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합본호인 ‘주간동아’ 623호는 ‘버림, 그 역설적 채움’으로 시작했다. 세상 잡사(雜事)를 다루는 시사주간지 타이틀로 매우 상큼했다. 모든 기사가 이 코드로 다 해석될 것 같았다. ‘만복의 회심의 카드’ ‘일자리 창출 사기극’ ‘특검 바늘방석’ 등의 기사는 모두 버리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였다. ‘세계화 딜레마 속 MB 정부 어찌할꼬’는 버리지도 못하고 채우지도 못하는 우리의 고민일 것이다. 감초처럼 끼어든 ‘고든 브라운, 세일즈맨이라 불러다오’ ‘오스트리아 총리 가족여행 망신살’ 기사는 버리면서도 채우기에 열중인 남들의 이야기였다. 국민 세금으로 공무 관광여행을 떠나는 것이 상식처럼 된 나라에서 이런 기사는 우리를 당혹게 한다. 마일리지 업그레이드를 뇌물이나 특혜로 보는 동네도 있다니 ‘꽉 찬 욕심, 텅 빈 마음’의 우리 삶을 보게 한다.
개인의 수준에서 버리지 못하는 사람의 고통과 버린 후의 즐거움, 마음의 짐을 덜어내거나 나누는 방법 등은 모두 쉽지 않은 이슈였다. 하지만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은 즐거웠다. 새해가 시작됐지만 자신을 제대로 버리지도 채우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다시금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다. 버림의 수단으로 ‘음식물쓰레기 처리기’는 도움이 될 것이다.
‘세컨드 라이프에서 살어리랏다, 드디어 한국 상륙’은 홍보 냄새가 심했다. 절대자유가 넘치는 인터넷 가상세계, 상상 가능한 모든 일, 짜릿한 경험이라니? 악플이든 명예훼손이든 가상세계의 혼란을 제대로 알지도 해결하지도 못해 전전긍긍하는 나라인데, 또 다른 게임 하나를 이렇게 과장해 소개하는 것은 조금 지나쳤다. 이미 미국에서 몇 년 동안 서비스된 게임인데, 향후 우리 사회에 이런 가상세계가 어떤 혼돈을 줄지도 지적했어야 했다.
‘25대 1 좁은 문, 로스쿨 뚫어라’는 박터지는 법학대학원 입학경쟁을 분석한 기사였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놓쳤다. 법학대학원 졸업이 사법시험 합격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언급했어야 했다. ‘과거 변호사들이 누리던 특권과 혜택이 유지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임’을 미리 확인해줬어야 했다. 입학 요강 수준의 기사가 돼서는 안 될 것이다.
‘루머 해명 기자회견, 또 하나의 나훈아 쇼’ 기사는 일간지 논설이었다. 가십성 루머를 쏟아냈던 언론의 갑작스러운 책임의식 발현인가? 정작 재미있는 나훈아 기자회견 쇼를 너무나 재미없게 만들었다. 비워도 비워도 채워지지 않는 노가수의 연예 열정을 대중의 마음속에 꽉 채우는 순간이었지만 기사는 그 맛을 몽땅 버렸다. 뒤늦게 채우려는 언론의 엄숙성이 마지막 쇼의 진정한 의미를 무색게 했다.
황상민 연세대 교수·심리학
개인의 수준에서 버리지 못하는 사람의 고통과 버린 후의 즐거움, 마음의 짐을 덜어내거나 나누는 방법 등은 모두 쉽지 않은 이슈였다. 하지만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은 즐거웠다. 새해가 시작됐지만 자신을 제대로 버리지도 채우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다시금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다. 버림의 수단으로 ‘음식물쓰레기 처리기’는 도움이 될 것이다.
‘세컨드 라이프에서 살어리랏다, 드디어 한국 상륙’은 홍보 냄새가 심했다. 절대자유가 넘치는 인터넷 가상세계, 상상 가능한 모든 일, 짜릿한 경험이라니? 악플이든 명예훼손이든 가상세계의 혼란을 제대로 알지도 해결하지도 못해 전전긍긍하는 나라인데, 또 다른 게임 하나를 이렇게 과장해 소개하는 것은 조금 지나쳤다. 이미 미국에서 몇 년 동안 서비스된 게임인데, 향후 우리 사회에 이런 가상세계가 어떤 혼돈을 줄지도 지적했어야 했다.
‘25대 1 좁은 문, 로스쿨 뚫어라’는 박터지는 법학대학원 입학경쟁을 분석한 기사였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놓쳤다. 법학대학원 졸업이 사법시험 합격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언급했어야 했다. ‘과거 변호사들이 누리던 특권과 혜택이 유지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임’을 미리 확인해줬어야 했다. 입학 요강 수준의 기사가 돼서는 안 될 것이다.
‘루머 해명 기자회견, 또 하나의 나훈아 쇼’ 기사는 일간지 논설이었다. 가십성 루머를 쏟아냈던 언론의 갑작스러운 책임의식 발현인가? 정작 재미있는 나훈아 기자회견 쇼를 너무나 재미없게 만들었다. 비워도 비워도 채워지지 않는 노가수의 연예 열정을 대중의 마음속에 꽉 채우는 순간이었지만 기사는 그 맛을 몽땅 버렸다. 뒤늦게 채우려는 언론의 엄숙성이 마지막 쇼의 진정한 의미를 무색게 했다.
황상민 연세대 교수·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