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못지않게 예고편이 관심을 모은 영화 ‘인디애나 존스’ ‘스피드 레이서’ ‘섹스 앤 더 시티’(왼쪽부터).
비단 김씨만의 느낌일까. 짧으면 하루, 길면 한 주만 기다리면 보게 될 내용임에도 예고편은 마지막까지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바싹 다가앉게 만든다. 일정한 시청률을 보이던 방송 프로그램이 특정일에 유난히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데는 예고편의 영향력이 적지 않다. 지난해 막대한 제작비로 화제를 불러모은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경우 따로 예고편 제작업체를 선정했는데, 단순히 한 회 분량 예고에 그치지 않고 3, 4회 앞당긴 내용을 내보내기도 했다.
인터넷 예고편 통해 영화 관람 결정
예고편이 중요한 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 예매 및 정보 사이트 맥스무비가 올해 초 약 2500명의 누리꾼(네티즌)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6.4%가 영화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로 예고편을 꼽았다. 맥스무비의 김형오 웹사업실장은 “예고편이 중요해진 것은 인터넷 발달과 관련 있다”면서 “해를 거듭할수록 마케팅에서 예고편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화제작인지의 여부에 따라 예고편에 대한 관심에도 차이가 있지만, 기대를 모으는 영화는 예고편 조회수가 20만회를 넘곤 합니다. 5월에 개봉한 ‘아이언맨’ ‘스피드 레이서’ ‘나니아 연대기 : 캐스피언 왕자’ ‘인디애나 존스4’ 등 블록버스터들은 개봉 전부터 20만회를 넘겼습니다. 우리 사이트에 업데이트된 영화의 경우 당일 평균 5000회 정도의 조회수를 기록하는데, 다른 콘텐츠보다 예매 관객의 관심도가 높습니다.”
이뿐 아니다. 일부 예고편 마니아들은 영화 예고편을 홈페이지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MP3 플레이어에 저장해 끊임없이 즐기기도 한다. 실제 ipod에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애플사 홈페이지(www.apple.com)의 다운로드 파트에서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섹션은 movie trailer, 영화 예고편 콘텐츠다.
예고편에 대한 관심은 조금이라도 일찍 정보를 알고 싶은 호기심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예고편 자체가 주는 매력 때문이기도 하다. 젊은층일수록 짧고 흐름이 빠른 영상물에 관심을 갖는다. 더불어 예고편은 그 자체로 온전한 ‘작품’이다.
“30, 40초짜리 예고편을 만드는 데 잘 풀리면 서너 시간, 잘 안 풀리면 한나절도 넘게 걸려요.”
MBC 인기 드라마 ‘이산’의 편집을 담당하고 있는 황금봉(55) 씨는 국내 대표적인 드라마 편집기사다. 지난 20여 년간 ‘질투’ ‘국희’ ‘허준’ ‘대장금’ ‘주몽’ 등 굵직굵직한 작품의 편집을 맡은 그는 이들 작품의 예고편도 만들었다. 이 베테랑에게도 예고편을 만드는 일은 공이 많이 든다. 예고편 한 편을 만들기 위해서는 방송에 나오는 내용 외에도 촬영분을 모두 살펴야 한다. “제작된 내용이 부족한 경우가 가장 난감하다”는 그는 “일주일 단위로 촬영하는 탓에 월화 드라마는 화요일 예고편이, 수목 드라마는 목요일 예고편이 상대적으로 짧게 마련”이라고 설명한다.
예고편은 대본을 토대로 하지만, 드라마 순서를 그대로 따르는 건 아니다. 진한 애정신이나 노출신, 화려한 액션신, 이 밖에 공을 들인 장면들은 특별히 살리기도 하고, NG 중에서도 좋은 장면이 있을 때는 따로 떼어내 사용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예고편에서 봤던 장면이 본방송에서는 안 나올 수도 있다.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컷이 짧고 더 많은 내용이 들어가요. 좀더 재미를 추구한다고 할까요. 옛날 예고편이 감정적인 면과 영상의 흐름을 중시했다면, 요즘엔 템포가 빨라졌어요. 지루하면 안 되니까요.”
다음 회 주요 이슈 보여주지 않는 게 불문율
TV 드라마의 경우 황씨 같은 편집 전문가나 예고편 제작업체에 의뢰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조연출이 떠맡는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쾌도 홍길동’의 예고편을 만들었던 장선영 조연출에겐 예고편이 40초짜리 자신의 드라마를 제작하는 것과 같은 과정이었다고 한다. 대본에 따라 다음 회의 내용을 예상하고 그 회에서 주된 역할을 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예고편을 제작한다.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내용을 담지만 금기사항도 있다. 다음 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보여주지 않는다는 게 그것이다.
