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일 강석우 장동건 정우성 이병헌 송승헌 그리고 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주인공 F4(맨 오른쪽부터). 한국의 꽃미남들은 역대로 ‘아도니스상’처럼 조각 같은 외모를 자랑해왔다.
21세기 최고의 꽃미남으로 대접받던 강동원 조인성도 이젠 꽃미남 월계관을 후배에게 넘겨줘야 하나보다. 새해 벽두부터 방영한 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이하 ‘꽃남’) 남자주인공 F4의 인기가 예사롭지 않다. 어린 소녀들과 젊은 누나들은 물론이요, 40대 아주머니가 중학생 아들과 나란히 TV 앞에 앉아 ‘꽃남’에 몰입하는 요즘이다.
‘꽃남’의 인기는 남자주인공 구준표(이민호)를 비롯한 윤지후(김현중), 소이정(김범), 송우빈(김준)의 외모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방송 칼럼니스트 정석희 씨는 “드라마 시청률 30% 돌파는 탄탄한 조연들이 있어야 가능한 수치”라며 조연이 거의 없는 ‘꽃남’이 30%대 시청률을 올리는 비결을 상큼한 미소년들에게서 찾았다. 이 드라마의 제작자 송병준 에이트픽처스 대표도 “드라마 제작에서 가장 주안점을 둔 포인트는 F4 캐스팅”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F4 소년들은 ‘선배’ 꽃미남들과는 좀 다른 부류다. (특히 구준표는) 싸가지가 없고 건방지고 반항적이면서도 귀여운 구석이 있는 ‘스포일드 보이’(spoiled boy·못된 소년) 혹은 ‘츤데레’(シソデレ·최근 일본 만화의 한 전형으로 퉁명스럽지만 알고보면 부끄럼 타는 캐릭터)이다. 이 소년들은 강동원 조인성이 발산하는 부드러움이 없는 대신 재력이 차고 넘친다. 강동원 조인성이 고이 아껴줘야 할 남자라면 꽃남 소년들은 길들여야 할 것 같다고, ‘누나’들은 생각한다.
역대 꽃미남들은 그리스 조각상 스타일
한국의 꽃미남 계보는 1960, 70년대를 풍미한 영화배우 신성일에게서 시작한다. 국회의원 홍정욱의 아버지 남궁원, 신성일이 감독을 맡은 영화 ‘연애시대’로 데뷔한 신영일이 원조(元祖)의 동료들이라면 70, 80년대에는 안성기 강석우 이영하 김주승 등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90년대 들어 장동건 정우성 이병헌 송승헌 등이 등장했고 2000년 이후는 소지섭 권상우 강동원 조인성 등의 시대였다. ‘궁’의 주지훈, ‘거침없이 하이킥’의 정일우 그리고 ‘꽃남’의 F4가 가장 최근 꽃미남 계보에 이름을 올렸다.
한남대 조용진 객원교수(조용진 얼굴연구소)는 “한국인은 대체로 눈이 작고 얼굴이 넓적한 북방계인데, 역대 꽃미남들은 모두 남방계”라고 지적했다. 즉 이목구비가 크고 얼굴의 오목함과 볼록함이 뚜렷한 그리스 조각상 같은 얼굴을 한국인들이 선호한다는 것(그러고 보니 구준표 역의 이민호는 큰 눈과 오뚝한 코, ‘라면 머리’까지 아도니스 조각상과 닮았다). 조 교수는 “북방계 대표 미남은 노주현”이라며 “그러나 미적 기준이 서구화한 탓에 대중이 남방계 미남들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영화 ‘편지’의 박신양, ‘엽기적인 그녀’ 차태현, 드라마 ‘궁’의 주지훈, ‘커피프린스 1호점’의 공유.
이런 복합적 이미지의 F4는 ‘순정만화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비현실적 외모’란 수식어로 설명되는데, 이는 오히려 ‘꽃남’ 소년들이 진정한 꽃미남에 가깝다는 것을 방증한다. 꽃미남이 원래 만화에서 생겨난 말이기 때문이다. ‘들장미 소녀 캔디’의 테리우스처럼 잘생긴 남자 만화주인공이 지면 가득하게 클로즈업될 때 갖가지 꽃이 남자주인공 주변에 피어나며 그의 미모를 한껏 고조시킨 데 꽃미남의 어원이 있다.
구준표는 못됐다. 수줍게 손수 만든 케이크를 내미는 소녀의 얼굴에 케이크를 짓뭉갤 정도로 안하무인이다. 싸가지 없는 남자 캐릭터를 선보인 ‘궁’의 주지훈, ‘커피프린스 1호점’의 공유보다 몇 차원 더 못됐다. 그래도 누나들은 구준표에게 열광한다. 1000만원짜리 수경(水鏡)을 떡하니 선물할 정도의 재력에다 갖가지 전구로 놀이터를 샹젤리제로 꾸미고, 여자친구에게 키스할 만큼 달콤한 구석도 갖췄기 때문이다.
‘구준표 신드롬’, 자상함보다 능력 우선 현실 반영
이런 현상은 터프 꽃미남(신성일 최민수)에서 달콤한 꽃미남(강동원 조인성)으로 취향이 바뀐 여성 소비자들이, 또 한 번 취향을 업그레이드해 이 둘을 모두 갖춘 남성상을 선호하는 것으로 읽힌다. 남성패션지 ‘루엘’의 김영진 기자는 “여성들이 ‘터프 달콤한’ 남자를 원하는 것은 남성들이 송혜교 같은 ‘청순 글래머’를 이상형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의 판타지”라고 평했다.
여자들은 외모, 학벌, 재력 등 모든 것을 갖춘 완벽남을 꿈꾼다.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켜주고, 소비만능시대의 승자로 이끌 완벽남이 아니라면 결혼 대신 화려한 골드미스로 남는 게 낫다. 완벽남은 못된 성격이어도 괜찮다. 딱부러지는 성격의 캔디 혹은 금잔디가 얼마든지 보완해줄 수 있으니까. 자상한 ‘찌질남’과 함께하는 것보다, 좀 싸가지 없어도 돈 있는 남자가 낫다. 영화평론가 심영섭 씨는 “빈부격차가 심해질수록 이러한 여성들의 판타지와 욕구는 확대되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래서 ‘엄친아 꽃미남’이라 할 F4가 신드롬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 여성들이 언제나 꽃미남을 추구한 것은 아니다. 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평생 순애보를 간직하며 한 여자의 곁을 지켜줄 것만 같은 남자들이 인기를 얻었다. ‘편지’의 박신양, ‘색즉시공’의 임창정, ‘엽기적인 그녀’의 차태현 등이 그랬다. 연예인 중에서도 잘생긴 남자가 좀처럼 드물었던 70, 80년대에는 이수만 김세환 같은 통기타 가수들이 인기였다.
시간은 흘렀고 시대는 변했다. 여자들은 늘씬한 키에 고운 얼굴, 게다가 돈까지 많은 꽃미남을 원한다. 그러나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이다. F4에 푹 빠진 나머지 판타지와 현실이 분간되지 않을 때는 만화 원작이 대세인 요즘에 걸맞게 만화 대사를 외쳐보자.
‘깨몽!’(1980년대 ‘보물섬’에 연재된 만화 ‘내 짝꿍 깨몽’에 자주 나온 대사. ‘꿈 깨!’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