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는 과대망상이 돌이킬 수 없는 살인사건을 불렀다.
1990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변변한 직업 없이 지내던 김모(37) 씨는 항상 머리맡에 칼과 망치를 두고 잠을 잤다. 부모에게 폭행을 일삼아서 그의 부모조차 “평생 저놈을 정신병원에 가두고 싶다”고 털어놓았을 정도. 김씨는 친구가 없고 결혼도 하지 않아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다. 상해 등 전과 3범인 김씨는 자신의 현실이 왜 이렇게 됐는지를 비관하며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다 문득 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영화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제자가 스승에게 맞는 장면을 보며 내가 그렇게 당했던 것을 떠올리게 됐다”고 진술했다.
1987년 고등학교 1학년 당시 시험을 보는 도중 송모(58) 교사에게 “커닝했다”는 지적을 받았던 일을 떠올리며 김씨는 송 교사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과대망상에 빠지기 시작했다. 동료 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1월 학교에 찾아가 송씨를 비방하는 내용을 도화지에 새겨 칼로 파낸 뒤 복도와 화장실 벽에 그것을 대고 검은색 스프레이를 뿌려 글자가 찍히도록 하는 낙서를 하기도 했다.
학교 찾아가 복도에 송 교사 비방 낙서
이런 일이 있은 뒤에도 계속 전화를 해오는 김씨를 송 교사는 실제로 한 번 만났다고 한다. 당시 송 교사는 김씨를 만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네가 미워서 그랬겠느냐. 미안하게 됐다”며 사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씨는 ‘그 정도 사과로는 안 된다’며 권투장갑을 끼고 자기와 권투시합을 하든지, 전교생이 모이는 조회자리에서 공개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송 교사는 김씨를 타일러 보냈고, 그 뒤로 두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김씨의 주장과 달리 경찰 조사에서 김씨는 체벌 유형과 강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더욱이 김씨는 고교 졸업 시절 군대에서 자살한 큰형의 사체를 보고 난 뒤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정신과 치료와 함께 약물을 복용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김씨는 4월 마트에서 등산용 과도를 구입한 뒤 지난 3개월간 일주일에 두세 차례 서울 은평구 갈현동의 송 교사 집 앞에 찾아가 호시탐탐 범행 기회를 노렸다. 김씨의 협박을 받아 송 교사가 피신해 있었다는 일부 언론보도와 달리, 송 교사는 경기 고양시에 모친이 홀로 살고 있어 주로 모친 집에 거주하다가 주말에 등산을 가기 위해 자신의 집에 들렀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이 발생한 11월8일에도 김씨는 송 교사의 집 근처에 숨어 있었다. 밤 9시41분경 송 교사가 집에서 나와 차를 타려고 차문을 여는 순간 김씨는 송 교사의 뒤에서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쓰러진 송 교사의 몸에 올라탄 뒤 목 윗부분을 10차례 이상 찔렀다.
사건 현장을 조사한 경찰 수사관이 “18cm짜리 과도가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칼처럼 휘어져 있었다”고 설명할 만큼 김씨의 증오심은 컸다. 흥분한 나머지 자기 손에 칼날이 찍히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송 교사의 의식이 없자 김씨는 도주했고, 행인이 쓰러져 있는 송 교사를 발견해 112에 신고했다. 하지만 동맥과 정맥이 다 끊어져 송 교사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김씨를 검거할 수 있었던 결정적 단서는 송 교사의 학교 컴퓨터에서 발견된 한 장의 사진과 동료 교사들의 진술. 사건이 터지자 경찰은 교장부터 행정실 직원까지 전원을 소집했다. 송 교사의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김씨를 나타내는 ‘김·#52059;·#52059; 사진’이라는 폴더가 있었으며, 김씨가 1월에 난리를 피운 그 사람이라는 동료 교사의 증언이 뒤따랐다. 경찰은 김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김씨의 집 주변에서 잠복 수사를 했다. 새벽 3시가 지났을까. 택시에서 한 남성이 내렸다. 그 남성은 황급히 김씨의 집에 들어가더니 10분 뒤 뭔가를 들고 나와 70여m 떨어진 곳에 버렸다. 경찰이 확인한 결과 피 묻은 옷가지였고, 이를 근거로 경찰은 김씨 집에 들이닥쳤다.
자기 손도 다쳐 응급실에서 수술대기 중 체포
“다 알고 왔다. 집에 아들이 있느냐?”
경찰은 김씨 가족과 20여 분 실랑이를 벌인 끝에 김씨가 한 병원 응급실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1월9일 오전 5시5분경, 경찰은 서울 강동구 길동 H병원에서 지혈시술을 받고 수술대기 중이던 김씨를 검거했다. 김씨의 손바닥은 힘줄이 다 나간 상태였다.
“왜 왔는지 아느냐?”
“압니다. 시험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했다고 때려서 제가 죽였습니다.” 김씨는 마지막까지도 ‘선생님’이라 하지 않고 ‘그 인간’ ‘그이’라고 부르는 비정함을 보였다.
김씨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고 위험인물이었음에도 송 교사는 동료 교사들에게 애로사항을 털어놓지 않았다. 오히려 “다 내가 부족한 탓이다. 제자의 허물도 내 허물”이라며 제자를 감쌌다. 동료 교사는 “돌아가시기 열흘쯤 전 문득 송 선생님에게 ‘그 녀석한테는 연락이 왔느냐’고 물어봤다”며 “당시 송 선생님은 1월 이후 전혀 연락이 없었다고 했는데…. 밤에 기습적으로 당할 줄이야”라며 눈물을 흘렸다.
김씨를 수사한 서울 은평경찰서 관계자는 “문명이 발달하면서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범죄들이 발생하고 있다”며 패륜아의 범죄로 송 교사가 체벌교사로 매도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마지막까지 제자의 허물이 자신의 허물이라고 생각했던 송 교사. 송 교사의 이 같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면회를 요청했지만 김씨는 ‘건강상 이유’로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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