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Doig, ‘Pine House’ (1994), oil on canvas, 180x230.5cm
“정말 근사하게 내리고 있으니까, 얼른 창밖을 봐!”
그렇게 하염없이 눈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모습을 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꼼짝하기 싫어하는 몸을 타일러 ‘추리닝’ 바람으로 옥상으로 향했지요. 사실 1분도 안 걸리는 거리지만 옥상에 올라온 지 거의 한 달이 넘었거든요. 졸업 후 “나는 나에게 쉴 권리를 주겠어!”라며 제법 다부지게 결심한 저는, 쉴 권리와 게을러질 권리 사이에서 무게중심이 점점 뒤로 가는 것을 모르는 척 내버려두었답니다.
그러다 보니 며칠째 집 밖을 나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자연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눈’ 내리는 풍경은 고함 한번 치지 않고 저를 사뿐히 옥상으로 끌어올렸으니까요. 뉴욕의 고층 건물들을 높은 데서 여유 있게 바라보노라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까 싶어집니다. 게다가 눈까지 내려주니 뉴욕의 겨울 풍경을 사진에 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어린 시절 집 앞 풍경이 눈앞에 어른거리더군요. 참 이상하죠? 뉴욕에서 30년 전 집 앞에서 썰매를 타던 생각이 나다니…. 문득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출신의 작가 피터 도이그(Peter Doig, 1959~ )가 생각났습니다.
그의 작품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제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작가였건만 그의 작품 ‘White Canoe’(1990~91)는 2007년 소더비 경매에서 1130만 달러에 팔려 생존 유럽 작가 중 최고액을 기록했고, 1994년에는 세계적 현대미술상인 터너상에 노미네이트되는 등 미술계에서는 매우 유명한 작가였습니다. 어지간한 작가는 다 알고 있으려니 자만했던 제가 한 방 크게 먹은 셈이죠.
크리스티 옥션하우스의 인턴 생활 중 직접 보게 된 그의 작품 ‘Pine House’(1994)는 작품 뒷면에 작가가 남긴 미스터리한 기록 때문에 한참 애를 먹었습니다. ‘Christmas Flowers’라는 부제가 붙었지만 그림을 그린 시점은 7, 8월 여름으로 기록돼 있다는 것, 그리고 캐나다의 코부르(Cobourg) 풍경이라는 기록 등 모두가 수수께끼투성이였습니다. 제게 맡겨진 과제는 이 그림과 관련된 모든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이었는데 앞이 막막하더군요.
캐나다 코부르 지역의 풍경을 담은 흑백사진.
“나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데 집중하느라 놓쳐버리는 것들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진을 찍고 나서 실망하게 되는 건, 찍을 때 당신이 느꼈던 감정을 사진이 고스란히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죠.”
이 작품은 지금은 화재로 소실된 당시의 동네 하숙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큰 화폭에 담긴 풍경에 몰입하지만 부분마다 다른 질감과 컬러로 표현한 작품의 표면 때문에 일종의 ‘소격효과’를 경험합니다. 특히 아주 얇게 표현된 전경, 즉 꽁꽁 얼어붙은 집 앞 도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강’처럼 관객과 풍경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저는 우여곡절 끝에 코부르의 아주 오래된 옛날 집을 담은 사진을 찾아냈습니다. 그가 그린 집과 별 차이가 없는 집입니다. 마치 오래된 앨범에서 꺼낸 사진처럼, 가장 고요한 작가의 기억을 복원해놓은 이 작품은 특별한 한 지방의 풍경이 아닌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원형적인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눈앞에 당장이라도 잡힐 것 같은데 실제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딘가에 대한 강한 그리움은, 1994년 한여름임에도 피터 도이그를 크리스마스 즈음의 코부르로 달려가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