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으로 기억되는 미얀마(옛 버마)는 아프가니스탄처럼 고립된 나라다. 40만 정부군과 수백 명 고급장교단의 충성을 바탕으로 한 군부독재가 국민들의 민주화 숨통을 죄어온 지 오래다.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투옥과 고문은 일상적이다. 4월9일 유럽연합(EU)은 이런 미얀마에 대한 제재를 6개월 더 연장했다. 무기수출 금지, 군사정권(junta) 지도부와 그 가족들에 대한 비자 발급 금지, 그리고 빈민구호를 위한 구호를 뺀 모든 원조를 중지하는 제재조치다. 미국도 EU와 마찬가지의 제재를 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국제적 압력을 받는 미얀마에 최근 주목할 만한 ‘사건’이 생겼다. 지난 5년 동안 입국이 금지되었던 유엔 인권특사가 입국해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온 민주화 지도자 아웅산 수지를 만났다. 이로써 민주화의 숨통이 트일지도 모른다는 성급한 기대마저 나오고 있다.
군사정권의 눈엣가시 아웅산 수지
올해 55세인 아웅산 수지는 ‘동남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여겨져 온 인물이다. 미얀마 국민들에게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수지는 유신독재 시절 김대중씨가 ‘재야인사’ 혹은 ‘선생’으로 통했듯이, 국민들 사이에 ‘여사’(The Lady)로 통한다. 군정 당국은 수지를 미얀마 수도 랑군(양곤)에 있는 자택에 가둔 채 수사기관 요원들을 시켜 ‘여사’의 일거수 일투족을 일일이 감시한다. 수지는 지금의 민주화투쟁을 ‘제2의 독립투쟁’이라고 한다. 미얀마 독립투쟁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그녀의 부친 아웅산 장군을 떠올리면, 부녀가 2대에 걸쳐 독립투쟁을 벌이는 셈이다. 젊은 시절 영국으로 유학 갔던 그녀는 1988년 두 아들과 남편을 영국에 남겨두고, 귀국해 민주화운동에 불을 지폈다. 그해 여름, 군사정부는 무자비한 살육으로 민주화운동을 짓밟았다. 1990년 선거에서 그녀를 중심으로 한 정치조직인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연합’(NLD)이 82%의 득표력을 보였음에도, 군사정권은 선거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권을 넘기길 거부했다.
버마라는 국호를 미얀마로 바꾼 군사정권에게 아웅산 수지는 그야말로 눈엣가시다. 그러나 국제 여론 때문에 그녀를 구속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그저 제 발로 국외로 나가주기만 바라는 상황이다. 그러나 수지는 군사정권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질 않고 있다. 지난 91년 수지에게 노벨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하였을 때도 그녀는 시상식에 아들을 대신 보냈다. 99년 3월 그녀의 영국인 남편 미셀 아리스(옥스퍼드대 교수)가 전립선암으로 죽어갈 때도 출국을 유도하는 군 당국의 제의를 거절하고 임종을 지키러 나가지 않았을 정도다.
그때까지 3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남편이 미얀마로 들어와 마지막으로 아내의 얼굴을 보고자 했으나, 군사정권은 입국비자를 발급하지 않아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인권탄압 비난에 눈도 꿈쩍 않는 모습으로 일관해 왔다. 어디까지나 ‘주권국가의 국내문제’라는 것이다. 미얀마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는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농업국가이니 식량은 걱정 없고 다른 부문들도 외국 의존도가 낮은 자급자족국가이기 때문이다.
아웅산 수지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처럼 비폭력 전술을 바탕으로 평화로운 민주개혁과 자유선거를 주창해 왔다. 지난 3년 동안 수지는 지방의 지지자들을 만나러 나갈 수 없었다. 98년 여름엔 민주화투쟁의 일환으로 지방 나들이에 나섰다가 길을 가로막는 군 당국에 맞서 랑군 교외 차 속에서 닷새동안 버티다 떠밀려 돌아온 적도 있다. 한 달 뒤에는 기차를 타고 지방도시로 가려고 길에서 13일 동안이나 버티다 건강을 해치기도 했다.
