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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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도는 걸림이 없다”

  •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05-10-17 09: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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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선종의 3조는 승찬(?~606) 스님이다. 그의 스승인 2조 혜가 스님은 제자의 머리를 깎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나의 보배다. 법을 이어받는 구슬이라는 의미로 승찬(僧璨)이라 하라.”

    당시 승찬은 문둥병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출가 2년 후쯤에는 완치돼 스승을 시봉할 수 있게까지 되었다.

    어느 날 혜가 스님은 승찬에게 옷과 법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숨거라. 바삐 교화에 나서지 말라. 머지않아 국난이 있을 것이다.”



    승찬 스님은 스승의 말대로 서주(舒州) 환공산(晥公山)에 들어가 은거했다.

    승찬이 출가한 때는 참으로 어려운 시대였다. 420년경 중국에 남북조시대가 열리면서 무려 200여년에 걸쳐 왕조의 흥망성쇠가 일어났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이 시기 불교는 대부분 기복적인 불사에 치중했고, 교단은 국가권력과 밀착해 위세를 과시하는 데 급급했다. 먹고살기 힘든 백성들은 대승불교 사상의 높은 이상보다는 주술적이고 현세 중심적인 불교를 선호했다.

    게다가 6세기 후반에는 북주(北周) 무제(武帝, 561∼578)가 승려들을 죽이고 절을 불태우는 전대미문의 폐불을 저질렀다. 스승 혜가 스님은 앞으로 닥칠 혼란의 와중에 제자에게 몸을 숨길 것을 권한 것이다.

    승찬 스님은 비록 산으로 들어갔으나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순화되고 축적된 불교적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일을 했다. 선시(禪詩) ‘신심명(信心銘)’을 남긴 것이다. 신심명은 사언절구(四言絶句)의 시문(詩文)으로 전체 146구 584자로 구성된 소품이지만 내포하고 있는 선지(禪旨)나 사상의 심오함으로 예로부터 선가의 귀감으로 애송돼왔다.

    ‘신심명’은 중국 초기 선의 중심 문제인 불성(佛性)을 중도(中道)의 공(空)사상에 입각해 설명하고 있다. ‘지극한 도는 걸림이 없는 것, 분별하는 일을 싫어한다. 미움도 사랑도 없으면 모든 것이 명백하다’는 구절처럼 미움과 사랑, 옳음과 그름, 선과 악, 이른바 흑백논리에 입각한 어느 한쪽에 치우진 견해를 갖지 않아야 한다는 당부다.

    지금 보면 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승찬 스님의 생각은 혁명적인 것이다. 1조 달마 스님과 2조 혜가 스님이 설한 ‘마음의 문제’라는 생각의 혁명을 이어, 처음으로 ‘깨달음이란 어떤 마음 상태인가’를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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