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2일 치러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의회 선거는 제1야당인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의 압승으로 끝났다. 1960년대 ‘라인강의 기적’을 보여주었던 루르 공업단지가 위치한 이 주는 집권 사민당의 발원지와도 같은 곳으로, 지난 39년간 사민당이 독주한 ‘사민당 표밭’이었다.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 사민당의 패배는 뼈아픈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선거가 종결된 직후인 22일 저녁, 정부와 여당이 느닷없이 조기 총선을 제안하면서 독일은 또다시 선거 국면에 들어서게 됐다. 슈뢰더 총리는 6월 안으로 연방의회에 자신의 재신임 안건을 제출해 7월1일 표결에 부칠 것이며, 거기서 불신임되면 곧바로 의회를 해산하고 9월 중순경 총선을 치른다는 구체적인 일정까지 발표했다. 원래 예정된 총선은 2006년 가을인데, 1년이나 앞당긴 셈이다. 사민당 당수인 뮌터페링 또한 이런 슈뢰더의 제안에 동조하고 있다. 뮌터페링은 “대다수의 주가 야당 지배에 들어갔다”면서 “따라서 각 주의 대표자들로 구성되는 상원을 야당이 석권하여 국정을 효과적으로 끌고 나가기 어려운 마당에 총리의 재신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콜 총리에게 발탁돼 여성·환경부 장관 역임
이렇게 해서 현재 독일은 조기 총선 정국을 맞았다. 그렇다면 누가 차기 주자가 될까? 현 추세론 기민련의 절대적 강세가 지속되리라고 예상되기 때문에 언론들은 앙겔라 메르켈이라는, 50세를 갓 넘긴 동독 출신 여성을 유력 주자로 조명하고 있다.
54년 7월 서독 함부르크에 있는 외갓집에서 태어난 메르켈의 원래 이름은 앙겔라 도로테아 카스너. 생후 2개월 뒤 그녀는 아버지가 개신교 목사 사역을 하던 동독의 베를린 북쪽 템플린이란 작은 마을로 어머니와 함께 돌아가 소박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철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분단은 그녀에게 이산가족의 아픔으로 다가왔다. 당시 서독 주민들은 비교적 쉽게 비자를 발급받아 동독을 방문할 수 있었지만, 동독 주민들의 여행은 제한돼 있었다. 그래서 여름이면 함부르크에 사는 외할머니가 동독으로 왔다가 가곤 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가족은 베를린의 ‘눈물의 궁전(독일의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의 경계인 프리드리히 거리의 역 건물 입구를 일컫는 말)’까지 할머니를 배웅하며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메르켈은 청소년기부터 정치적 성격을 띤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독일이 통일되던 90년까지 연구원 생활을 했다. 대학생이던 77년 동료 학생 울리히 메르켈과 결혼하여 앙겔라 메르켈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82년 이혼했고, 98년 대학교수인 요아힘 자우어와 재혼했지만 메르켈이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연구원 시절 메르켈의 동료 중에는 동독 비밀경찰에 연구원들의 동태를 몰래 보고하던 프랑크 슈나이더라는 사람이 있었다. 슈나이더의 보고 내용 중에는 ‘82년 러시아 공군이 사할린 영공에 들어온 한국의 대한항공 여객기를 격추해 탑승객 269명이 모두 목숨을 잃은 소식을 접하고 메르켈이 몹시 분개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메르켈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한 때는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부터다. 동독 정권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던 많은 동독 인사들은 서독의 진보정당인 사민당이나 녹색당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메르켈은 그러지 않았다. 이들 정당에서 동료를 일컬어 사용하는 ‘동지(Genossen)’란 호칭이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메르켈은 대신 동독의 민주화 운동단체였던 ‘민주변혁’에 가입했다. 이 단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기민련에 편입되었다.