수지가 이끄는 NLD는 힘들고 외로운 민주화 투쟁을 벌여왔다. 지방의 많은 곳에서 NLD 조직은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사실상 붕괴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를테면 북버마의 중심지역인 만달라이 NLD 지부의 경우, 군사정권이 건물주에게 압력을 가해 당사를 비우도록 하여, 거리에 나앉도록 만들었다. 지난 70, 80년대 한국의 민주화세력이 받던 탄압의 모습을 빼닮았다. 당원 개개인에 대한 압력도 거세 수천 명에 이르는 당원들이 탈당계를 낸 것으로 알려진다.
군사정권은 아웅산 수지를 격리시키는 한편으로 NLD 내부의 불화를 조장하려는 정치공작을 꾀해왔다. 일부 정상배를 내세워 NLD 지도권을 장악하려는 최근의 움직임도 그러하다. 미얀마 군정에 대항해 온 또 다른 세력은 소수민족들이다. 미얀마는 인구 4200만 명으로 68%가 버마족, 나머지는 소수민족으로 2대 소수민족은 샨족(9%)과 카렌족(7%)이다. 이들 소수민족은 군사정권에 대해 자치를 부르짖으며 무장투쟁을 벌여 왔으나, 90년대 말 들어 거의 궤멸한 상태다. ‘신의 군대’를 이끌며 정부군에 맞서다가, 올 들어 태국으로 피신해 온 10대 쌍둥이 형제도 카렌족 출신이다.
미얀마 군사정권은 노예노동에 가까운 강제노동으로도 악명이 높다. 도로건설 등 정부가 주관하는 각종 공사에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 봉건적인 부역이나 다름없다. 이 때문에 국제노동기구(ILO)의 거센 비난을 받아왔다.
그런 미얀마에 이즈음 들어 작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4월 들어 유엔 인권특사인 파울로 피네이로가 미얀마에 입국해 사흘 동안에 군사정권 지도부와 대화를 나누었고,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인물로 지난 10월 이후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놓인 아웅산 수지를 만난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미얀마 군사정권은 유엔 특사의 미얀마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군정당국이 피네이로의 입국을 허락한 것은 날로 높아 가는 국제사회의 비난여론을 덜어보려는 속셈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지난 3월 군인의 날에 군정 지도자 탄 쉐 장군은 아웅산 수지와의 관계 개선을 추진할 뜻을 비쳤다. 그는 민주제도의 정착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도 비쳤다. 그렇다고 미얀마에 민주화의 봄이 올 것으로 점치기는 이르다. 탄 쉐 장군의 민주화 운운은 그저 원론적인 수준에서의 정치수사학일 뿐이다. 미얀마 군당국이 민주화에 진지한 관심을 품고 헌법개정, 나아가 총선을 기획하고 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국제적 압력을 받는 미얀마에 최근 주목할 만한 ‘사건’이 생겼다. 지난 5년 동안 입국이 금지되었던 유엔 인권특사가 입국해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온 민주화 지도자 아웅산 수지를 만났다. 이로써 민주화의 숨통이 트일지도 모른다는 성급한 기대마저 나오고 있다.
군사정권의 눈엣가시 아웅산 수지
올해 55세인 아웅산 수지는 ‘동남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여겨져 온 인물이다. 미얀마 국민들에게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수지는 유신독재 시절 김대중씨가 ‘재야인사’ 혹은 ‘선생’으로 통했듯이, 국민들 사이에 ‘여사’(The Lady)로 통한다. 군정 당국은 수지를 미얀마 수도 랑군(양곤)에 있는 자택에 가둔 채 수사기관 요원들을 시켜 ‘여사’의 일거수 일투족을 일일이 감시한다. 수지는 지금의 민주화투쟁을 ‘제2의 독립투쟁’이라고 한다. 미얀마 독립투쟁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그녀의 부친 아웅산 장군을 떠올리면, 부녀가 2대에 걸쳐 독립투쟁을 벌이는 셈이다. 젊은 시절 영국으로 유학 갔던 그녀는 1988년 두 아들과 남편을 영국에 남겨두고, 귀국해 민주화운동에 불을 지폈다. 그해 여름, 군사정부는 무자비한 살육으로 민주화운동을 짓밟았다. 1990년 선거에서 그녀를 중심으로 한 정치조직인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연합’(NLD)이 82%의 득표력을 보였음에도, 군사정권은 선거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권을 넘기길 거부했다.
