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교육원에서 과학 실험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들.
2003년 한국교육개발원이 1980년 전후로 태어난 영재 81명의 대학 진학 여부를 추적한 것을 보면 이른바 SKY로 불리는 최상위권 대학 진학자는 16명(19.8%)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중위권 이하의 대학에 진학했으며 고교만 마쳤거나 대입 재수생도 10명(12.4%)이나 됐다. 현재의 획일화된 교육 시스템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영재라도 범재, 심지어 둔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자조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송유근 군 등 나이 어린 영재들이 주목을 받으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영재교육의 필요성과 가치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듯 보인다. 교육인적자원부에서도 2002년 3월부터 영재교육진흥법을 시행하는 등 영재아 발굴 및 육성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의 영재교육은 아직 발아하진 않았지만 싹을 틔울 기반은 마련되고 있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영재교육진흥법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서 시행되는 영재교육 유형은 각 시·도 교육청과 대학 등이 운영하는 영재교육원과 초·중·고교에 설치된 영재학급, 그리고 영재학교 등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영재학교만 정규 과정이고 영재교육원이나 영재학급은 방과 후나 주말, 방학 등에 시행되는 비정규 과정이다. 영재교육 수혜자는 대략 2만5000명 정도. 2010년까지 전체 초·중·고생의 1%인 8만명까지 대상을 늘린다는 게 교육인적자원부의 목표다. 교육 내용도 현재까지는 수학, 과학 위주(전체의 83%)였지만 점차 예체능, 정보, 언어, 사회, 문화 등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다음은 교육인적자원부 과학기술과 남현우 연구사의 설명이다.
유치원생 대상 영재학교·교육원 입시 위한 사교육 ‘부작용’
“영재아들은 일반 교육과정을 밟기 어려운 아이들이다. 따라서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별도의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해주는 게 영재교육의 목표다. 아이마다 영재성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만큼 각 아이들에게 맞는 개별화 맞춤식 교육을 하는 방향으로 프로그램을 개발, 진행하고 있다. 또 과학영재학교의 증설은 물론 예술영재학교, 정보영재학교 등의 설립도 검토하고 있다.”
정규 과정인 영재학교는 부산에 위치한 한국과학영재학교가 유일하다. 이 학교는 1단계 서류전형, 2단계 수학 및 과학에 대한 문제 해결능력을 평가해 정원의 1.5배수를 뽑는다. 그리고 3박4일간 과학캠프를 열어 지원자의 영재성을 면밀히 살핀 뒤 학생을 선발한다. 한국과학영재학교 김기순 기획과장은 “수학·과학이 아닌 다른 과목의 성적은 전혀 평가 기준이 아니다. 서류전형에서도 이 분야의 성적과 교사들의 평가 내용만을 본다. 수재가 아닌 수학·과학 분야 영재를 선발한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이 직접 수강 과목을 선택해 들으면 되는데, 우수 학생의 경우 대학 1~2학년 과정의 필수 교과를 들을 수 있다. 협약 기관인 한국과학기술원과 포항공대에서는 최대 40학점까지 인정해준다.
영재교육원은 교육기관마다 선발 방식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1차 학교 추천, 2차 창의적 문제 해결력 검사, 3차 수행평가 및 심층 면접으로 이뤄진다. 20명 모집에 500여명이 몰려들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공교육에서의 영재교육은 아직 걸음마 단계인 만큼, 부족한 측면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바로 선발 도구의 정확성 및 신뢰성 문제. 한 분야의 영재가 아닌 ‘전교 1등’의 수재를 뽑으려 한다, 시험에 창의성과 사고력을 요하는 문제가 아닌 선행학습을 해야만 풀 수 있는 내용이 출제된다는 등의 논란이 일고 있다.
취재 중 만난 한 영재교육원 원장은 “우리로서도 다방면에서 살펴본 뒤 영재성을 가진 아이들을 뽑고 싶지만, 워낙 지원자가 많을 뿐더러 부모들 역시 애매모호할 수 있는 주관적 평가보다는 명확한 점수가 나오는 시험 형태를 선호한다. 객관적인 점수가 없을 경우 떨어진 학생들의 부모들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하기도 한다”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영재학교 또는 영재교육원 입시를 위한 사교육 열기를 낳는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물론 제대로 영재교육을 하는 기관에서 교육을 받는 거야 문제가 없겠지만, 서울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부는 영재교육 바람은 이미 ‘광풍’ 수준으로 올라섰다. 상당수 유치원들은 ‘영재교육’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고, 초·중등학생 대상의 사설 영재교육기관은 영재교육원 입학 및 특수목적고 입시와 연계돼 있다. 한 사설 영재학원 원장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2005년도 국가영재교육기관 입학생 중 40%가 우리 학원 출신”이라고 자랑했다. 이런 현상은 영재교육원을 수료하면 과학고등학교 등 특수목적고 입시에 혜택을 받기 시작하면서 더욱 심화됐다.
좋은 고교·대학 진학 위한 통과의례로 생각하기도
서울대 과학영재교육센터 최승언 센터장은 “솔직히 이런 메리트가 없었을 때 영재교육이 더 잘 이뤄졌다. 그때는 순수하게 과학을 좋아하는 아이들만 모여들었지만 지금은 좋은 고등학교, 더 나아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이곳에서 공부하려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또 지원자가 급증하다 보니 우리로서도 옥석을 가리는 게 더욱 힘들어졌다. 교육부에 이 제도를 없애라고 여러 차례 요구하는 중”이라고 강조했다. 또 “입학생의 60~70%가 사설 영재학원을 전혀 다니지 않은 아이들”이라며 “전문성이 없는 사설기관이 하는 반복적인 선행학습은 창의적 문제 해결력 제고에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우여곡절 끝에 영재교육 대상으로 선발된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존재한다. 우선 대다수 비정규 과정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교육시간이 매우 부족하다. 영재학교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영재 교육기관에서는 1년에 100시간 정도 교육이 진행된다. 조석희 한국영재교육원장은 “하루 종일 수업한다고 가정할 때 100시간은 2주일이면 끝난다. 반면 미국 등 선진국에선 영재아들을 대상으로 1년에 대략 1700시간의 전문 교육을 한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영재교육 강도는 무척 약한 편”이라면서 “영재교육이 정규 과정으로 인정되면 이런 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조석희 원장의 설명이다.
“영재교육을 평준화 교육과 상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다른 교육은 그대로 받게 하되 남들과 다른 잠재력을 갖고 있는 학생들에게 그 한 분야에 관해서만 아이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교육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영재교육의 방법도 다양해져야 한다. 개별 학생의 특성에 맞춰 상설 영재학급에 들어가게 할 수도 있고, 주기적으로 영재교육을 받게 할 수도 있으며, 오랜 기간 전문가에게 일대일 개별 지도를 받게 할 수도 있어야 한다.”
내년 3월 시행을 목표로 개발되고 있는 과학신동교육프로그램은 앞서 지적한 문제점을 어느 정도 개선할 것으로 기대된다(상자기사 참고). 어찌 보면 모든 교육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는 훌륭하다. 문제는 어떻게 운영하느냐다. 경직된 교육제도 및 교육행정가, 자질이 부족한 전문가, 취지와 상관없이 영재교육을 입시용으로 전락시키는 학생, 그리고 자녀에게 영재성이 없음에도 무조건 영재교육을 시키려는 부모들이 있는 한 어떤 프로그램도 성공하긴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