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거포에서 롯데 공격의 핵으로 부상한 롯데의 4번 타자 이대호 선수.
3월29일 프로야구 개막을 앞두고 열린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롯데 자이언츠 양상문 감독의 재치 있는 말이다. 4년 연속 꼴찌였던 롯데 양 감독의 이 한마디는 최강 삼성 라이온즈를 향한 선전포고이자, ‘야구의 도시’ 부산의 잃어버린 명성을 되찾고자 하는 간절한 다짐이었다. 양 감독은 “이기는 야구로 부산 야구 열기를 끌어올린 뒤, 이를 다시 전국으로 전파하겠다”는 포부를 덧붙이기도 했다.
양 감독의 굳은 의지처럼 프로야구가 개막되자 롯데는 힘있고 재밌는 야구로 무장해 프로야구판에 활기와 신바람을 불어넣었다. 롯데의 부활은 야구팬들은 물론 각 구단 코칭스태프, 프런트, 선수 할 것 없이 올 시즌 최고의 화두로 떠올랐다.
롯데의 활약을 가장 함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미쳤다!”라는 감탄사다. 지난해보다 특별히 나아진 것도 없는 팀이 무서운 뚝심으로 돌풍을 주도하는 모습에서 ‘대단하다’는 의미를 더욱 강한 어조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롯데를 계속 주시해오던 야구팬들이나 구단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관계자들의 평가는, 롯데 돌풍은 예견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마디로 롯데가 프로야구 개막 전부터 미칠 준비를 끝내고, 플레이 볼(play ball·심판자가 경기의 개시를 명령하는 말)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것이다.
롯데는 3월27일 7승2무3패를 기록하며 기아와 삼성을 따돌리고 시범경기에서 1위에 오르며 돌풍의 가능성을 살며시 내비쳤다. 시범경기에서 1992년, 95년, 97년, 2000년에 이어 5번째 1위를 차지한 것. 92년과 99년은 롯데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해였고 95년에는 준우승, 2000년은 매직리그 1위로 7개 구단 중 최고 승률(8할)을 기록했던 해다.
롯데는 또 시범경기에서 8개 구단 중 최고인 2.17의 팀 방어율로 마운드의 높이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집중력을 가미한 공격력, 안정된 수비, 다양한 신인 선수들의 등용으로 팀의 활기를 불어넣는 등 전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롯데 용병 타자 라이온이 홈을 밟은 뒤 더그아웃에서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2003년 10월 2년간 3억6000만원에 롯데의 지휘봉을 잡은 양 감독은 “고향 팀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겠다”며 “지금 당장보다는 2~3년 후를 생각해 가능성 있는 젊은 선수를 적극 활용할 생각”이라고 비전을 제시한 바 있다. 특히 “아무리 신인이라 할지라도 최소 100경기 이상 내보내 경험을 쌓도록 하겠다”고 강조하며 팀 개편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투수 손민한은 시즌 개막을 앞둔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4강이 아닌 우승이 목표”라고 거침없이 공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직·간접적인 힌트도 최하위를 모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낱 가능성으로 치부됐던 것이 사실이다. 누구도 롯데를 우승 전력으로 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감히 4강 전력이라는 말조차 꺼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건 야구 해설위원들. 하일성, 박노준 등 대표 해설위원들은 롯데를 하위권으로 꼽은 바 있다.
롯데의 시즌 출발은 불안했다. 4월2일 롯데는 2승6패를 기록하며 하위권으로 처졌다. 주위에서는 “그럼 그렇지”라며 비아냥거리기 시작했고, 롯데 선수단도 그렇게 예년을 답습해가는 듯했다.
그러나 롯데는 이후 계속해서 5할 이상의 주간성적으로 상승곡선을 그려갔고, 4월23일 SK전부터 29일 LG전까지 6연승을 달리며 ‘거인’의 부활을 확실히 알렸다. 6연승은 99년 9월19일부터 10월5일 이후 처음이었다. 롯데는 올 시즌 투타에서 눈에 띄게 바뀐 선수는 없다. 그때 그 선수들이 그대로 경기장에서 뛰고 달리고 있다. 하지만 롯데 담당 기자들을 비롯한 주위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투수진의 부활을 롯데 돌풍의 가장 큰 핵심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까지 롯데는 손민한, 주형광, 염종석 등이 부상으로 신음하며 에이스 부재에 시달렸다. 중간계투는 말할 것도 없고 확실한 마무리도 없이 근근이 팀을 꾸려왔다. 그러나 올해 에이스 손민한이 돌아온 것은 물론 염종석이 재활에 성공했고, 풍부한 젊은 어깨들이 대거 두각을 나타내면서 숨통이 확실히 트였다.
