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1876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뒤, 가업을 잇지 않고 83년 신비의 땅 도쿄로 떠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연치 않게 조선사절단에 채용됐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통해 그는 조선의 ‘보빙사(報聘使)’에 의해 고용된 것이 아니라, 일본대사관이 그를 조선사절단에 딸려 보낸 것으로 확인했다. 로웰천문대 구내매점에서 접한 그의 전기에 분명히 그렇게 기록돼 있었다. 일본대사관이 조선의 사절단을 도와주기 위해 ‘비서 겸 고문(foreign secretary and counselor)’으로 그를 채용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조선 정부가 로웰의 수행 비용을 부담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소견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 76년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처음 나라의 문을 연 해였다. 이른바 강화도조약으로 굳게 닫혔던 조선 왕국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로부터 6년 뒤 조선은 미국을 시작으로 서양과 교류를 시작한다. 82년 미국과 체결한 조약인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은 미국이 파견한 조선 주재 미국공사 푸트에 의해서, 조선이 그에 대한 답례로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보빙사로 명명된 이 사절단엔 민비의 조카 민영익(1860~1914)과 홍영식(1855~84), 서광범(1859~97)이 선발됐다(5명의 수행원은 유길준, 고영철, 변수, 현흥택, 최경석 등이다).
로웰은 이 보빙사를 따라다니며 통역 등 잡다한 일을 도왔다. 그 결과 유길준이 미국에 유학생으로 남게 됐고, 이때 미국에서의 깊은 인상이 사절단에 큰 영향을 주어 수행원 최경석이 조선에서 최초의 서양식 농장인 ‘농무목축시험장’을 만들어 시험하기도 한다. 또 미국 우편제도의 영향을 받아 조선의 첫 근대식 우편제도 개혁 노력이 진행되어 84년 우정국(郵政局)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개화사상의 원동력이 된 문화 충격이 바로 이 여행을 통해 이뤄졌다고 하겠다.
로웰이 세계적 천문학자라지만, 사실 조선의 보빙사를 따라 미국을 순회할 때만 해도 그는 천문학자가 아니었다. 학창 시절 수학을 잘했다는 정도일 뿐 천문학에 관심을 보였는지도 잘 알 수 없다. 하긴 당시만 해도 천문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망원경을 갖고 일본에 당도했을 정도로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84년 초 조선을 떠난 로웰은 세계를 유람하다 연말에 고향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그가 일본과 조선에 대한 여행기를 ‘애틀랜틱 먼쓰리(Atlantic Monthly)’이란 잡지에 기고하고 네 권의 책으로 출간했는데, 그 첫 번째가 ‘조선-조용한 아침의 나라(1886)’이고. 나머지는 일본에 관한 책으로 ‘극동의 정신(The Soul of the Far East, 1888)’, ‘능등(能登ㆍNoto, 1891)’, ‘신비로운 일본(Occult Japan, 1894)’이다.
그가 책에 소개한 신비의 땅 노토반도는 일본 혼슈 북방의 가나자와(金澤)시 북쪽,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이시카와(石川)현의 아나미즈(穴水)가 된다. 지금 로웰천문대에는 바로 이 지방정부가 81년 아나미즈에 세운 것과 똑같은 모양의 로웰기념비를 세워놓고 있다. ‘화성연구가 퍼시벌 로웰과 아나미즈’란 제목의 기념비인데, 우리는 로웰을 잊었지만 일본인들은 로웰을 기억하고 있었다.(계속)
그가 대학을 졸업한 76년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처음 나라의 문을 연 해였다. 이른바 강화도조약으로 굳게 닫혔던 조선 왕국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로부터 6년 뒤 조선은 미국을 시작으로 서양과 교류를 시작한다. 82년 미국과 체결한 조약인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은 미국이 파견한 조선 주재 미국공사 푸트에 의해서, 조선이 그에 대한 답례로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보빙사로 명명된 이 사절단엔 민비의 조카 민영익(1860~1914)과 홍영식(1855~84), 서광범(1859~97)이 선발됐다(5명의 수행원은 유길준, 고영철, 변수, 현흥택, 최경석 등이다).
로웰은 이 보빙사를 따라다니며 통역 등 잡다한 일을 도왔다. 그 결과 유길준이 미국에 유학생으로 남게 됐고, 이때 미국에서의 깊은 인상이 사절단에 큰 영향을 주어 수행원 최경석이 조선에서 최초의 서양식 농장인 ‘농무목축시험장’을 만들어 시험하기도 한다. 또 미국 우편제도의 영향을 받아 조선의 첫 근대식 우편제도 개혁 노력이 진행되어 84년 우정국(郵政局)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개화사상의 원동력이 된 문화 충격이 바로 이 여행을 통해 이뤄졌다고 하겠다.
로웰이 세계적 천문학자라지만, 사실 조선의 보빙사를 따라 미국을 순회할 때만 해도 그는 천문학자가 아니었다. 학창 시절 수학을 잘했다는 정도일 뿐 천문학에 관심을 보였는지도 잘 알 수 없다. 하긴 당시만 해도 천문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망원경을 갖고 일본에 당도했을 정도로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84년 초 조선을 떠난 로웰은 세계를 유람하다 연말에 고향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그가 일본과 조선에 대한 여행기를 ‘애틀랜틱 먼쓰리(Atlantic Monthly)’이란 잡지에 기고하고 네 권의 책으로 출간했는데, 그 첫 번째가 ‘조선-조용한 아침의 나라(1886)’이고. 나머지는 일본에 관한 책으로 ‘극동의 정신(The Soul of the Far East, 1888)’, ‘능등(能登ㆍNoto, 1891)’, ‘신비로운 일본(Occult Japan, 1894)’이다.
그가 책에 소개한 신비의 땅 노토반도는 일본 혼슈 북방의 가나자와(金澤)시 북쪽,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이시카와(石川)현의 아나미즈(穴水)가 된다. 지금 로웰천문대에는 바로 이 지방정부가 81년 아나미즈에 세운 것과 똑같은 모양의 로웰기념비를 세워놓고 있다. ‘화성연구가 퍼시벌 로웰과 아나미즈’란 제목의 기념비인데, 우리는 로웰을 잊었지만 일본인들은 로웰을 기억하고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