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대학원을 폐교하라.”
요즘 대학교수 세계에서 나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 아우성은 언론매체 등을 통해 교수집단 밖으로는 절대로 표출되지 못한다. 왜 교수들은 국제대학원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으면서도 이를 공표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해답을 찾아가는 탐험은 갈팡질팡하는 교육정책의 현실과 교수 사회를 둘러싼 고질(痼疾)의 일단을 찾아내는 한 방법이 된다.
노태우정부 시절 한국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으로부터 상당한 통상 압력을 받았다. 당시 통상개방을 요구한 미국의 칼라 힐스 무역대표는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때 지식인들은 우리도 국제통상이나 국제협상 전문가를 양성해야만 세계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세계화추진위원회 등이 주동이 돼 ‘중요 대학에 영어로 국제관계학을 강의하는 국제대학원을 만들자’는 안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청와대 교육부 재경원은 95년 5개 대학에 국제대학원을 만들고, 매년 200억원씩 5년간 1000억원을 지원한다는 구체안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선발심사위를 만들자 무려 35개 대학이 지원서를 내밀었다. 심사위는 먼저 9개 대학을 추리고, 이어 서울대-연세대-고려대-이화여대-한국외대를 최종 후보로 내정했다. 그러자 마지막 단계에서 탈락하게 된 서강대-한양대-경희대-중앙대가 청와대를 상대로 거세게 항의했다.
‘뱃심 약한’ 김영삼정부는 이러한 항의를 받아들여 9개 대학 전부를 국제대학원 설립 대학으로 선발했다. 이때 8개 대학은 각자 사정에 맞는 이름을 택해 국제대학원을 출범시켰다. 그런데 서울대만은 영문-경제-정치-사회-국제경제학과 등이 “우리가 있는데 왜 옥상옥을 만드느냐”며 거세게 반대해, ‘국제지역원’으로 출범시켰다(표 참조). 서울대는 국제지역원에 전임 교수를 두지 않고 정치-경제학과 교수들이 겸임케 하는 오만을 부렸다. 또 국제관계학을 여러 학과 교수가 협동으로 가르치는 ‘학제(學際)간 협동 과정’으로 규정함으로써 국제지역원이 대학원이 되는 길을 막았다.
하지만 학위를 줘야 한다는 정부안을 수용해, 국제지역원 졸업자에게 본부 대학원장 명의로 석사학위를 주게 되었다. 이렇게 파행적인 구조인데도 ‘서울대 프리미엄’ 덕분에 서울대 국제지역원은 두 번째로 많은 국고지원금을 타내게 되었다(표 참조). 김영삼정부의 이러한 ‘서울대 제일주의’는 다른 8개 대학의 반발을 초래했다.
아무튼 9개 대학원이 선정됨으로써 5개 숟가락이 올라왔어야 할 밥상에 9개 숟가락이 놓이게 됐으니 그 누구도 배부를 수가 없다. 그래서 첫해부터 밥그릇 다툼이 벌어졌으나, 심사위는 ‘프리미엄’을 인정해 5개 대학에는 각각 32억원을 지원하고(합계 160억원), 4개 대학에는 10억원씩을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창설준비 연도(96년)가 지나가고, 97년이 돼 학생을 모집하게 되었다. 이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수학생 확보여서 각 대학원은 장학금 지급을 ‘미끼’로 내걸었다. 이렇게 되자 운영비 지출이 급증해 4개 대학원 쪽에서 “왜 우리 파이만 작은가”라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그래서 97년도에는 5개 대학 지원금은 27억∼30억원으로 줄어들고, 4개 대학 지원금은 13억∼17억원으로 늘어났다. 98년도에는 IMF 위기가 닥쳐 총 국고지원금이 160억원으로 줄어, 9개 대학원에는 엇비슷하게 15억∼20억원씩 지원되었다. 그리고 김대중정부로 정권이 바뀌자 예산권을 쥔 기획예산처가 “국제대학원이 낭비성 지출을 많이 한다”며 1999∼2000년도 총 지원금을 각각 100억원으로 삭감했다. 예산 삭감에 따른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정부는 “정부 지원으로 국제대학원이 발전하면, 향후 그 혜택은 각 대학이 누리게 된다. 따라서 각 대학 본부와 재단도 국제대학원에 투자하라. 정부는 투자규모가 큰 대학에는 국고 지원을 늘리고, 작은 대학에는 지원도 줄이는 대응지원(Matching Fund) 방식을 택하겠다”고 선언했다.