“속된 말로 낚시질을 하는 거죠. 트릭을 쓰는 경우가 많아요. 한 예로 홍길동이 활에 맞아 죽어가는 장면이 이전 회에 나왔다면 예고편 내내 홍길동을 등장시키지 않다가 끝에서 살짝 보여줘요. 아니면 다른 인물에 관한 대사의 일부를 주인공에게 붙여 마치 주인공에게 그 일이 일어날 듯이 표현함으로써 호기심을 증폭시키기도 하고요.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그 장면에 대해 논란이 일고, 다음 날 ‘또 낚였구나’ 하는 글이 올라오면 개인적으로 뿌듯해요.(웃음) 시청자들 역시 그런 재미로 예고편을 보는 것 같아요.”
TV 드라마 예고편이 대사에 의존한 내용 요약과 연결고리 면에 무게를 둔다면, 영화는 광고적 특성이 더 강화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경우 예고편 제작비용이 5억원 이상이다.
영화 예고편 및 CG 전문 제작업체 모팩의 한종선 실장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예고편을 보면 영화산업에서 예고편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산’의 황금봉 편집기사, 하하하 프로덕션의 최승원 감독, 모팩의 한종선 실장(왼쪽부터).
우리나라의 경우 마케팅 경쟁이 치열하던 2년 전에는 수억원대의 예고편이 제작되기도 했지만, 최근엔 영화시장이 불황인 탓에 예고편 열기가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예고편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다.
CJ엔터테인먼트 홍보팀 김윤정 대리는 “영화 마케팅에서 예고편은 포스터와 함께 기본요소로 꼽힌다”면서 “비용 대비 효과가 높기 때문에 예고편에 공을 들이는 편”이라고 설명한다.
숨기기와 드러내기 경계에서 고민
“예고편은 극장 상영분도 중요하지만, 온라인상에서 누리꾼의 관심을 모으기 때문에 특히 홍보 효과가 큽니다. 지난해 ‘트랜스포머’와 ‘화려한 휴가’는 한 포털 사이트에 예고편을 올렸다가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습니다. 예고편은 감독이 직접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은 대부분 전문 제작업체에 의뢰합니다.”
현재 국내 영화 예고편 전문 제작업체는 4~5개다. 영화 촬영분을 활용해 편집하는 경우도 많지만, 예고편만을 위한 촬영이 따로 이뤄지기도 한다. 예고편 제작업체 하하하 프로덕션의 최승원 감독은 “영화제작사와 회의를 거쳐 예고편의 콘셉트를 정한 뒤 그에 맞춰 촬영을 따로 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힌다.
“‘말죽거리 잔혹사’ 예고편에 등장한 권상우의 환상적인 발차기 신이 실제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아 여성 관객들이 실망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웃음) 경우에 따라서는 예고편 때문에 영화 장르가 바뀌기도 하죠. 드라마나 예술영화의 예고편이 다소 코믹하거나 섹시한 모양새로 나왔다가 관객들에게 ‘사기 당했다’는 원망을 듣기도 합니다.”
또한 18세 이상 관람가 영화는 주민등록 확인이 필요한 온라인상의 예고편과 관객의 연령대 파악이 어려운 극장 상영 예고편이 노출이나 폭력 수위 면에서 다르다는 것이 최 감독의 설명이다. 실제로 4월 개봉한 ‘가루지기’는 노출 정도나 횟수 면에서 극장 예고편과 본영화가 큰 차이를 보인다.
더불어 시간도 중요한 요소다. 예고편 분량이 길수록 관객의 집중도가 떨어지는 데다, 그 시간만큼 다른 예고편이나 광고를 줄여야 하는 극장주의 처지에서는 길이가 긴 예고편이 반가울 리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예고편의 핵심은 숨기기와 드러내기의 경계에 있다. 이 때문에 예고편을 제작하는 이들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
“코믹물의 경우 서너 차례 강한 웃음을 주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웃음 코드를 공개한 뒤에는 정작 영화에서 웃을 거리가 없었다는 항의를 받기도 합니다. 정말 ‘예고편이 전부’인 영화가 되는 거죠.”(최승원 감독)
짧지만 강한 예고편은 관객을 감질나게 하고 본작품을 기다리게 만든다. 그러나 관객들도 허울만 좋은 예고편에 여러 번 속았기 때문일까. 예고편의 화제 정도와 본작품의 흥행이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최근엔 예고편이 꽤 담백해졌다는 평도 들린다.
“2분짜리 예고편은 광고 기능도 해야 하지만 원작을 위배해선 안 돼요. 지나치게 포장하면 신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다른 영화의 예고편도 안 믿게 되죠. 예고편이 재미있어야 하는 건 맞지만 본래 내용과 동떨어지거나 배신감을 느낄 만큼 다른 이야기를 하면 되레 역효과가 나요. 결국 원작을 ‘능가’하는 예고편은 위험하다는 뜻이죠.”(모팩 한종선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