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소설에 등장하는 ‘아Q’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루쉰의 동상(왼쪽)과 중국 옌볜 거리.
중국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에서 태어난 저우수런(周樹人)의 수필 ‘후지노 선생’에 실린 글이다. 그는 슬라이드 한 장으로 큰 충격을 받은 뒤 중국 인민의 육체적 병이 아니라 ‘정신적 병’을 치유하기 위해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1919년 37세 늦은 나이에 자신의 처녀작이자 중국 최초의 근대소설인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 루쉰(魯迅)이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노둔할 노(魯), 빠를 신(迅). 이 두 개의 모순적인 글자를 택한 까닭은 그의 개인사와 관계 있지만 그와 함께 어머니 성이 노나라 노(魯)씨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문학가 루쉰은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는 쌀쌀하게 눈썹 치켜세워 응대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머리 숙여 소가 되리라(橫眉冷對千夫指, 俯首甘爲孺子牛)”라면서 어린아이를 등에 태운 소처럼 느리게 걸었다. 그러나 ‘낡은 것’들을 만나면 붓을 창처럼 던졌다.
신해혁명 배경 중국 현대문학 거두 루쉰의 대표작
어머니 봉양에 방해될까봐 아이를 땅에 묻으려 한 곽거가 효(孝)의 대명사라면, ‘안사의 난’으로 성이 포위돼 식량이 떨어지자 첩을 죽여 군사에게 인육을 먹인 장순이 충(忠)의 대명사, 인육을 약용한다는 당나라 ‘본초습유(本草拾遺)’가 의학의 대명사인 양 행세하는 게 봉건시대였다. 루쉰은 ‘광인일기’에서 주위 사람과 형이 자신과 아이들을 잡아먹으려 한다는 피해망상증 환자의 자의식을 통해 중국의 낡은 사회와 가족제도, 그것을 지탱하는 인의도덕의 위선을 고발한다. 그리고 소설 ‘약’에서는 어린아이의 폐병을 혁명가의 피가 묻은 인혈 만두로 치료하는 미신 등이 바로 봉건질서라고 비판한다.
중국 현대문학의 대명사 ‘아Q 정전’(창비)도 낡은 것과의 싸움이었다. ‘아Q 정전’은 1910년대 웨이좡(未莊)이라는 중국 농촌에서 자오(趙) 씨 댁 날품팔이를 하는 이름도 성도 여자도 거처도 없는, 나두창이 난 대머리 아Q의 일대기다. 서술자는 냉정한 시선으로 아Q에게 일말의 동정도 베풀지 않는다. 아Q가 농민이기에 혁명적 에너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섣부르게 그를 완결적인 인간으로 그리지 않는다.
아Q는 강자인 자오 씨의 아들, 가짜 양놈, 왕털보 등에게 수없이 굴욕을 당하지만 ‘자식놈한테 얻어맞았다’‘군자는 말로 하지 손을 쓰지 않는다’‘망각은 조상 대대로의 보물’ 식으로 자위한다. 또는 자신의 뺨을 두 번 힘껏 때리고 마치 자신이 남을 때린 듯 의기양양해한다. 하지만 약자인 비구니나 하녀인 우마, 날품팔이 아돈을 죽자 사자 괴롭히는 한마디로 이중인격자다. 그는 우마에게 ‘같이 자자’고 희롱했다가 자오 씨 댁에서 쫓겨난 뒤 성내에서 좀도둑으로 지낸다.
다시 웨이좡으로 돌아와 장물을 팔면서 혁명에 관한 풍월을 읊자 자오 씨가 자신을 ‘라오Q(老Q)’라고 존대하는 것에 우쭐해 혁명세력인 척하면서 기세등등해한다. 계몽된 농민이 아니라, 혁명 쪽이 힘이 세니 그쪽에 의기투합하면 여자든 재물이든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속물적 욕심이 동기였다.
그런데 어느 날 자오 씨의 집을 습격한 도둑이라는 죄명으로 아Q가 체포된다. 자유당이라는 혁명당의 배지를 4푼에 사고 혁명세력에 무임승차한 지주 자오 씨 일가와 가짜 양놈 그리고 이미 보수화된 혁명당 세력이 도덕성 회복을 위한 본보기로 아Q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아Q 같은 민중은 근대적 사형 형태인 총살이 참수보다 시시하다고 불평한다.