정부 예산도 제한돼 있지만, 대학 예산도 마찬가지다. 9개 대학이 대응자금 조성에 착수하자 다른 단과대나 대학원으로 가야 할 예산이 줄어들어 대학 사회에서는 국제대학원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서울대 국제지역원은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강의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국제대학원 폐교론이 힘을 얻었다. 또 ‘표’에서처럼 서울대는 대응자금을 가장 적게 조성했는데도 국고 지원은 두 번째로 많이 받은 것으로 밝혀져, 나머지 8개 국제대학원에서 “왜 정부는 서울대만 편애하는가”란 불만이 터져나왔다.
“국제대학원이 국제전문가 양성이 아니라 교포들을 끌어들여 한국학을 가르치는 곳으로 전락했다”는 비판까지도 나오게 되었다.
국제대학원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 대학원 졸업자를 외교통상부 등에서 뽑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외교통상부는 외무고시를 통해서만 들어오라고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대학원에서는 국제 통상이나 지역 연구, 외교 안보를 주로 가르치기 때문에 외교학은 전무한 상태다. 따라서 애써 키워 놓은 통상전문가나 지역 전문가들은 갈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은 뱃심 없이 국제대학원을 추진한 김영삼정부와 IMF사태를 핑계로 과거 정권이 추진한 사업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김대중정부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IMF 위기는 우리가 세계화의 물결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당하고 만 치욕적인 사건이다. 그런데도 사소한 타툼으로 국제전문가 양성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또 한 번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국제대학원을 폐교하라”는 주장을 정치 논리에 따라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살 길이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잘못된 부분은 과감히 고치며 계속 사업으로 추진해 나갈 것인가. 결정권은 김대중대통령과 문용린 교육부장관에게 쥐어져 있다.
요즘 대학교수 세계에서 나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 아우성은 언론매체 등을 통해 교수집단 밖으로는 절대로 표출되지 못한다. 왜 교수들은 국제대학원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으면서도 이를 공표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해답을 찾아가는 탐험은 갈팡질팡하는 교육정책의 현실과 교수 사회를 둘러싼 고질(痼疾)의 일단을 찾아내는 한 방법이 된다.
노태우정부 시절 한국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으로부터 상당한 통상 압력을 받았다. 당시 통상개방을 요구한 미국의 칼라 힐스 무역대표는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때 지식인들은 우리도 국제통상이나 국제협상 전문가를 양성해야만 세계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세계화추진위원회 등이 주동이 돼 ‘중요 대학에 영어로 국제관계학을 강의하는 국제대학원을 만들자’는 안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청와대 교육부 재경원은 95년 5개 대학에 국제대학원을 만들고, 매년 200억원씩 5년간 1000억원을 지원한다는 구체안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선발심사위를 만들자 무려 35개 대학이 지원서를 내밀었다. 심사위는 먼저 9개 대학을 추리고, 이어 서울대-연세대-고려대-이화여대-한국외대를 최종 후보로 내정했다. 그러자 마지막 단계에서 탈락하게 된 서강대-한양대-경희대-중앙대가 청와대를 상대로 거세게 항의했다.
‘뱃심 약한’ 김영삼정부는 이러한 항의를 받아들여 9개 대학 전부를 국제대학원 설립 대학으로 선발했다. 이때 8개 대학은 각자 사정에 맞는 이름을 택해 국제대학원을 출범시켰다. 그런데 서울대만은 영문-경제-정치-사회-국제경제학과 등이 “우리가 있는데 왜 옥상옥을 만드느냐”며 거세게 반대해, ‘국제지역원’으로 출범시켰다(표 참조). 서울대는 국제지역원에 전임 교수를 두지 않고 정치-경제학과 교수들이 겸임케 하는 오만을 부렸다. 또 국제관계학을 여러 학과 교수가 협동으로 가르치는 ‘학제(學際)간 협동 과정’으로 규정함으로써 국제지역원이 대학원이 되는 길을 막았다.
