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에 바티칸 광장을 가득 메운 가톨릭 신자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교황 피우스 11세(재위 1922~39)와 피우스 12세(1939~58)는 국가사회주의의 구호에 매료되어, 혹은 나치가 내건 반유대주의에 사로잡혀 나치 정권이 유대인을 박해하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그뿐 아니라 박해를 선동하고 조장하기까지 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고, 바티칸 교황청은 이런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나름의 해명 자료들을 내놓곤 했다. 그렇지만 비밀문서 보관소의 1차 사료들을 공개하지 않은 채 내놓은 자료들은 대부분 변명 일색이었다. 때문에 일반인들의 의혹을 불식하기에는 충분치 못했다.
교황청, 유대인 박해설은 근거 없어
그러던 중 최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명에 의해 바티칸 비밀문서 보관소의 문이 열려 다시금 나치와 교황청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불붙었다. 1612년 교황 바오로 5세가 교황청에 관련된 문서들을 모아 세운 바티칸 비밀문서 보관소는 세계에서 고문서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스위스인 초병이 지키는 이 보관소에는 아예 잉크 필기구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오직 연필로 메모하는 것만이 허용될 뿐이다. 이처럼 엄격한 규칙으로 관리되는 보관소의 문서들은 작성한 지 80년이 지난 다음에 공개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유대인과의 화해를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현 교황의 뜻에 따라 예정보다 일찍 그 문이 열리게 되었다.
공개된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하려면 앞으로도 수년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교황청이 유대인에게 해를 끼쳤다는 비난은 별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예컨대 1933년 4월 독일에서 대대적인 유대인 상점 불매운동이 벌어졌을 때 당시 교황청 대사로 베를린에 있던 체사레 오르세니고 대주교는 이를 ‘나치 정권이 기록하는 역사의 첫번째 오점’으로 바티칸에 보고했다. 또 피우스 11세는 이 사태에 대한 유감을 표시할 것을 대사에게 지시했다. 그 외에도 1937년 오르세니고 대주교가 히틀러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았지만 교황이 이를 금하는 등 당시 교황이 히틀러와 나치의 집권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렇다고 해서 바티칸 교황청이 모든 비난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특히 이번 자료 공개를 통해 드러난 교황청과 나치 정권 간의 ‘불가침 조약’은 가톨릭교회 2000년 역사에 큰 오점으로 남을 만한 실책임이 분명하다.
사실 바티칸 교황청은 히틀러의 등장을 처음부터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후에 피우스 12세가 되는 에우제니오 파첼리는 1917년부터 뮌헨에서 바티칸 대사로 근무했다. 그는 이때 이미 히틀러와 그의 정당이 ‘이 시대에 가장 위험한 교회의 적대세력’이 될 것임을 눈치채고 있었다. 나치의 정강정책에는 매우 과격한 기독교 정책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과 투쟁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해 기독교의 이념이 변질되었다. 그러므로 성서와 교회에 대한 정화(淨化) 작업이 필요하다….”
나치의 이러한 주장은 가톨릭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대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0년 마인츠 주교단회의는 가톨릭교도의 나치당 입당 금지와 나치당원에 대한 영성체 배부 금지를 결의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제재들이 가해졌다.
히틀러와 나치 정권 시절의 교황 피우스 11세, 12세(왼쪽부터).
사실 히틀러의 다음 목표는 가톨릭 정당 ‘첸트룸(Zentrum)’을 붕괴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독일 유권자의 3분의 1에 달하는 가톨릭교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티칸 교황청이 첸트룸에게 해산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그 대가로 교황청과 독일 간의 불가침협약 체결을 제의했다. 피우스 11세는 독일 내의 가톨릭교도 보호와 그들에 대한 영향력 유지를 위해, 또 나치 정권과의 전면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히틀러의 손을 잡고 말았다.
협약 불구 유대계 성직자들 희생
1933년 3월28일 풀다에서 열린 주교단회의는 나치 정당에 대한 경계와 금지령 철회를 가결했다. 덧붙여 독일 내 가톨릭교도들에게도 ‘정당한 권위에 대한 복종’을 권고했으며 독일 주교단의 이름으로 히틀러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기까지 했다. 베를린 주교 콘라드 폰 프라이징 등이 반발했지만 대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교황청과의 협약 체결은 히틀러 정권에게 교황 명의의 신임장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나치의 유대인 압살정책은 더욱 공공연히, 극단적인 형태로 자행될 수 있었다.
이처럼 중요한 순간에 다년간 독일 대사로 있으면서 독일 사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리고 후에 교황 피우스 12세가 된 파첼리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후에 성인으로 추앙된 파첼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가 언론을 통해서 독일 주교단의 결정을 처음 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문서들의 내용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당시 교황청 외무성 장관이었던 파첼리는 독일 주교단이 방향을 선회할 것 같다는 오르세니고의 보고를 수일 전에 받았으며, 오히려 그 전에 그렇게 전환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는 권고를 담은 친서를 독일 주교단에게 보내기까지 했다.
일찍이 피우스 11세는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협상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이때 그가 관심을 기울인 ‘영혼’은 오직 가톨릭교도였을 뿐이다. 이러한 정책 노선에 따라 교황청은 스탈린과 무솔리니, 히틀러와 차례로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중요한 것은 오직 가톨릭교회와 신도들이 보호받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들이 어떤 정책을 표방하는지, 그 결과로 가톨릭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 어떤 피해가 돌아가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더욱이 바티칸 교황은 이러한 ‘묵인 정책’을 통해 바라던 결과를 얻지도 못했다. 수녀 철학자로 유명한 에디트 슈타인을 비롯해 유대인 혈통을 가진 수백명의 가톨릭 성직자들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나치와 교황청의 협약은 종교가 인류의 고통과 탄식에 대해 귀를 막는 것은 결코 현명한 정책이 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