90년 겨울, 통일 독일 연방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에서 메르켈은 기민련 후보로 동독 지역인 뤼겐에서 출마하여 당선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독일 정가에서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메르켈은 헬무트 콜 총리에게 발탁되어 여성부 장관과 환경부 장관을 연이어 맡았다. 98년 기민련이 총선에서 패배한 직후에는 당 최초의 여성 사무총장에 지명됐다. 당시 기민련은 17년 동안 지켜온 정권을 내줌으로써 극도의 박탈감에 싸여 분위기 쇄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터지기 시작한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은 당을 끝없는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이때 사무총장을 지낸 메르켈은 자신의 ‘정치적 아버지’나 다름없는 콜 총리를 처음에는 변호하다가 치명적인 문제점이 하나 둘씩 드러나자 태도를 바꾸어 ‘탯줄 끊기’ 작업을 시도했다. 콜의 당수직 사퇴와 정계 은퇴를 주장한 것. 이것은 당내에서 일종의 배신행위로까지 여겨졌다. 이 일로 인해 메르켈에게 등을 돌린 당내 정적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콜에 이어서 당수 자리에 오른 이는 볼프강 쇼이블레였다. 그러나 그 역시도 정치자금 문제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얼마 못 가 낙마했다. 메르켈은 쇼이블레의 뒤를 이어 2000년 4월 당수 자리에 올랐다.
중도 보수노선을 표방하는 기민련의 주류는 가톨릭 신앙을 가진 서남부 지방 남자 정치인들이다. 그런 탓에 정치 경험도 일천한 데다 개신교도이며 촌스런 스타일의 동독 출신 여성이 일인자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움직임이 당내에서 끊임없이 있어왔다. 특히 기민련 청년단 출신의 엘리트 정치인인 크리스티안 불프 니더작센 주지사, 롤란트 고흐 헤센 주지사 등은 언제나 메르켈의 잠재적인 라이벌로 비쳤다. 기민련 원내총무를 역임했던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사사건건 메르켈을 물고 늘어졌다. 기민련의 자매정당인 바이에른 주 기사련의 당수이자 영원한 대권주자인 에드문트 슈토이버 역시 메르켈로서는 버거운 상대였다.
2002년 총선 무렵, 기민련과 기사련이 집권 사민당보다 높은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어서 정권교체가 유력해 보였다. 그러나 메르켈은 슈토이버와의 조찬 회동 이후 돌연 총리 후보 경선 대열에서 물러섰다. 둘 중 한 사람이 슈뢰더와 대결해야 하는데, 메르켈보다 슈토이버의 여론 지지도가 더 높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야당은 높은 지지도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선거 막판에 반미 감정을 부추기며 이라크전쟁 파병 거부를 부르짖은 사민당-녹색당 연합에 막판 역전을 당하고 만다.
슈뢰더 조기 총선 잔꾀는 ‘자충수?’
이번에 갑작스럽게 조기 총선을 제안한 슈뢰더 총리의 속셈도 여기에 있다고 정치평론가들은 진단한다. 기록적인 실업률과 어정쩡한 개혁 정책으로 민심이 극도로 나빠진 상황인 데다 급기야 사민당 텃밭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를 내주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총리 후보 간의 인물 대결이 전면에 부상되는 총선 정국에서는 상황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유력 정치인들 간의 역학관계가 확실히 정리되지 않은 야당이 경선 과정에서 후보들끼리 상처를 주고받을 것이며, 누가 본선에 올라오든 자신과 견줄 만한 중량감 있는 인물은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슈뢰더의 ‘잔꾀’는 결국 자충수가 될 것이라고 많은 이들은 전망한다. 그가 너무나도 촉박한 일정의 조기 총선을 제안하는 바람에, 야당의 ‘잠룡’들은 모략을 꾀할 여지조차 상실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메르켈에게 힘을 모아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불프와 고흐 지사는 슈뢰더의 정치 일정 제안이 발표된 직후 메르켈 지지를 선언했다. 5월30일 기민련-기사련 최고회의에서 슈토이버는 메르켈이 올가을 총선에서 총리 후보로 나설 것이 만장일치로 결정되었음을 선언했다. 