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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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자금 1197억원 횡령 ‘회오리’

국정원, 안기부 예산 이례적 공개 … 총액 5000억~6000억원에 통장만 8000여개 ‘요지경’

  • < 김 당 기자 dangk@donga.com>

    입력2005-02-15 13: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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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부 자금 1197억원 횡령 ‘회오리’
    한쪽 팔을 내주고 상대방의 목숨을 노린다? 국가정보원이 2월20일 열린 국회 정보위(위원장 김명섭)에 보고한 ‘안기부 예산 횡령’ 사건에 대한 자체조사 결과는 바로 그런 살수(殺手)가 담긴 ‘고육지책’이었다. 정보위가 열려도 문서로는 보도자료를 거의 발표하지 않아 온 국정원이 이날만큼은 전신(前身)인 안기부의 예산 운용과 관련된 상세자료를 미리 작성해 언론에 배포한 것도 이례적이다. 국정원은 이날 관련자료를 정보위 민주당 간사인 문희상 의원을 통해 발표하는 등 ‘전격발표’를 위한 사전 준비에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임동원 국정원장이 이날 정보위 보고에서 96년 15대 총선 및 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직전 구 여권에 유입된 안기부 자금의 조성과정 및 지출명세 등에 관한 세부사항을 공개함에 따라 ‘안기부자금 파문’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임원장은 정보위 보고를 통해 우선 안기부 예산의 선거자금 전용 사건을 ‘국고 횡령 사건’으로 분명히 규정하면서, 지난 95년 6월 지자체 선거 직전인 95년 5월부터 96년 4·11 총선 직전인 96년 1월까지 19회에 걸쳐 1197억원이 안기부 계좌에서 인출됐다는 자금흐름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임원장은 나아가 자금의 조성 경위도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함으로써 그동안 안기부 선거자금의 성격과 예산 운영을 놓고 빚어온 논란과 의문점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95~96년 19회 걸쳐 1197억원 인출

    안기부 자금 1197억원 횡령 ‘회오리’
    문희상 의원이 전한 임원장의 보고내용에 따르면, 국정원은 지난 1월 초 검찰로부터 95년도 안기부 국고수표가 정치권에 유입된 사실을 통보받고 자체조사를 실시해왔다. 이에 따라 현재까지 확인된 사항은 △95년 5월 상업은행, 투신사 등 4개 금융기관에서 257억원 △95년 10월 상업-국민은행, 투신사 등 4개 금융기관에서 140억원 △96년 1월 주택-서울은행 등 7개 금융기관에서 800억원 등 총 19회에 걸쳐 1197억원이 안기부 계좌에서 인출되었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이 돈이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민자당의 선거자금으로 유입되었다고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국정원이 자체 조사한 인출명세는 지난 1월22일 대검 중수부가 강삼재 의원(전 신한국당 사무총장)을 ‘국가예산 횡령 및 장물취득’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면서 밝힌 중간 수사결과와 일치한다. 당시 검찰이 밝힌 횡령수법은 ‘국고 수표 발행→차명계좌를 통한 돈세탁→안기부가 주로 사용하는 회사 명의로 자금 예탁 및 인출→강삼재 의원 관리 차명계좌 등에 입금→돈세탁→후보들에게 지급’이라는 흐름에 의해 진행되었다.



    검찰에 따르면 김기섭 당시 안기부 운영차장은 1995년 2월부터 10월까지 정책사업비, 특수활동비 등의 명목으로 20억~50억원씩 모두 940억원의 안기부 예산을 빼냈다. 김씨는 특히 95년에는 10억원 단위로 쪼개 140억원을 횡령했으나 선거가 임박한 96년에는 1월25일부터 27일까지 사흘에 걸쳐 800억원을 한꺼번에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김씨는 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때는 스물여섯 차례에 걸쳐 1억~30억원씩 250여억원을 인출해 당시 민자당 계좌로 전달했다. 이처럼 안기부 자체조사 결과는 검찰의 중간수사 결과와 비교했을 때 인출 시기와 액수가 정확히 일치한다. 따라서 안기부 예산(국고수표) 계좌에서 인출된 ‘그 돈’이 신한국당-민자당에 건네진 ‘그 돈’이라는 의미다. 검찰은 압수한 국고수표 44장을 그 증거물로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95년 5월부터 96년 1월까지 안기부 예산에서 빠져나간 1197억원의 ‘구멍’을 당시 김기섭 운영차장은 어떻게 메웠을까. 당시 안기부 예산은 5000억∼6000억원 규모였다. 95년부터 96년까지, 즉 94, 95년 예산을 2년간 빼돌린 것이긴 하지만 1년 예산 총액의 20%에 해당하는 1000억원이 넘는 돈이 빠져나갔을 때 과연 정상적인 살림살이가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동아일보’가 맨 처음 안기부 계좌 자금의 선거자금 전용 의혹을 보도했을 때 당시 국정원 관계자들은 “그 정도의 금액이 빠져나갔으면 직원 월급도 못 주는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라며 예산 전용 의혹을 부인했다. 그보다는 역대 기조실장(혹은 운영차장)이 관리해온 통치자금일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었다.

