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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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엔 냉정한 승부사 화폭엔 열정의 터치

그림 그리는 소방관 최용석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9-07-20 19: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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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마엔 냉정한 승부사 화폭엔 열정의 터치

    자신이 그린 대구중부소방서 벽화 앞에서 포즈를 취한 최용석 소방장.

    2010년 대구에서 제11회 세계소방관경기대회가 개최된다. 2년마다 열리는 이 대회는 세계 각지의 전·현직 소방관과 그 가족들이 참여해 우정을 나누고, 개최국의 문화와 전통을 체험하는 자리다.

    그런데 이 대회 로고를 우리나라의 현직 소방관이 디자인해 화제다. 대구중부소방서의 최용석(42) 소방장이 그 주인공. 그는 이 로고를 대회 본부가 있는 호주에서 저작권 등록까지 마쳤다.

    최 소방장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며 사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그가 학교에 간 사이, 아버지가 물감과 붓을 전부 내다버린 일도 있었다. 그러나 동생의 재능을 알아본 셋째 누나의 지원 덕분에 그는 대구대 서양화과에 진학, 대학 동기들과 함께 “라면을 끓여먹을지언정 예술의 끈을 놓지 않겠다”며 열정을 불태웠다.

    하지만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 탓에 결국 중퇴했고, 소방관이 됐다. “공무원이 되지 않으면 딸을 줄 수 없다”는 장인어른 때문이었다.

    그리고 2000년, 그는 우연한 기회에 다시 붓을 잡게 됐다.



    “화가의 길을 포기했다는 자괴감으로 그림을 멀리하며 지냈어요. 그런데 소방관서 환경심사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청사에 벽화를 그리게 됐죠.”

    오래 묵혀두었지만, 최 소방장의 재능은 결코 녹슬지 않았다. 벽화 덕분에 그가 근무하던 소방관서는 우수 관서로 선정됐고, 그때부터 그는 소방관 사이에서 인기 화가로 통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는 6개 소방관서에 17개의 벽화를 그렸다. 주로 자연 풍경이나 동료들의 화재 진압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동료 소방관들은 그를 “제복공무원이 근무하는 삭막한 관공서에 한층 친근한 이미지를 불어넣은 일등공신”이라고 치켜세운다.

    “벽화를 그리면서 이젠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그림에 대한 감(感)이 되살아나는 걸 느꼈어요. 화가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림을 그릴 겁니다.”

    2010년 소방관 대회 로고 제작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태극 문양과 소방관의 모습을 동시에 형상화한 이번 세계소방관경기대회 로고는 동료들의 권유로 디자인하게 됐다. 그는 “소방관들을 위한 행사 로고를 현직 소방관이 직접 디자인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예산을 절약하는 측면에서도 좋은 일이고, 개인적으로도 자부심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혔다.

    화마엔 냉정한 승부사 화폭엔 열정의 터치

    최용석 소방장이 디자인한 2010 세계소방관경기대회 공식 로고.

    직접 디자인한 로고가 정식 확정된 후 그는 2008년 제10회 세계소방관경기대회에 초청받아 영국 리버풀에 다녀왔다.

    리버풀은 어린 시절 그의 꿈을 지지해준 셋째 누나가 결혼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기에 그의 감회는 더욱 깊었다. 오랜만에 만난 누나는 그의 ‘작은 성공’을 누구보다 기뻐하면서 주변 영국인들에게 그를 자랑스레 소개했다고 한다.

    최 소방장은 “지금 내 그림을 가장 좋아하는 팬은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이라며 웃었다. 그는 소방관 생활을 하면서도 그림에 대한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쉬는 날마다 틈틈이 전시회장에 찾아가 작품들을 감상하고, 대학 선배의 작업실에서 그림도 그린다. 자기 같은 사람이 ‘소방관은 문화예술에 문외한’이라는 선입견을 깨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퇴직한 후엔 만학도가 돼 못다 한 서양화 공부를 다시 할 계획입니다. 14년간 화재 현장을 쫓아다니며 온갖 불을 꺼왔지만, 그림을 향한 제 열정의 불꽃만은 도저히 끄질 못하겠네요.”

    ※이 기사의 취재에는 동아일보 대학생 인턴기자 배기환(서울대 영어영문학과·3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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