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서점 아마존이 만든 E북 ‘킨들’. 곧 신문도 배달받게 된다. 뉴욕은 이처럼 최신 전자제품에 열광하는 ‘트렌디 긱’들의 도시이기도 하다.
실제로 뉴욕에서 살면서 이런 최신 가젯(Gadget) - 작은 전자제품이나 그 주변기기를 일컫는 말-의 트렌드를 모르면 어떤 대화에도 낄 수 없을 정도로 언젠가부터 유행의 중심에 ‘가젯’이 자리잡았다. 행사나 파티에 참석해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올 가을 어떤 의상과 가방이 유행할 것인지 못지않게 어떤 휴대전화, mp3 플레이어, 혹은 아직 세상에 선보이지 않은 획기적인 전자제품 트렌드를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난다. 뉴욕은 여기저기 ‘트렌디 긱’이 넘쳐나는 도시가 됐다.
아이폰 3G 발매일에 새벽부터 장사진
올해 봄 애플사의 신작 ‘아이폰(iPhone) 3G’가 발매되는 날, 필자는 새벽 4시에 집을 나섰다. 애플사가 새로운 기기를 내놓을 때마다 발매 당일 줄을 서서 구매하는 필자는, 뉴욕에서 요즘 제일 트렌디하다는 지역 가운데 하나인 미트패킹 디스트릭트(Meatpacking District)에 올해 초 새로 문을 연 애플스토어(그전까지 맨해튼의 애플스토어는 소호와 미드타운 두 곳에 있었다)로 향했다. 다른 두 매장보다 기다리는 사람이 적을 듯해 선택했지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은 필자만이 아니었다. 동이 트지 않은 어둑어둑한 새벽 5시에 벌써 수백명이 진을 치고 매장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서 사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는 몇 초 동안, 기다리는 줄이 몇 미터 더 늘어난 것을 보고는 곧바로 대열에 몸을 던졌다. 이렇게 줄을 선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힘들어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는다. 마치 축제에 참여한 듯 줄의 앞사람, 뒷사람과 새로 나올 것과 기존의 기계가 어떤 점에서 다르고, 대항마(對抗馬)인 삼성의 인스팅트(Instinct)나 HTC의 ‘다이아몬드(Diamond)’는 어떻다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소호와 미드타운의 애플스토어에는 관광객까지 합세해 그 일대의 교통이며 통행이 마비됐고, 그날의 소동은 모든 언론의 톱뉴스가 됐다.
쓰러져가던 애플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할 수 있는 음악 플레이어 ‘아이팟(iPod)’과 음원 판매 루트 ‘아이튠즈(iTunes)’의 성공사례는 이미 전설이 됐으며, 그에 대항하는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야심차게 준비한 음악 플레이어 ‘준(Zune)’과 ‘마켓플레이스(Marketplace)’의 도전도 계속되고 있어 소비자에게 즐거운 선택의 기회를 제공한다.
애플사의 ‘아이폰 3G’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음악 플레이어 ‘준’.
아마존이 E북 시장에 진입한 이유는 아마존닷컴이라는 세계 최대의 인터넷 서점을 운영하고 있어 인쇄물의 콘텐츠화에 출판사들과 쉽게 합의할 수 있고, 또한 킨들이라는 장치에 ‘위스퍼넷(Whisper net)’이라는 무선인터넷 기능을 장착해 휴대전화의 전파가 도달하는 곳이면 어디서라도 즉시 아마존 웹사이트에서 콘텐츠를 구입해 다운로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 저널 같은 신문을 매일 아침 킨들로 다운로드해주는 서비스도 운용된다고 하니 미래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분야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미국의 초등학교 교과서를 E북으로 바꾼다는 계획도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활자문화의 변화도 예상할 수 있을 듯하다.
필자 역시 가젯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만, 킨들의 구매를 망설이는 이유는 디자인 때문이다. 킨들의 기능은 혁신적이지만, 디자인이 다소 투박하다. 트렌디 긱에게는 기능 못지않게 세련된 디자인이 중요하다.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새로운 버전의 킨들 2가 발매된다는 소문에 많은 트렌디 긱들이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의 독서 습관을 고려해 책의 형태를 살린 E북 ‘리디우스’와 디자이너 비비언 탐의 런웨이에 백 대신 등장한 미니노트북, 뉴욕 청소년들의 필수품이 된 ‘사이드킥’(위부터).
최근 한국에서도 교보문고가 E북 콘텐츠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한국 특유의 가젯 중 하나인 PMP를 통해 읽을 수 있는 루트를 정착시키기 위해 PMP 제작업체들과 제휴, 콘텐츠 보급의 활성화를 모색 중이라고 한다. 한국의 전자책 시장 판도가 어떻게 형성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패션과 달리 ‘최신’ 아니면 바보 취급
패션이 여성 편향적인 트렌드라면, 상대적으로 가젯은 남성적인 트렌드처럼 생각되지만, 얼마 전 끝난 뉴욕 패션 위크를 보면 그것은 편견일지도 모른다. 최근 뉴욕을 뜨겁게 달군 대만의 아수스(ASUS)가 생산한 저가 미니노트북 ‘이(Eee)’의 열풍에 자극받아 각 컴퓨터 제조사들이 저가 미니노트북을 내놓았는데, 2009 S/S 컬렉션에 참여한 디자이너 비비언 탐(Vivien Tam)이 휴렛팩커드사와 컬래보레이션으로 미니노트북을 발매, 핸드백 대신 이 노트북을 든 모델이 워킹을 한 것이다. ‘긱걸(Geek Girl)’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미국의 인기 드라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얼마 전 ‘부모들이 가장 보여주고 싶지 않은 드라마’로 뽑힌 청춘드라마 ‘가십걸(Gossip Girl)’에는 최신 가젯이 대거 등장한다. 이것이야말로 현재 뉴욕 젊은이들의 트렌드를 가장 잘 반영한 듯하다. 이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블랙베리(Blackberry)를 비롯한 스마트폰(전자수첩에서 한 단계 발전해 e메일이 가능한 휴대전화)은 바쁜 뉴요커의 상징이 됐고, 10대 청소년의 필수품이라 불리는 ‘사이드킥(Sidekick)’이라는 문자 전용 전자기기를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가젯은 개인적으로 사용하므로 일종의 패션 아이템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옷이나 가방은 시대가 지나면 빈티지나 앤티크라는 멋진 이름으로 불리며 최신 유행 제품보다 더 ‘트렌디’하고, 엄청나게 비싸게 팔리기도 한다. 이에 비하면 가젯은 최신 모델에 최신 애플리케이션, 최신 액세서리, 최신 디자인이 아니면 ‘더미(dummy·바보)’ 취급을 받는다. 모두가 지금 당장 새로운 가젯을 갖고 싶어 안달하는 이유이자, 가젯의 속성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