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흑인음악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60년대. 전쟁의 공포에서 서서히 벗어났지만 한국의 상황은 한편으론 제3공화국 특유의 ‘잘살아 보세’의 역동적인 선동이 장밋빛 희망을 방목하고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론 파시즘의 그늘이 차츰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블루스와 재즈의 아들인 리듬앤드블루스는 전국에 산재한 미군기지 사병클럽에서 머나먼 이국땅으로 배치받은 흑인 병사들의 심금을 달랬다. 마침내 1968년 신중현의 프로듀스에 의해 펄시스터즈의 데뷔 음반이 폭발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허리띠를 졸라 맨 이 땅의 대중에게 강렬한 표정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우리는 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당대 리듬앤드블루스의 정상 자리를 순식간에 찬탈해버린 박효신의 두번째 앨범을 감상한다. 그가 이 새로운 세기에 등장한 최고의 보컬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갈래는 좀 다르지만 조용필 전인권 김현식 임재범으로 이어지는 명보컬리스트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가장 유력한 후보라는 것은, 그의 데뷔 앨범과 최근에 발표된 들국화 트리뷰트 앨범에서 역전의 맹장 권인하와 듀오를 이뤄 부른 ‘그것만이 내 세상’의 압도적인 호소력만으로 이미 충분하다.
그것은 윤상이 프로듀스를 맡고 최고의 작곡가들인 김동률과 유희열이 참여한 초호화판 두번째 앨범 ‘Second Story’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는다. 도대체 만 스무살이 되지 않은 청년의 목소리 어디에서 그 깊고 푸른 솔(soul)의 통찰력이 솟아오르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좀더 요구하고 싶어진다. 스타 작곡가들의 퍼레이드는 이 앨범의 피상적인 반짝임 이상의 카리스마를 분만하지 못하며(오히려 최재은이나 조우진 같은 신예 작곡가들의 곡이 훨씬 신선하다), 뉴욕의 스튜디오나 Take6 같은 미국의 뮤지션들의 참여 역시 감동의 핵심을 명쾌하게 관통하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 어설프긴 했지만 99년 말 발표된 그의 데뷔 앨범에서 선보였던 자작곡들은 아예 자취를 감춰버렸다. 우리는 이 앨범의 풍요로운 볼륨에서 무엇인가 상실해버린 아우라를 원하는 것이다.
69년 흑인 솔 음악을 극적으로 소화한 박인수의 ‘봄비’와 임아영의 ‘미련’에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흑인 음악 특유의 풀뿌리 같은 억센 생명력과 틀지워지지 않으려는 거센 자유의 혼이 아롱졌다. 어느 누가 이 절멸의 정점에서 조악한 녹음과 믹싱 수준을 책잡을 것인가.
요즘의 조류인 이 세련된 매끄러움은 하나의 트렌드일 뿐 흑인음악의 정통적인 정신과는 거리가 먼 요소들이다. 여기에 눈머는 한 우리는 풍요 속의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Urban R&B고 보사노바고 탱고고 펑키고 재즈고 다 좋다.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신인에게 너무 가혹한 요구일는지는 모르겠지만, 박효신에게는 성장논리보다 원점 회귀 본능이 앞으로 더 필요하다. 그럴 때만이 그는 그저 노래 잘 부르는 가수에서 벗어나 위기에 빠진 한국 대중음악의 대들보가 되어 줄 것이다. 그는 그런 자격이 충분히, 넘칠 정도로 있는 것이다.
블루스와 재즈의 아들인 리듬앤드블루스는 전국에 산재한 미군기지 사병클럽에서 머나먼 이국땅으로 배치받은 흑인 병사들의 심금을 달랬다. 마침내 1968년 신중현의 프로듀스에 의해 펄시스터즈의 데뷔 음반이 폭발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허리띠를 졸라 맨 이 땅의 대중에게 강렬한 표정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우리는 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당대 리듬앤드블루스의 정상 자리를 순식간에 찬탈해버린 박효신의 두번째 앨범을 감상한다. 그가 이 새로운 세기에 등장한 최고의 보컬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갈래는 좀 다르지만 조용필 전인권 김현식 임재범으로 이어지는 명보컬리스트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가장 유력한 후보라는 것은, 그의 데뷔 앨범과 최근에 발표된 들국화 트리뷰트 앨범에서 역전의 맹장 권인하와 듀오를 이뤄 부른 ‘그것만이 내 세상’의 압도적인 호소력만으로 이미 충분하다.
그것은 윤상이 프로듀스를 맡고 최고의 작곡가들인 김동률과 유희열이 참여한 초호화판 두번째 앨범 ‘Second Story’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는다. 도대체 만 스무살이 되지 않은 청년의 목소리 어디에서 그 깊고 푸른 솔(soul)의 통찰력이 솟아오르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좀더 요구하고 싶어진다. 스타 작곡가들의 퍼레이드는 이 앨범의 피상적인 반짝임 이상의 카리스마를 분만하지 못하며(오히려 최재은이나 조우진 같은 신예 작곡가들의 곡이 훨씬 신선하다), 뉴욕의 스튜디오나 Take6 같은 미국의 뮤지션들의 참여 역시 감동의 핵심을 명쾌하게 관통하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 어설프긴 했지만 99년 말 발표된 그의 데뷔 앨범에서 선보였던 자작곡들은 아예 자취를 감춰버렸다. 우리는 이 앨범의 풍요로운 볼륨에서 무엇인가 상실해버린 아우라를 원하는 것이다.
69년 흑인 솔 음악을 극적으로 소화한 박인수의 ‘봄비’와 임아영의 ‘미련’에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흑인 음악 특유의 풀뿌리 같은 억센 생명력과 틀지워지지 않으려는 거센 자유의 혼이 아롱졌다. 어느 누가 이 절멸의 정점에서 조악한 녹음과 믹싱 수준을 책잡을 것인가.
요즘의 조류인 이 세련된 매끄러움은 하나의 트렌드일 뿐 흑인음악의 정통적인 정신과는 거리가 먼 요소들이다. 여기에 눈머는 한 우리는 풍요 속의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Urban R&B고 보사노바고 탱고고 펑키고 재즈고 다 좋다.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신인에게 너무 가혹한 요구일는지는 모르겠지만, 박효신에게는 성장논리보다 원점 회귀 본능이 앞으로 더 필요하다. 그럴 때만이 그는 그저 노래 잘 부르는 가수에서 벗어나 위기에 빠진 한국 대중음악의 대들보가 되어 줄 것이다. 그는 그런 자격이 충분히, 넘칠 정도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