 11월1일 ‘피아제코리아’로 직진출한 ‘피아제’는 최근 현대백화점 코엑스점에 새로 매장을 열었다. 한편 지난 9월 전 세계 88개 매장 중 최대 규모의 단독 매장(플래그십 스토어)을 서울에 연 LVMH 그룹 소속 브랜드 ‘태그호이어’의 올 상반기 매출을 집계한 결과, 한국 시장은 이 브랜드가 진출한 전 세계 시장 중 최고의 매출 신장률인 47%를 기록했다. 2위 호주(23%)의 2배에 달하는 성적. 또 한국 소비자 사이에서 인지도가 높은 ‘오메가’는 올해 2008년 대비 40%의 매출 신장률을 달성했다.
‘월스트리트저널’ 등 외신에 따르면 ‘까르띠에’ ‘IWC’ ‘바쉐론 콘스탄틴’ 등이 속한 럭셔리 기업 리슈몽의 전 세계 매출은 미국과 일본 시장이 좀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서 올 상반기 15%까지 감소했다. 최근 6개월간의 영업이익률 감소율은 39%에 이른다. 그러나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시장이 11%가량 성장하면서 예상보다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는 분석. 스와치그룹, LVMH 등 다른 대형 경쟁업체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관측이다.
이처럼 아시아 시장의 성장 배경에는 한국과 중국에서의 매출 증가가 기여한 부분이 크다. 그러나 신흥 시장에다 어마어마한 인구, 특히 ‘슈퍼리치’가 많다는 점 등 중국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한국에서 이런 성장세를 유지한 것이 더 ‘기적적’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내수, 면세 시장의 고른 성장
1 오메가의 베스트셀러 ‘컨스텔레이션’라인의 2009년형 기계식 시계들에는 모두 ‘코액시얼(Co-Axial)’ 탈진기가 탑재됐다. 시계 내부의 부품 간 마찰을 줄여줘 시간의 정확도를 높인다는 설명이다. 2 오메가는 11월 말 세계 최초로 세라믹과 리퀴드메탈 소재를 결합한 ‘시마스터 플래닛 오션 리퀴드메탈’을 출시한다. 1948점 제작돼 국내에는 약 20점 수입되며, 가격은 600만원대.
오메가의 손수정 과장은 “엔고(高) 때문에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쇼핑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었다”면서 “일본 내수시장 침체의 원인이 일본인 소비자들이 한국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각 브랜드 일본 지사들이 한국 내에서의 판매가격을 더 올려야 하는 게 아니냐고 볼멘 목소리를 냈을 정도”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일본인 못지않게 중국인 소비자도 크게 늘었다. 태그호이어의 송지은 대리는 “국내에 명품 브랜드가 많지 않던 시절에 한국인들이 해외로 쇼핑을 나갔던 것처럼, 중국인들 역시 패션이 발달해 선진 트렌드를 접할 수 있는 데다 위치와 가격 면에서도 장점이 많은 한국에서의 쇼핑을 선호한다”고 전했다.
반대로 유로화, 엔화의 강세로 해외 쇼핑을 포기하고 국내로 돌아선 한국 소비자가 늘어난 점은 내수시장 활성화의 한 요인으로 꼽힌다. 까르띠에의 김은수 홍보이사는 “VIP층에서도 경제위기 때문에 남의 이목을 의식해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됐고, 신종플루 같은 돌발변수까지 생겨 국내에서의 쇼핑을 선호하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국내에서 수천만원대 이상의 초고가 시계를 구입하는 고객은 어차피 한정돼 있다. 따라서 이 가운데 해외에서 활동하던 ‘재벌 2, 3세’ 또는 금융업 관련 고소득 전문직 남성들이 글로벌 경제위기 여파로 한국으로 대거 ‘컴백’한 점도 초고가 시계의 매출 증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 명품 브랜드의 관계자는 “대규모 감원으로 해고됐거나, 해외에서 사업 또는 취업 기회를 노리던 이들이 대거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이들의 소비력이 흡수된 점도 내수시장 활성화의 요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수시장이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으로 백화점과 브랜드들이 입을 모아 꼽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한국 남성 소비자들의 진화’.
롯데백화점 명품MD팀 여대경 MD는 “최근 몇 년 새 남성 고객들의 패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로 고급 시계를 선택하고 있다”고 전했다. 자신의 외모나 패션 아이템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이들 남성을 우리 사회는 ‘초식남’ ‘미스터 골드’로 명명해왔다.
