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올림픽 메인 스타디움 앞에서 관광객들과 베이징 시민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7월 중순 중국 베이징(北京)의 자오양취 왕징(朝陽區 望京)에 거주하는 한국인 주재원 김모(34) 씨는 아내와 함께 서둘러 이삿짐을 쌌다. 서울 본사에서 직원들에게 급거 귀국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김씨가 다니는 회사는 부엌가구 전문 생산업체로 올 4월 영업사원 5명을 베이징에 파견했다. 그러나 베이징올림픽 개막일이 다가오면서 더 이상의 영업활동이 어려워졌다.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도 물건을 실은 트럭이 베이징 외곽에서 시내로 들어오기가 만만치 않은 까닭이다. 베이징 시당국과 올림픽조직위원회는 도시 미관을 정비하고 베이징올림픽 메인 스타디움 앞에서 대기오염을 줄인다는 취지로 시 외곽에서 진입하는 트럭 등 차량을 제한하고 있다.
김씨 회사로서는 이러한 중국의 조처가 부당하게 느껴지겠지만, 중국인들에게 ‘베이징의 오늘’은 흥분 그 자체다. 회사원 천화(陳華·24) 씨는 “지금 우리 중국인의 감정은 흥분, 기대, 우려 등으로 뒤범벅되어 있다”며 “그래도 베이징올림픽은 역대 올림픽 중 가장 성대하고 훌륭하게 치러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미관 정비 이유 市 외곽 진입 차량 제한베이징 거리는 예전과 사뭇 달라졌다. 길거리에서 침을 뱉거나 윗옷을 걷어 올려 뱃살을 드러내는 사람,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는 사람을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장식품으로 여겨지던 신호등도 제구실을 하고 있다. 모두 베이징 시당국과 올림픽조직위원회가 캠페인을 추진한 덕분이다.
‘迎奧運 講文明 樹新風.’ ‘올림픽을 맞아 문명을 강조하고 새로운 기풍을 세우자’는 뜻의 이 캠페인 표어가 베이징 거리 곳곳에 등장한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베이징 시정부는 430만 가구에 ‘문명예절교본’을 배포했다. 이 교본에는 외국인을 만났을 때는 나이, 월급, 결혼 유무, 사는 곳, 사생활, 정치 및 종교사상 등을 묻지 말라는 ‘묻지 마 8조항’이 담겼다.
변화의 모습은 베이징의 택시에서 가장 잘 포착된다. 비좁고 냄새 나던 택시 대부분이 ‘베이징현대(北京現代)’차로 교체됐다. 중국 택시 특유의 악취도 거의 사라졌다. 비결은 택시기사들을 상대로 한 위생교육. ‘차내 흡연 금지’는 기본이고 택시 앞좌석에는 ‘자주 머리 감기, 매일 이 닦기’ 등의 문구가 새겨진 스티커가 붙어 있을 정도다. 더불어 경찰도 바빠졌다. ‘안전 올림픽’을 위한 순찰차 운행이 배 이상 늘었다. 또 단속할 때는 존칭으로 양해를 구한다. 손가락질 같은 무례한 행위도 눈에 띄게 줄었다.
외국인들의 흥미를 끄는 점은 뭐니 뭐니 해도 대기 정화를 위해 2~3일에 한 번씩 뿌리는 인공강우. 사막에서 날아오는 황사와 미세먼지 때문에 곤혹스러운 베이징 시당국이 내놓은 비책이다. 천둥번개와 함께 인공강우가 쏟아지는 덕에 먼지투성이 대기가 다음 날 아침만 되면 놀라울 정도로 맑게 갠다.
환경개선을 위한 노력은 산업현장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베이징시 환경보호국은 지난 4월 ‘베이징 대기 개선을 위한 특별조치’를 발표해 올림픽과 무관한 모든 건축 및 토목 공사를 일시 중지시켰다. 또 베이징의 주요 도로를 매일 청소하고 물을 뿌렸다.
‘문명예절교본’ 배포 의식개혁 운동일반 베이징 시민들까지 환경개선에 동참하고 있다. 6월1일부터 중국 전역 슈퍼마켓에서 무료로 제공되던 비닐봉지가 유료로 바뀌었다. 베이징 주부들은 비닐봉지 값 2마오(毛·약 30원)를 아끼기 위해 ‘장바구니 소지하기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광저우(廣州) 등 일부 지역에서는 1만 위안(약 150만원)짜리 명품 장바구니가 유행할 정도라고 한다.
