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팔아서 먹고사는 일그러진 예술가의 초상](https://dimg.donga.com/egc/CDB/WEEKLY/Article/20/08/05/27/200805270500032_1.jpg)
잘나가는 영화감독 강진우는 영화 촬영을 위해 과거에 사귀었던 네 여자를 불러모은다. 자신의 삶을 ‘갉아먹으며’ 창작을 할 수밖에 없는 그의 상황은 예술가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하다.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제에서 상을 받을 만큼 성공한 영화감독 강진우는 결혼을 앞두고 이전에 사귀었던 여자들을 만난다. 고등학교 때 만났던 순진하고 참한 양선, 그야말로 ‘엔조이’ 대상이었던 민하, 연출부 막내 시절에 만난 선배 감독의 부인이며 배우였던 정희, 대학에 다닐 때 나름 진지하게 사귀었던 의대생 은후. 셀 수 없이 많은 여자들 중 이 네 명을 ‘엄선’한 그는 그녀들에게 10년 만에, 심지어 15년 만에 만나자고 한 이유에 대해 ‘잘못을 바로잡고 싶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그녀들에게 공통적으로 저질렀던 잘못은 ‘도망쳤다는 것’이다. 강진우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그녀들의 흉터 자국을 감쪽같이 없애기라도 한 듯 ‘우린 서로한테 잘못한 게 없는 거야. 예나 지금이나’라는 자기중심적인 결론을 내린다. 물론 여인들은 그의 일방적인 이야기를 듣고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나아가 오래 묵혀뒀던 의혹들을 파헤치면서 눈물을 삼키거나 분노를 터뜨린다.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다.
그런데 강진우가 이러한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그 ‘긁어 부스럼’이 필요했기 때문. 그가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과거의 여인들을 불러들여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네 명의 여인 중 가장 똑똑하고 이성적인 은후가 지적한 것처럼 ‘결혼할 여자가 가장 섹시하고 예쁘고 착한지 확인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변명으로 죄책감을 봉합하려는 심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강진우의 진짜 의도는 다른 곳에 있다. 다름 아닌, 이 모든 상황은 영화를 찍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극의 말미에 강진우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다른 이들의 상처와 그 자신의 자괴감이다.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그의 실제 삶은 파괴돼가는 것을 느낀 진우는 약혼녀와 통화하면서 흐느낀다. ‘사랑해’라는 공허한 대사를 허공에 날리면서. 그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남자의 마음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실제 삶을 갉아먹으면서 창작을 할 수밖에 없는 ‘팔자’에 대한 서러움이다.
극의 구성을 보면, 마치 몰래카메라로 찍어서 대강 편집해놓은 것처럼 장소 이동이 없는 상태로 네 개의 에피소드가 연결돼 있다. 공간적 배경은 강진우가 묵고 있는 호텔방이며, 여인들이 들어왔다 나가는 것으로 각 에피소드가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매우 객관적으로 묘사해놓은 듯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강진우 외에 또 하나의 자아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바로 강진우에게 투사된 자신을 바라보는 작가의 자조적인 시선이다.
막판 반전으로 관객과 네 명의 여인 뒤통수 맞아
단순하고 건조한 극의 진행방식이 의도된 것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은 극 말미에 있는 반전이다. 관객은 그녀들과 함께 완벽하게 뒤통수를 맞는다. 소설의 시점에 비유하자면 ‘3인칭 관찰자 시점’이라고 할 수 있을 듯. 그 관찰자가 참으로 시니컬하고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에피소드가 끝나면 에누리 없이 전환되는 극의 구성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강진우는 그녀들이 떠나가고 난 뒤에는 가슴 아파하거나 미련을 갖지 않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모습만을 보인다.
구성의 묘미를 살린 연출이 돋보이며, 특히 에피소드 사이의 간극을 암전으로 쉽게 가리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진우가 브리지 음악에 맞춰 춤추는 모습은 어정쩡한 느낌을 준다. 사실 소품이 바뀔 일이 없기 때문에 구성의 묘미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장면과 장면 사이를 채울 만한 행동을 찾기란 쉽지 않을 듯하다. 춤을 추고 있는 이석준이 극 속의 강진우인지, 드라마 속에서 잠시 나온 이석준인지, 그가 춤을 추는 이유는 무엇인지 명확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썸걸즈’는 영화 ‘너스 베티’의 감독으로도 잘 알려진 닐 라뷰트가 쓴 연극으로, 2005년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됐다. 당시 ‘프렌즈’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슈위머가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연극에는 인간 심리를 코믹하면서도 시니컬하게 다루는 닐 라뷰트 특유의 색깔이 잘 드러나 있다.
한편 원작의 국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유머나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구사됐기 때문이다. 캐스팅은 적절해 보인다. 배우들의 연기는 자연스러우면서도 깔끔했고, 대사 전달도 잘됐다. 붉은 톤과 푸른 톤이 조화를 이룬 깔끔하고 세련된 무대는 작품의 콘셉트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4월11일부터 오픈 런,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 문의 02-766-6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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