하지만 학위를 줘야 한다는 정부안을 수용해, 국제지역원 졸업자에게 본부 대학원장 명의로 석사학위를 주게 되었다. 이렇게 파행적인 구조인데도 ‘서울대 프리미엄’ 덕분에 서울대 국제지역원은 두 번째로 많은 국고지원금을 타내게 되었다(표 참조). 김영삼정부의 이러한 ‘서울대 제일주의’는 다른 8개 대학의 반발을 초래했다.
아무튼 9개 대학원이 선정됨으로써 5개 숟가락이 올라왔어야 할 밥상에 9개 숟가락이 놓이게 됐으니 그 누구도 배부를 수가 없다. 그래서 첫해부터 밥그릇 다툼이 벌어졌으나, 심사위는 ‘프리미엄’을 인정해 5개 대학에는 각각 32억원을 지원하고(합계 160억원), 4개 대학에는 10억원씩을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창설준비 연도(96년)가 지나가고, 97년이 돼 학생을 모집하게 되었다. 이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수학생 확보여서 각 대학원은 장학금 지급을 ‘미끼’로 내걸었다. 이렇게 되자 운영비 지출이 급증해 4개 대학원 쪽에서 “왜 우리 파이만 작은가”라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그래서 97년도에는 5개 대학 지원금은 27억∼30억원으로 줄어들고, 4개 대학 지원금은 13억∼17억원으로 늘어났다. 98년도에는 IMF 위기가 닥쳐 총 국고지원금이 160억원으로 줄어, 9개 대학원에는 엇비슷하게 15억∼20억원씩 지원되었다. 그리고 김대중정부로 정권이 바뀌자 예산권을 쥔 기획예산처가 “국제대학원이 낭비성 지출을 많이 한다”며 1999∼2000년도 총 지원금을 각각 100억원으로 삭감했다. 예산 삭감에 따른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정부는 “정부 지원으로 국제대학원이 발전하면, 향후 그 혜택은 각 대학이 누리게 된다. 따라서 각 대학 본부와 재단도 국제대학원에 투자하라. 정부는 투자규모가 큰 대학에는 국고 지원을 늘리고, 작은 대학에는 지원도 줄이는 대응지원(Matching Fund) 방식을 택하겠다”고 선언했다.
정부 예산도 제한돼 있지만, 대학 예산도 마찬가지다. 9개 대학이 대응자금 조성에 착수하자 다른 단과대나 대학원으로 가야 할 예산이 줄어들어 대학 사회에서는 국제대학원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서울대 국제지역원은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강의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국제대학원 폐교론이 힘을 얻었다. 또 ‘표’에서처럼 서울대는 대응자금을 가장 적게 조성했는데도 국고 지원은 두 번째로 많이 받은 것으로 밝혀져, 나머지 8개 국제대학원에서 “왜 정부는 서울대만 편애하는가”란 불만이 터져나왔다.
“국제대학원이 국제전문가 양성이 아니라 교포들을 끌어들여 한국학을 가르치는 곳으로 전락했다”는 비판까지도 나오게 되었다.
국제대학원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 대학원 졸업자를 외교통상부 등에서 뽑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외교통상부는 외무고시를 통해서만 들어오라고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대학원에서는 국제 통상이나 지역 연구, 외교 안보를 주로 가르치기 때문에 외교학은 전무한 상태다. 따라서 애써 키워 놓은 통상전문가나 지역 전문가들은 갈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은 뱃심 없이 국제대학원을 추진한 김영삼정부와 IMF사태를 핑계로 과거 정권이 추진한 사업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김대중정부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IMF 위기는 우리가 세계화의 물결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당하고 만 치욕적인 사건이다. 그런데도 사소한 타툼으로 국제전문가 양성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또 한 번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국제대학원을 폐교하라”는 주장을 정치 논리에 따라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살 길이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잘못된 부분은 과감히 고치며 계속 사업으로 추진해 나갈 것인가. 결정권은 김대중대통령과 문용린 교육부장관에게 쥐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