4월 6연승 부활 신호탄 … 젊은 어깨 맹활약
또한 이용훈이라는 숨겨진 보물을 발견해 마운드 높이를 확실히 올렸다. 손민한은 5월17일 삼성전에서 7.2이닝 동안 3피안타 1볼넷 6삼진 1실점으로 7승을 거두며 19일 현재 다승 부문 단독 1위를 달리고 있고, 이용훈은 4승에 불과하지만 경기를 치를수록 상대 타선을 압도해나가고 있다.
특히 손민한과 이용훈은 같은 방을 쓰고 있는 룸메이트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끌고 있다. 이용훈은 “그동안 야구를 하면서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며 “(손)민한이 형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고 경기를 할수록 자신감이 생긴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제 2의 호세로 불리는 펠로우.
MBC-ESPN 한만정 해설위원은 “손민한, 염종석은 모두가 아팠던 인물이다. 4년간 아픈 선수들로 채워진 롯데는 성적이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 해보고 죽자는, ‘깡다구’와 ‘앗싸리’가 폭발한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이 같은 성적은 설명될 수가 없다”고 설명한다.
KBS해설위원 하일성 씨는 “4년간의 고통이 내려갈 데도 없을 정도고, 위기의식으로 작용했다. 특히 고참 선수들은 배수진을 쳤다. 야구를 못할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직접 봤지만 자유시간에도 노는 선수 없이 모두 야간훈련 하는 것을 보고 이 팀은 올해 뭔가 되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코칭스태프가 자신감을 심어준 게 크게 작용했다”고 말한다.
박빙의 경기, 팬들 매료 평일 만원 관중
‘부산일보’ 야구담당 유명준 차장은 “우선 연달아 꼴찌를 하면서, 팀의 고참 선수들이 많이 물갈이가 됐다. 중견 선수들의 파이팅 플러스 알파 정도다. 팀 분위기가 경상도 사람들 기질이 엉켜 있어서 편하게 된 데다 감독이 편하게 해주니, 내부적으로 쌓였던 역량들이 양 감독과 함께 폭발한 것이다”고 분석했다. 3566일. 5월13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가 벌어진 롯데의 홈인 사직구장이 1995년 8월9일 해태(현 기아)전 이후 평일 관중 만원을 이루기까지 걸린 날들이다. 전 구장을 통틀어 평일 만원 관중은 97년 9월11일 LG와 해태의 잠실경기 이후 8년 만에 처음이다. 사직구장이 사흘 연속 만원을 기록한 것은 95년 5월16일부터 시작된 LG와의 3연전 이후 10년 만의 일이다. 페넌트레이스에서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한 적이 없는 롯데가 이렇듯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니는 것은 성적 때문이 아니었다.
우승 전력은 아니었지만, 롯데 경기는 매번 관중의 호흡을 불규칙적으로 뛰게 만드는 박빙의 경기를 펼친다는 점이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84년과 92년 우승을 차지했을 때도 극적인 역전 우승은 부산 팬들의 가슴에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다.
삼성과의 경기에서 역투하고 있는 롯데의 에이스 손민한.
바로 이것이 승부에 연연하는 것보다 그 순간순간에 폭발하는 롯데 팬인 ‘부산 갈매기’들이 롯데 경기를 보러 가는 이유다. 관중석으로 넘어오는 공을 잡을라치면 ‘아 주라(어린이에게 줘라)’고 외치는 함성, 라이터 불꽃 내기, 신문지 찢어 흔들기, 경기장 전체가 카드섹션 하듯 일어나는 파도타기 등 다른 야구 팬들과는 차별화된 독특한 응원문화는 누가 봐도 신명나는 것임이 틀림없다.
유격수 박기혁의 호쾌한 타격 모습.
팀에 신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정수근을 칭찬하는 목소리도 많다. 한만정 해설위원은 “정수근은 지난해 혈기를 다스리지 못해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런데 요사이 그의 눈빛을 보라. 심상치 않다. 눈이 살아 있다. 더그아웃에서 보면 더 잘 보인다. 한마디로 정신적인 재활에 성공한 것이다”고 치켜세웠다. 구단 관계자는 “가장 인기 있는 선수는 역시 정수근이다. 부산 사람 기질에 맞는 선수다. 빨리 정착해서 팬들을 불러모으는 기량을 보여줘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