여러 매체에서 시행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강경 보수와 친미를 표방하는 그녀에게 반감을 가진 독일 국민들도 여전히 많다. 그러나 이변이 없는 한 올가을 독일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를 보게 될 것이라고 공통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여러 면에서 불리한 조건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치 입문 15년 만에 국가권력의 최고 자리를 노리는 앙겔라 메르켈. 현재 독일은 그녀와 함께 새로운 역사를 쓰는 중이다. 과연 그녀가 올가을 선거에서 승리하여 백약이 무효했던 ‘독일병’을 치료하는 ‘독일의 잔다르크’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그런데 선거가 종결된 직후인 22일 저녁, 정부와 여당이 느닷없이 조기 총선을 제안하면서 독일은 또다시 선거 국면에 들어서게 됐다. 슈뢰더 총리는 6월 안으로 연방의회에 자신의 재신임 안건을 제출해 7월1일 표결에 부칠 것이며, 거기서 불신임되면 곧바로 의회를 해산하고 9월 중순경 총선을 치른다는 구체적인 일정까지 발표했다. 원래 예정된 총선은 2006년 가을인데, 1년이나 앞당긴 셈이다. 사민당 당수인 뮌터페링 또한 이런 슈뢰더의 제안에 동조하고 있다. 뮌터페링은 “대다수의 주가 야당 지배에 들어갔다”면서 “따라서 각 주의 대표자들로 구성되는 상원을 야당이 석권하여 국정을 효과적으로 끌고 나가기 어려운 마당에 총리의 재신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콜 총리에게 발탁돼 여성·환경부 장관 역임
이렇게 해서 현재 독일은 조기 총선 정국을 맞았다. 그렇다면 누가 차기 주자가 될까? 현 추세론 기민련의 절대적 강세가 지속되리라고 예상되기 때문에 언론들은 앙겔라 메르켈이라는, 50세를 갓 넘긴 동독 출신 여성을 유력 주자로 조명하고 있다.
54년 7월 서독 함부르크에 있는 외갓집에서 태어난 메르켈의 원래 이름은 앙겔라 도로테아 카스너. 생후 2개월 뒤 그녀는 아버지가 개신교 목사 사역을 하던 동독의 베를린 북쪽 템플린이란 작은 마을로 어머니와 함께 돌아가 소박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철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분단은 그녀에게 이산가족의 아픔으로 다가왔다. 당시 서독 주민들은 비교적 쉽게 비자를 발급받아 동독을 방문할 수 있었지만, 동독 주민들의 여행은 제한돼 있었다. 그래서 여름이면 함부르크에 사는 외할머니가 동독으로 왔다가 가곤 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가족은 베를린의 ‘눈물의 궁전(독일의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의 경계인 프리드리히 거리의 역 건물 입구를 일컫는 말)’까지 할머니를 배웅하며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메르켈은 청소년기부터 정치적 성격을 띤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독일이 통일되던 90년까지 연구원 생활을 했다. 대학생이던 77년 동료 학생 울리히 메르켈과 결혼하여 앙겔라 메르켈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82년 이혼했고, 98년 대학교수인 요아힘 자우어와 재혼했지만 메르켈이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연구원 시절 메르켈의 동료 중에는 동독 비밀경찰에 연구원들의 동태를 몰래 보고하던 프랑크 슈나이더라는 사람이 있었다. 슈나이더의 보고 내용 중에는 ‘82년 러시아 공군이 사할린 영공에 들어온 한국의 대한항공 여객기를 격추해 탑승객 269명이 모두 목숨을 잃은 소식을 접하고 메르켈이 몹시 분개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메르켈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한 때는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부터다. 동독 정권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던 많은 동독 인사들은 서독의 진보정당인 사민당이나 녹색당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메르켈은 그러지 않았다. 이들 정당에서 동료를 일컬어 사용하는 ‘동지(Genossen)’란 호칭이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메르켈은 대신 동독의 민주화 운동단체였던 ‘민주변혁’에 가입했다. 이 단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기민련에 편입되었다.
