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이런 처지가 되고 보면 밑도 끝도 없이 옛일들을 떠올리게 된다. 유년의 기억, 미성년의 기억, 청년기의 기억. 그런 기억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낯설다. 자신의 기억이 들려주는 것임에도 남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래서 웃음도 짓게 되고 씁쓸한 냄새도 맡게 된다. 만약 어느 시기의 기억들을 몇 가지 단어로 요약해본다면 어떻게 될까. 솔? 처음 피워 물었던 담배 이름? 교련복? 하루 종일 ‘우로봐!’ 하면서 제식분열을 했던 일? 소설가 박범신은 자전소설 더러운 책상에서 자신의 한 생애를 다음과 같은 단어로 기억하고 있다.
“함석대문, 철길, 쇼펜하우어, 화류항, 육체와 영혼, 이중성, 요추골다공증, 매화당, 어머니, 도스토예프스키, 상실, 부용미용실, 앙리 미쇼와 박재삼, 묘지, 유리도시, 죄와 벌, 눈물, 결별, 대학, 살인, 여심여인숙, 공포, 혁명, 독살, 매음녀, 살인자, 관 뚜껑….”
일제 초기 성어기 땐 100여 척 선단 몰리기도

저 60년대 강경읍의 소년은 일찌감치 세상을 알아버렸고, 통학기차를 타고 익산으로 가면, 대폭발로 지명까지 사라져버린 옛 이리역의 거대한 사창가 누나들이 쓰디쓴 세상의 한복판에서 생의 한순간을 간신히 기워가는 것을 매일같이 봐야 했다. 그래서 소년은 마음의 말과 입의 말이 엇갈리는 성장사를 보낸다. 그리고 그것이 곧 소설 쓰기의 연습이 되어버렸다. 더러운 책상에서 박범신은 이렇게 쓴다.
“통학기차를 타려면 서둘러야 할 시간이다. 광기의 파장이 세계로부터 그의 내부로 여전히 수신되고 있지만, 그는 일어나 밥을 먹어야 한다. 장독대 어귀의 펌프 샘가에서 어머니가 양은대야에 담아다준 세숫물에 손 담글 때, 무엇인가 반투명한 것이 언듯언듯 대야 속으로 투신하는데, ‘눈이다. 어머니 눈이 와요’라고 말하려 하지만 성대를 따라 올라오는 문장은 그것과 딴판이다. 어머니, 케네디 대통령이 죽었어요.”
강경은 금강 하류의 조수가 깊게 밀려드는 곳으로 옛날에는 우거진 갈대가 행렬을 이룬 저습지대의 갯마을이었다. 그것이 근세기의 강경을 은성하게 만들었다. 한일병합 이전부터 일본 상인들이 강경에 터를 잡았다. 농산물과 해산물이 강경읍내를 거쳐갔고 대전 공주 익산 전주 일대의 물산과 인파가 몰려 도매상, 잡화상, 공구상, 은행, 학교까지 개설되었으니 이 모두가 한일병합 이전의 일이었다.
8·15광복 이전까지 강경은 평양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으로 통했다.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하였음에도 금강 하구와 가까워 육로와 해로를 모두 이용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일제 초기의 성어기 때는 그 작은 포구에 무려 100여 척의 선단이 밀려들기도 했다. 그리고 강경젓갈이 있었다. 그 옛날의 부둣가였던 강경읍내 태평동 일대는 지금도 대형 젓갈백화점의 홍보물이 흩날린다.
공주와 논산 쪽으로 철로 생기면서 쇠락

한때 은성했던 강경이 지금은 젓갈로 이름을 알린다.
“황야의 도시에서 산성화된 가슴을 끌어안으며 절망하고 반역하고 쓰러져 눕는 우리들. 우리에겐 지금 풀잎이 살아남을 수 있는 알맞은 습도, 맑은 햇빛, 부드러운 바람이 필요하다.”
이런 말이, 그런 시대를 다 겪어낸 오늘에 와서는 이른바 ‘아스팔트 킨트’(1970년대 산업화 문학) 소설의 낭만성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가속화하는 경제위기와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강준만의 표현으로는 자국 내의 ‘식민지’) 현격화되어 도저히 좁혀질 수 없는 파국이 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또다시 ‘절망하고 반역하고 쓰러져 눕는’ 소읍을 상기하면, 또다시 눈앞이 먹먹해지고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이다. 시인 강형철의 시 야트막한 사랑의 한 대목이 들려주는 애틋한 사랑 노래가 11월의 마지막 바람들과 함께 빌딩숲 사이로 사라져가고 있다.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의 사랑 아니라/ 개운하게 쏟아지는 장대비 사랑 아니라/ 야트막한 산등성/ 여린 풀잎을 적시며 내리는 이슬비/ 온 마음을 휘감되 아무것도 휘감은 적 없는//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가슴이 뛸 만큼 다 뛰어서/ 망둥이 한 마리 등허리도 넘기 힘들어/ 개펄로 에돌아/ 서해 긴 포구를 젖어드는 밀물/ 마침내 한 바다를 이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