이런 변화가 항상 즐겁지는 않은 법. 올림픽 때문에 오히려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불만이 높다. 서민들이 애용하던 인력거가 자취를 감췄고, 일부 아파트 지하공간에서의 영업활동이 제한되자 “누구를 위한 올림픽인가”라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왕징에서 만난 중국인 차오리엔(橋蓮·45) 씨는 “지진 재난과 고유가로 물가가 너무 올랐다”며 “서민들이 애용하는 인력거마저 없앤 건 참 아쉽다”고 털어놓았다.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베이징 지하철에 올림픽 로고가 부착됐다. 톈안먼 광장의 중국 경찰관. 올림픽 개최 한 달 전부터 검문 검색이 한층 강화됐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베이징의 한 서민가족(왼쪽부터).
베이징에 상주하는 한국인은 특히 비자문제에 불만이 많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규제 없이 손쉽게 비자 연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올림픽이 다가오면서 비자 연장이 쉽지 않아 귀국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관광비자(L)로 입국한 외국인은 최대 30일까지만 체류 연장이 가능한데, 연장하려면 미화 3000달러 이상이 예치된 은행잔액 증명서를 제출해야 한다. 한 한국 교민은 “안전은 좋다. 그러나 지나친 건 반대다. 중국이 올림픽으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베이징올림픽에서 가장 신경 쓰는 점은 ‘안전’. 사상 최대 규모의 선수단과 세계 80개국의 정상 및 주요 귀빈이 참석할 예정이라, 안전 올림픽에 ‘다 걸기’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올 초부터 중국 내 티베트 시위, 지진, 열차 탈선 등 불안한 조짐이 나타나 중국 정부를 더욱 긴장시키고 있다.
한국인 비자 연장 거부 사례도 부쩍 늘어이에 중국 정부는 40개 조로 구성된 테러대책반 ‘창청(長城)5호’를 발족했다. 대책반은 폭탄, 생화학물질을 이용한 테러, 핵공습, 사스(SARS·급성호흡기증후군) 같은 전염병 발병에 대비하는 광범위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경찰도 8월8일 올림픽 개막 때부터 ‘올림픽 기간 24시간 비상근무체제’에 돌입했다. 동네마다 방범초소가 세워졌고 주민을 상대로 한 안전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호텔, 식당 등 외국인이 이용할 만한 모든 장소를 대상으로 보안, 위생 검사도 진행 중이다. 각 지하철 역에는 짐 검색대를 설치해 승객들이 소지한 ‘위험물질’을 단속하고 있다.
88서울올림픽 이후 서울은 ‘역동의 도시’로 전 세계에 각인됐다. 현재 중국인들은 올림픽 이후 베이징이 ‘생산거점 도시’란 이미지를 탈피하고 세계 1000대 기업이 중국 내수시장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이는 각축장으로 변모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만큼 중국인들의 소비의식이 높아지면서 여유 있게 살 만한 경제구조로 탈바꿈하리라 자신하는 것이다.
“1988년 베이징, 그땐 그랬지”
“남조선 사람 수군수군 … 도로는 짜증, 호텔 앞은 시장통”
| 1988년 8월 말, 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베이징공항에 도착한 나는 동물원의 원숭이가 됐다. 내 여권을 본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이 “남조선에서 온 사람”이라고 수군거리며 주위를 에워쌌던 것. 그들은 남조선은 잘사는 나라고, 곧 올림픽이 열릴 것이라며 쑥덕거렸다.
입국 수속을 마친 뒤 은행에서 환전을 했다. 미화 100달러를 와이회이쥐안(外匯券·외국인이 사용할 수 있는 중국 화폐) 460위안(현재 가치로 약 6만7780원)으로 바꿔줬다. 택시정류장에는 붉은색 소형 택시가 줄지어 서 있었다. 손님이 많지 않아서인지 택시기사들이 나를 둘러싸고 가격 흥정을 했다. 요금을 와이회이쥐안으로 지불한다고 하니 조금 싸게 80위안만 받겠단다. 왕복 2차로의 공항로는 자동차와 소나 말이 끄는 마차가 뒤엉켜 있었다. 속도가 날 리 없었다. 베이징에 진입하기까지 40분이나 걸렸다.
숙소는 시내에서 가장 큰 호텔인 베이징호텔로 잡았다. 저녁을 먹을 겸 호텔 주변을 거닐었다. ‘아, 중국이 이런 나라인가?’ 하는 깊은 실망감이 밀려왔다. 호텔 뒤편 골목길에서 남성들은 웃통을 벗고 있었고, 좌판에서 음식을 파는 노점상들은 가래침을 뱉어가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객행위를 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개인영업(客 戶)을 허용하자 이런 상행위가 먼저 시작됐구나 싶었다. 저녁을 먹으러 찾아간 식당에서는 안 된다는 메뉴가 너무 많았다. 나중에 식당 주인과 안면을 트고 나서야 배급제도가 일부 남아 있어 식재료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온갖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와 버스, 자전거가 뒤엉킨 도로 사정은 짜증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중국인 어느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모든 교통질서는 사람이 최우선이고 다음은 자전거, 자동차는 맨 마지막이었다. 교통사고가 나도 먼저 사람을 보호하고 무조건 자동차가 잘못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호텔 앞에는 불법 달러상, 장사꾼, 택시기사들과 이들을 쫓아내려는 경비원들이 북새통을 이뤘다. 달러 암거래는 위법이지만 내국인이 사용하는 인민폐로는 1달러당 20위안까지 받을 수 있었다. 중국인도 와이회이쥐안만 있으면 시내 면세점에서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소형 택시를 하루 240위안에 전세내 만리장성을 관광했다. 오후 5시가 넘자 근무시간이 지났다며 추가요금을 요구했다. 길거리에서 가장 큰 애로사항은 화장실이었다.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려면 중국 돈 2푼(分)을 내야 했다. 화장실에는 진정한 화장실은 물론칸막이도 없었고 바닥에 구멍만 뚫려 있었다.