90년 겨울, 통일 독일 연방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에서 메르켈은 기민련 후보로 동독 지역인 뤼겐에서 출마하여 당선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독일 정가에서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메르켈은 헬무트 콜 총리에게 발탁되어 여성부 장관과 환경부 장관을 연이어 맡았다. 98년 기민련이 총선에서 패배한 직후에는 당 최초의 여성 사무총장에 지명됐다. 당시 기민련은 17년 동안 지켜온 정권을 내줌으로써 극도의 박탈감에 싸여 분위기 쇄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터지기 시작한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은 당을 끝없는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이때 사무총장을 지낸 메르켈은 자신의 ‘정치적 아버지’나 다름없는 콜 총리를 처음에는 변호하다가 치명적인 문제점이 하나 둘씩 드러나자 태도를 바꾸어 ‘탯줄 끊기’ 작업을 시도했다. 콜의 당수직 사퇴와 정계 은퇴를 주장한 것. 이것은 당내에서 일종의 배신행위로까지 여겨졌다. 이 일로 인해 메르켈에게 등을 돌린 당내 정적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콜에 이어서 당수 자리에 오른 이는 볼프강 쇼이블레였다. 그러나 그 역시도 정치자금 문제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얼마 못 가 낙마했다. 메르켈은 쇼이블레의 뒤를 이어 2000년 4월 당수 자리에 올랐다.
중도 보수노선을 표방하는 기민련의 주류는 가톨릭 신앙을 가진 서남부 지방 남자 정치인들이다. 그런 탓에 정치 경험도 일천한 데다 개신교도이며 촌스런 스타일의 동독 출신 여성이 일인자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움직임이 당내에서 끊임없이 있어왔다. 특히 기민련 청년단 출신의 엘리트 정치인인 크리스티안 불프 니더작센 주지사, 롤란트 고흐 헤센 주지사 등은 언제나 메르켈의 잠재적인 라이벌로 비쳤다. 기민련 원내총무를 역임했던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사사건건 메르켈을 물고 늘어졌다. 기민련의 자매정당인 바이에른 주 기사련의 당수이자 영원한 대권주자인 에드문트 슈토이버 역시 메르켈로서는 버거운 상대였다.
2002년 총선 무렵, 기민련과 기사련이 집권 사민당보다 높은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어서 정권교체가 유력해 보였다. 그러나 메르켈은 슈토이버와의 조찬 회동 이후 돌연 총리 후보 경선 대열에서 물러섰다. 둘 중 한 사람이 슈뢰더와 대결해야 하는데, 메르켈보다 슈토이버의 여론 지지도가 더 높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야당은 높은 지지도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선거 막판에 반미 감정을 부추기며 이라크전쟁 파병 거부를 부르짖은 사민당-녹색당 연합에 막판 역전을 당하고 만다.
슈뢰더 조기 총선 잔꾀는 ‘자충수?’
이번에 갑작스럽게 조기 총선을 제안한 슈뢰더 총리의 속셈도 여기에 있다고 정치평론가들은 진단한다. 기록적인 실업률과 어정쩡한 개혁 정책으로 민심이 극도로 나빠진 상황인 데다 급기야 사민당 텃밭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를 내주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총리 후보 간의 인물 대결이 전면에 부상되는 총선 정국에서는 상황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유력 정치인들 간의 역학관계가 확실히 정리되지 않은 야당이 경선 과정에서 후보들끼리 상처를 주고받을 것이며, 누가 본선에 올라오든 자신과 견줄 만한 중량감 있는 인물은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슈뢰더의 ‘잔꾀’는 결국 자충수가 될 것이라고 많은 이들은 전망한다. 그가 너무나도 촉박한 일정의 조기 총선을 제안하는 바람에, 야당의 ‘잠룡’들은 모략을 꾀할 여지조차 상실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메르켈에게 힘을 모아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불프와 고흐 지사는 슈뢰더의 정치 일정 제안이 발표된 직후 메르켈 지지를 선언했다. 5월30일 기민련-기사련 최고회의에서 슈토이버는 메르켈이 올가을 총선에서 총리 후보로 나설 것이 만장일치로 결정되었음을 선언했다. 여러 매체에서 시행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강경 보수와 친미를 표방하는 그녀에게 반감을 가진 독일 국민들도 여전히 많다. 그러나 이변이 없는 한 올가을 독일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를 보게 될 것이라고 공통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여러 면에서 불리한 조건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치 입문 15년 만에 국가권력의 최고 자리를 노리는 앙겔라 메르켈. 현재 독일은 그녀와 함께 새로운 역사를 쓰는 중이다. 과연 그녀가 올가을 선거에서 승리하여 백약이 무효했던 ‘독일병’을 치료하는 ‘독일의 잔다르크’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