루쉰과 동시대 작가인 수쉬에린은 아Q의 성격을 ‘정신승리법’으로 요약했다. 정신승리법이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봉건 치하 민중이 아무리 능멸을 당해도 결국은 자신이 이긴 것이라 자위하면서 노예적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또 하나는 약자에게 분풀이함으로써 굴욕감을 전가하거나, 낙후성과 노예 근성을 달게 인정하는 자아모멸과 자아환각으로 자신을 기만하는 정신의 허구적 승리다. “옛날에는 훌륭했다”고 말하기를 즐기는 (꼴에) 자존심 강한 아Q에게서 무지한 농민의 모습보다는 지식인을 포함한 전체 중국인 또는 중국의 상고주의를 연상할 수도 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우리 모두의 얼굴
1910년 루쉰이 사오싱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옆집 량(梁) 씨네 허물어진 담으로 웬 사람이 기어들어왔다. 루쉰이 살고 있는 신대문 동쪽 다이(戴) 씨 집에 사는 셰아구이(謝阿桂)였다. 아구이와 아유(阿有)는 다이 씨네서 함께 살았는데, 둘 다 생활이 방탕해 결국 아구이는 좀도둑이 되고 말았다. 나중에 집세를 물지 못하게 되자 주인집에서 쫓겨나 아구이는 갈 곳 없어 헤매다가 장경사(長慶寺) 맞은편 토지사당에 살았다. 그 뒤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사오싱에서도 봉기를 준비하자, 아구이는 신이 나서 거리로 뛰쳐나와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들의 때가 왔소! 내일이면 우리에게는 집도 생기고, 여편네도 생긴다오!” 아구이가 난데없이 이렇게 외치자 당시 사람들은 크게 놀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없었던 일이 되었다.
저우샤서우가 쓴 ‘루쉰 소설의 인물’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에 더해 왕스징 광시대학 중문과 교수는 ‘루쉰전’(다섯수레)에서 아마도 이 아구이가 루쉰이 구상해오던 아Q라는 인물의 첫 모델이었고, 나중에 여러 인물을 취해 한데 모아놓았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아Q 정전’의 배경인 신해혁명은 쑨원(孫文)의 주도하에 청나라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건립한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혁명이다. 그런데 1930년대 중반,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에드거 스노가 루쉰에게 물었다. “선생께서는 아Q가 현재도 이전과 같이 여전히 많다고 말하지는 않겠죠?” 루쉰은 이렇게 답했다. “상황이 이전보다 더욱 나쁩니다. 그들은 현재 국가를 관리하고 있어요.” 당시 혁명세력은 보수파인 위안스카이에게 청나라 황제를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정권을 넘겨줬지만 과거 황제의 노예였던 그 아Q가 관료, 지주, 매판계급과 손잡고 청나라 정부의 봉건통치를 대신하며 백성을 새롭게 노예화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즉 ‘아Q 정전’은 신해혁명의 패배를 다룬 소설이라는 게 루쉰의 말이다.
패배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 흥미로운 것은 ‘아Q 정전’이 1921년부터 신문 ‘천바오(晨報)’에 연재되자, 당시 상위계층의 명망가는 물론 일반 독자들도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자신을 욕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화들짝 놀랐다는 점이다. 다음은 1981년 루쉰 탄생 100주년을 맞아 만든 영화 ‘아Q 정전’의 마지막 내레이션이다.
“아Q는 죽었다. 그에게는 여자가 없었으나, 젊은 비구니가 욕했던 것처럼 자손이 끊이지 않았다. 집안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Q는 후손이 있으며 자자손손 번창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혁명가든, 루쉰 같은 작가든, 명망가든 누구라도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자신 안의 아Q를 죽일 수가 없기 때문에 막심 고리키는 ‘아Q 정전’을 읽으면서 자신 속의 아Q를 발견한 뒤 서글퍼서 또는 무서워서 운 게 아닐까. 섬뜩하게도 번식력이 왕성한 불사(不死) 인간인 아Q는 우리 모두의 얼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