    바로 그 점이 걸린 듯, 국정원은 정보위 보고에서 이렇게 해명했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서 안기부 예산을 전용한 의혹을 제기해 세출예산이 제대로 집행되었는지 자체 조사했는데 예산-결산서 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올해 1월 검찰이 압수한 안기부 계좌 국고수표를 제시하며 출처 확인을 요구해왔다. 그래서 감찰실과 감사관실을 동원해 당시 예산관과 지출관 등 회계 담당관들에 대한 조사와 함께 안기부의 가차명 계좌 통장 수천 개의 입출금 명세를 정밀 조사한 결과 그 대부분이 불용액과 이자로 충당된 것으로 드러났다. 1197억원 가운데 현재 출처 확인작업이 덜 끝난 13억원 정도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출처가 전액 확인되었다.” (민주당 박상천 의원).

    감찰실과 감사관실이 예결산 관련자료를 조사하면서 뒤늦게 착안한 것은 1994년 국회에 정보위가 설치되어 예결산 심의를 받은 그해부터는 불용액과 이월액이 계상돼 있는데 93년 결산서에는 불용액과 이월액이 제로(0)로 처리된 점이다. 안기부 예산은 국회에 정보위가 설치되기 전(93년)까지는 예산결산특위에서 총액으로만 결산 심의를 받았고, 정보위가 설치된 이후(94년)부터는 세부사업별 결산 심의를 받아왔다. 그런데 국정원이 2월20일 보고한 김기섭 차장 재임시의 ‘연도별 불용액 및 이월액 현황’(‘표’ 참조)을 보면, 94년부터는 해마다 불용액(14억6000여만~161억여원)이 발생했는데 93년 10월 결산 때는 불용액과 이월액이 모두 0원으로 되어 있다.

    수천만원이라면 몰라도 수천억원 예산의 세입-세출을 0으로 맞추기는 누가 보아도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93년까지는 국회 정보위의 결산 심의 같은 아무런 감시장치 없이 재경부에 결산서만 보내면 무사 통과되었다. 전 안기부 감사관실 직원 정병주씨는 ‘Ⅱ급비밀’(미발간)이란 책에서 안기부 결산 보고의 흑막을 이렇게 폭로하고 있다.

    “감사관실로 자리를 옮긴 93년 4월, 92년도 결산보고서를 보면서 궁금한 점이 생겼다. 대통령에게 올린 안기부의 정기감사 결과보고에 전체 예산과 사용액이 같고 불용액은 0원이었다. 그러나 92년도 각 부서의 ‘세출예산 각목명세서’(歲出豫算各目明細書)에 나와 있는 예산을 다 합해도 전체 예산의 반도 안 되었다”

    실제로 국회에 정보위원회가 생기기 전까지 안기부는 자체로 실시한 회계검사 결과를 대통령에게만 보고했다. 그때까지 안기부 예산은 항상 ‘배정액=집행액, 잔액은 0’이었다. 수천억원의 예산이 1원도 안 틀리고 잔액이 0으로 처리되는 데도 역대 대통령은 아무런 의심없이 이를 재가했다. 국정원의 자체조사에 따르면 예산을 선거자금으로 불법 전용한 뒤 그 ‘구멍’의 일부를 불용액으로 메웠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정치권에 불법 전용한 불용액 규모를 약 400억원으로 추정했다. 아울러 국정원은 정보위 설치 이후에는 불용액을 전액 국고에 반납해왔다고 보고했다.

    김기섭 전 차장이 막대한 예산을 ‘흔적’ 없이 빼돌릴 수 있었던 또 다른 비밀의 열쇠는 바로 이자 수입이었다. 다른 정부 부처와 달리 안기부만은 예산(국고수표)을 분기별로 받아와 이를 은행 정기예금이나 제2금융권(종금사)에 예치해 놓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방법으로 예산을 운용해왔기 때문에 예산 횡령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당시 이자수입을 아직 확인중이라고 전제하고 그 규모를 약 700억원으로 추정했다. 아울러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문희상 기조실장이 분기별 예산 수령 관행을 바꾸어 예산 집행이 필요할 때마다 월 3~4회 분할 수령하고 있기 때문에 이자 발생액이 거의 없을 뿐더러 발생액은 전액 국고반납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결국 이 사건은 국가예산을 선거자금으로 빼돌리고 구멍난 국가예산을 이자놀음으로 메운 사건”(문희상 의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 전 차장은 불용액과 이자를 전용할 일이지 왜 본예산을 전용한 뒤에 불용액과 이자로 충당한 것일까. 실탄(선거자금)은 목돈을 일시에 줘야 하는데 정기예금을 중도 해지할 경우 이자 손실이 발생한다. 따라서 1년 동안 여러 차례 나누어 집행되는 본예산을 먼저 전용하고 그 공백을 불용예산과 이자로 충당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정원과 한나라당이 선거자금 전용에 대해 닭(본예산)이 먼저인지 달걀(불용액+이자)이 먼저인지를 따지는 것은 범죄사실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이다. 불용액이든 이자든 그것이 국가예산에서 나온 것이라면 다 국고이고 그것을 불법 전용한 것은 국고횡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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