당시 중국인들의 월급은 80위안에서 120위안이었다. 외국인 회사는 20배나 더 많은 월급을 주면서 중국인을 채용했다. 외국인 회사가 그 돈을 중국 정부에 내면 정부가 직원에게 월급으로 480위안 정도를 지급했다. 그래서 외국인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중국 젊은이들의 최고 희망이었으며, 직원 한 명을 뽑을 때 베이징에 거주할 수 있는 호구(우리의 주민등록증에 해당)를 지닌 지원자가 수백명 몰려드는 일은 예사였다. 당시 베이징은 경기가 활성화되지 못했고 청년 실업도 넘쳐났다.
박우동 경제학 박사·전 대한항공 중국본부장 wylley@hanmail.net | |
베이징올림픽 이후의 중국
강대국으로 부활 부푼 꿈 … 인민 욕구 폭발 공산당 체제 버거움
| 영어교육 열풍이 거세다는 점에서 베이징올림픽은 20년 전 우리가 개최한 88서울올림픽과 꼭 닮았다. 당시 서울 상인들은 “Nice to meet you” “Here’s your change” 같은 문장을 달달 외워야 했지만,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적고 있다. “얼마나 많은 외국인 방문객이 88서울올림픽을 보러 한국에 왔느냐”는 질문에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의 한 직원이 자랑스럽게 “fifteen”(15명)이라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도 전한다. 지금 중국 베이징의 영어 열풍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서울이든 베이징이든 세계를 향한 꿈의 날갯짓은 미국과 영어권으로 향해 있다.
중국이 한국과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체제의 이중성이다. 중국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면성을 지니기 시작한 지도 15년이 지났다. 빌 게이츠의 말처럼 중국은 ‘오늘날 세계화의 중심에 서서 미국보다 더 자본주의적으로 변화하는 나라’인 동시에 공산당 1당 독재가 여전한 나라다.
중국인들은 베이징올림픽 이후의 장밋빛 미래를 꿈꾼다. 수백 년의 질곡을 뚫고 강대국으로 부활하겠다는 만만찮은 꿈이다. 순조로울 경우 중국은 머지않아 미국과 맞먹는 경제력을 토대로 국제무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이미 중국 공산당은 지난해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외교 전략의 적극화를 선언했다. 여기에 중화사상에 기초한 문화적 영향력을 접목하고자 한다. 이처럼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이끄는 현 중국의 정치 리더십은 경제, 외교, 문화를 한데 엮어낸 ‘종합 국력’을 중시한다.
그러나 장애물도 만만치 않다. 가장 큰 과제는 정치개혁이다. 그렇다고 서방식 정치개혁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중국식 민주화’를 전제로 당정일체(黨政一體)의 현 체제를 고수하면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시장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겠다는 방침이다. 문제는 사회계층이 분화되고 인민의 욕구가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1당 독재체제로는 밀려오는 갖가지 문제를 감당하기 버거울 것이다.
중국 지도부는 당내 개혁을 서두르면서 하부조직으로 권한을 이전하는 중이다. 당외 개혁은 당-국무원-전인대의 합리적인 상호 기능 조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조용하면서도 과감하게, 그러나 ‘당의 울타리 안’에서 진행된다.중국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장기적으로 북유럽 모델, 서유럽 모델 그리고 미국 체제의 일부 장점까지 모델로 하는 시도도 엿보인다. 그러나 ‘모든 논의는 당에서 수렴한다’는 불문율이 있다. 그 배경에는 중국 공산당이 그동안 시장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왔다는 평가와 함께, 7000만 당원을 가진 중국 공산당과 경쟁할 만한 카운터파트너가 없다는 현실이 존재한다.
지금 중국 동부지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000달러 남짓으로,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20년 전 한국 경제와 비슷하다. 한국은 올림픽이 끝나고 20년 뒤 1인당 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중국인들은 ‘우리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광수 교수·인천대동북아국제통상학부 kshan@incheon.ac.k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