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 인구 시아파의 정국 장악 ‘기정사실’
선거는 예정대로 치러졌지만 불안한 치안 상황은 선거 과정에서 적잖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저항세력의 공격으로 일부 지역에서 투표자들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항세력이 점령한 투표소는 한 곳도 없었다. 전체 5232개 투표소 중 98.8%에 해당하는 5171개가 문을 열었다. 평화적 선거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예정대로 선거가 치러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잠정 집계에 따르면 1400만 유권자 중 800만 정도가 투표에 참여해 약 60%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수십명이 죽어나가는 상황임을 고려할 때 대단히 높은 투표율임이 틀림없다. 현지에 파견된 서방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쿠르드족 밀집 도시나 시아파 무슬림 밀집 도시들은 80%가 넘는 투표율을 보였으며, 수니 무슬림 인구가 많은 도시들은 투표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고 한다. 사담 후세인의 고향인 티크리트 지역의 투표함은 거의 빈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는 이번 선거에 대한 이라크 내 각 세력의 태도를 나타내준다. 시아 무슬림과 쿠르드족은 이번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선거를 통해 얻을 ‘파이’가 크기 때문이다. 반면 선거에서 얻을 것이 별로 없는 수니 무슬림은 선거를 보이콧했다.
이라크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시아파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수니파가 선거를 보이콧한 상황에서 인구의 15∼20%를 차지하는 쿠르드족이 시아파에 이어 두 번째 주요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리란 것 또한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다만 시아파 세력 가운데서 종교적 시아파가 주축이 된 ‘연합 이라크동맹’과 세속적 시아파 중심의 ‘이라크 리스트’ 중 누가 더 많은 지지를 얻느냐가 이번 선거의 관심사였다(상자기사 참조).
수니파 국가의회 선거 ‘보이콧’
35%가량이 집계된 중간발표에 따르면 연합 이라크동맹이 약 60%를 득표해 18% 정도를 득표한 이라크 리스트를 크게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선거에서 선거관리를 담당한 ‘이라크 독립 선거위원회(IECI)’에 따르면 이 집계는 이라크 18개 주 중 10개 주의 투표 결과를 반영한 것으로, 이들 10개 주는 모두 시아파의 밀집 주인 것으로 알려졌다. 선거의 최종 결과는 2월 중순에 발표될 예정인데 연합 이라크동맹이 45% 내외로 득표해 1위를 차지하고, 그 뒤를 이라크 리스트와 쿠르드 동맹 리스트가 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가지 알 야웨르(현 대통령),무흐신 압델 하미드(전 과도통치위원장),이야드 알라위(현 총리),압델 아지즈 알 하킴(이슬람혁명위원회 의장),알리 알 시스타니(시아파 최고 종교지도자), 무크타다 알 사드르(강경 시아파 지도자), 마수드 바르자니(쿠르드민주당 당수),잘랄 탈라바니(쿠르드애국연합 당수)(왼쪽위부터)
그러나 수니파는 국가의회 선거에는 보이콧했지만, 주의회 선거의 경우 일부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쿠르드족이 자신들의 자치지역으로 편입시키려 하는 이라크의 대표적 유전지대인 키르쿠크의 경우, 이 지역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는 수니파가 대거 투표에 참여한 것이 대표적이다.
수니파 세력은 차기 정부가 결국은 끌어안고 가야 할 세력이다. 한 나라의 인구 20%가 체제에 대한 단순 불만세력이 아닌 적대세력이라면, 이번 선거의 최대 목표 중 하나인 이라크 안정화는 애당초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 승리가 예상되는 인사들 대부분이 선거 결과에 상관없이 이후 정책 결정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수니파를 참여시킬 것을 약속한 상황에서, 이에 대해 수니파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가 향후 이라크 안정화에 핵심 사항으로 떠올랐다.
이번 선거에는 이라크 국민뿐 아니라 해외에 거주하는, 이라크에서 출생한 사람과 그들의 18세 이상 직계 자녀 모두가 인종·국적·종교·성별에 관계없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14개 국가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투표에 참여했다. 이들 대부분은 사담 정권시절 해외로 추방되거나 도피, 망명한 사람들과 그 후손으로 약 10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26만명가량이 투표에 참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이라크 출신 유대인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지는 재미있는 상황이 나오기도 했다. 과거 이라크는 이스라엘의 가장 큰 적국이었는데 인종은 유대인, 종교는 유대교, 국적은 이스라엘인 사람들이 이라크 국가의회 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이라크의 현실 정치에 별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라크와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아 인접 국가이자 아랍 국가인 요르단으로 건너가 투표를 해야 한다는 제약 때문에 대부분이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자신들 손으로 첫 정부 수립 기회
이번 선거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먼저 이번 선거로 이라크 국민은 50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들의 손으로 자신들의 정부를 세우게 되었다. 둘째, 이라크 건국 이래 시아파가 정권을 잡는 첫 번째 선거다. 마지막으로 레바논을 제외하면 의회가 실질적 권한을 갖는 첫 번째 아랍국가가 된다(다른 아랍국가의 경우 의회는 최고통치권자의 거수기에 불과하다).
분명 선거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크지만 이는 이라크의 안정화로 가는 첫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선거에서 선출된 275명의 의원들이 제정할 이라크 새 헌법은 이라크가 세속국가가 될지 종교국가가 될지, 쿠르드족의 지위는 어떻게 될지, 통합국가가 될지 연방제 국가가 될지, 아랍국가로 정의될지 부분적 아랍국가가 될지 등을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분열과 갈등의 싹은 존재하며 언제라도 최악의 상황으로 갈 수 있다. 새로 탄생될 이라크 정부는 이 모든 과제를 풀어야 한다. 언제나 선거 뒤엔 승리의 기쁨보다 이행해야 할 책임과 과제가 더 큰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