버마라는 국호를 미얀마로 바꾼 군사정권에게 아웅산 수지는 그야말로 눈엣가시다. 그러나 국제 여론 때문에 그녀를 구속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그저 제 발로 국외로 나가주기만 바라는 상황이다. 그러나 수지는 군사정권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질 않고 있다. 지난 91년 수지에게 노벨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하였을 때도 그녀는 시상식에 아들을 대신 보냈다. 99년 3월 그녀의 영국인 남편 미셀 아리스(옥스퍼드대 교수)가 전립선암으로 죽어갈 때도 출국을 유도하는 군 당국의 제의를 거절하고 임종을 지키러 나가지 않았을 정도다.
그때까지 3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남편이 미얀마로 들어와 마지막으로 아내의 얼굴을 보고자 했으나, 군사정권은 입국비자를 발급하지 않아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인권탄압 비난에 눈도 꿈쩍 않는 모습으로 일관해 왔다. 어디까지나 ‘주권국가의 국내문제’라는 것이다. 미얀마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는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농업국가이니 식량은 걱정 없고 다른 부문들도 외국 의존도가 낮은 자급자족국가이기 때문이다.
아웅산 수지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처럼 비폭력 전술을 바탕으로 평화로운 민주개혁과 자유선거를 주창해 왔다. 지난 3년 동안 수지는 지방의 지지자들을 만나러 나갈 수 없었다. 98년 여름엔 민주화투쟁의 일환으로 지방 나들이에 나섰다가 길을 가로막는 군 당국에 맞서 랑군 교외 차 속에서 닷새동안 버티다 떠밀려 돌아온 적도 있다. 한 달 뒤에는 기차를 타고 지방도시로 가려고 길에서 13일 동안이나 버티다 건강을 해치기도 했다.
수지가 이끄는 NLD는 힘들고 외로운 민주화 투쟁을 벌여왔다. 지방의 많은 곳에서 NLD 조직은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사실상 붕괴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를테면 북버마의 중심지역인 만달라이 NLD 지부의 경우, 군사정권이 건물주에게 압력을 가해 당사를 비우도록 하여, 거리에 나앉도록 만들었다. 지난 70, 80년대 한국의 민주화세력이 받던 탄압의 모습을 빼닮았다. 당원 개개인에 대한 압력도 거세 수천 명에 이르는 당원들이 탈당계를 낸 것으로 알려진다.
군사정권은 아웅산 수지를 격리시키는 한편으로 NLD 내부의 불화를 조장하려는 정치공작을 꾀해왔다. 일부 정상배를 내세워 NLD 지도권을 장악하려는 최근의 움직임도 그러하다. 미얀마 군정에 대항해 온 또 다른 세력은 소수민족들이다. 미얀마는 인구 4200만 명으로 68%가 버마족, 나머지는 소수민족으로 2대 소수민족은 샨족(9%)과 카렌족(7%)이다. 이들 소수민족은 군사정권에 대해 자치를 부르짖으며 무장투쟁을 벌여 왔으나, 90년대 말 들어 거의 궤멸한 상태다. ‘신의 군대’를 이끌며 정부군에 맞서다가, 올 들어 태국으로 피신해 온 10대 쌍둥이 형제도 카렌족 출신이다.
미얀마 군사정권은 노예노동에 가까운 강제노동으로도 악명이 높다. 도로건설 등 정부가 주관하는 각종 공사에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 봉건적인 부역이나 다름없다. 이 때문에 국제노동기구(ILO)의 거센 비난을 받아왔다.
그런 미얀마에 이즈음 들어 작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4월 들어 유엔 인권특사인 파울로 피네이로가 미얀마에 입국해 사흘 동안에 군사정권 지도부와 대화를 나누었고,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인물로 지난 10월 이후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놓인 아웅산 수지를 만난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미얀마 군사정권은 유엔 특사의 미얀마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군정당국이 피네이로의 입국을 허락한 것은 날로 높아 가는 국제사회의 비난여론을 덜어보려는 속셈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지난 3월 군인의 날에 군정 지도자 탄 쉐 장군은 아웅산 수지와의 관계 개선을 추진할 뜻을 비쳤다. 그는 민주제도의 정착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도 비쳤다. 그렇다고 미얀마에 민주화의 봄이 올 것으로 점치기는 이르다. 탄 쉐 장군의 민주화 운운은 그저 원론적인 수준에서의 정치수사학일 뿐이다. 미얀마 군당국이 민주화에 진지한 관심을 품고 헌법개정, 나아가 총선을 기획하고 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