결혼 적령기가 늦어져 ‘싱글족’이 많아지고, 대부분 부모와 함께 살기 때문에 주거비 부담이 적어 ‘가처분소득’이 많다는 점이 젊은 남성들이 명품시계에 ‘투자’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꼽힌다. 반면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남성 명품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부모에게서 독립한 젊은 남성들이 경제위기로 실직 또는 감봉을 당하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 집중하느라 소비성 지출을 크게 줄였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여성 위주의 국내 명품시장이 성비(性比) 균형을 찾기 시작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이상정 차장은 “고급 시계의 경우, 남성 소비자가 90% 이상을 차지하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우리나라는 이 비율이 70%에 불과한 기현상이 이어져왔다”면서 “그러나 최근 남성 소비자들의 비중이 크게 늘어나 브랜드마다 이러한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코네쉐르들 지출 아닌 ‘투자’로 생각
이들 소비자의 특징은 특정 브랜드의 이름만 믿고 덥석 고가 시계를 사들이는 ‘자기과시형’에서 벗어나 브랜드의 역사, 디자인, 소재 등을 따져보고 구입하는 ‘자기만족형’ 소비 성향을 보인다는 점. 이기호 편집장은 “시계를 ‘제2의 나’로 여기면서 자신의 ‘아이덴티티’와 일치된 제품을 구입하기 위해 전문적인 정보를 수집하는 남성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결혼할 때 구입한 클래식한 예물시계로 평생을 버티던 남성들이 주말 또는 활동적인 일을 할 때 찰 수 있는 ‘세컨드 워치’를 찾기 시작한 것 역시 달라진 트렌드다. 샤넬코리아 관계자는 “한국 남성들의 1인당 평균 보유 시계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고급 시계의 ‘경제적 가치’ 때문에 불황 속에서도 매출이 줄지 않는다는 분석도 나왔다. 스위스 은행 ‘사라신’ 리포트에 따르면, 2001년 9·11테러로 미국 내 소비심리가 극도로 위축됐을 때도 최고급 시계 또는 보석류의 매출은 패션, 잡화 등 다른 명품군에 비해 감소폭이 훨씬 적었다. 이는 환금성이 좋고 소장가치도 있는 고급 시계 또는 보석류의 구입을 소비자들이 ‘지출’이 아닌 ‘투자’로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
최근의 글로벌 경제위기가 심리적 요인에 영향을 미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질적 소득감소로 이어지면서 미국 내 명품 비즈니스가 전체적으로 곤두박질친 것과 달리, 다른 나라들보다 상대적으로 빠른 경기 회복세를 보이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고급 시계 구입을 투자로 여기는 소비자들이 많다는 점도 한 요인으로 꼽힌다는 뜻도 된다.
한편 화장품, 가방, 구두, 의류에서 보석과 시계로 이어지는 명품 소비의 확대 패턴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 명품시장의 성숙도가 이제 고급 시계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글라슈테 오리지널의 정승아 씨는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마니아 브랜드들과 제품 사양까지 줄줄이 꿰고, 본사에서 ‘리미티드 에디션(한정 판매품)’이 나오자마자 ‘스페셜 오더’를 요청하는 등 브랜드보다 한 발 앞서 움직이는 ‘엘리트 고객’이 많아진 것이 국내 명품시장의 큰 트렌드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브랜드들을 훤히 꿰뚫고 경제 능력까지 갖춘 ‘엘리트 고객’을 럭셔리 브랜드들은 프랑스어로 ‘전문가’를 뜻하는 ‘코네쉐르(Connaisseur)’라고 부른다. 그리고 ‘코네쉐르’가 많을수록 소비자와 시장의 성숙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한다.
김은수 이사는 “명품시장의 최고 성숙단계는 제품(product)이 아니라 음식, 여행 등을 통한 경험(experience)”이라면서 “코네쉐르들이 좋아하는 기계식 시계들은 태엽을 주기적으로 감을 때마다 톱니바퀴의 움직임이 이루는 ‘작은 우주’를 들여다보는 ‘경험’을 선사하는 ‘성숙한 럭셔리’”라고 설명했다.
3 최고급 시계 브랜드 ‘오드마피게’와 공동개발한 샤넬의 ‘J12 칼리브레 3125’. 블랙세라믹, 옐로 골드 등이 미학적으로 접목됐다. 4 롯데백화점 명품관 에비뉴엘의 고급시계 멀티숍 ‘크로노다임’. 5 올 연말 국내에 상륙하는 독일의 대표적 명품시계 브랜드 ‘글라슈테 오리지널’. 6 까르띠에의 ‘산토스 100 스켈레턴 워치’ 9611 MC 칼리브레 모델. 7 11월1일 국내에 직진출한 피아제의 ‘매직 아워’ 모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