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게 음악이 종교라면 이 여섯 개의 모음곡은 성경과도 같습니다.”
‘이 여섯 개의 모음곡’은 뭘까? 두말할 것도 없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말일까? 선뜻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대다수 첼리스트들이, 적어도 한두 번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첼리스트들에게 주는 압도적 매력(아니, ‘마력’이라고 해야 더 적합한 표현이 될 것이다)은 그만큼 크다.
위의 인용은 미샤 마이스키의 것이다. 요요 마와 함께 가장 탁월한 현역 첼리스트로 꼽히는 그에게도 바흐의 모음곡은 영원한 숙제다. 다시 그의 말이다. “이 곡은 마치 수평선과도 같습니다. 가까이할수록 음악은 멀리 가버리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계속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알고 나면 더 이상의 갈등은 없습니다.”
그는 정말로 ‘더 이상의 갈등은 없는’ 것처럼 연주한다. 이번에 새로 낸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3CD·DG)에서, 그는 ‘질주하는 바흐’를 들려준다. 쾌도난마(快刀亂麻). 거의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빠른 속도다. 아니, 차라리 ‘과속’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로스트로포비치의 빠른 연주(EMI)에 어느 정도 면역된 사람조차도 당혹스러울 정도니까.
이러한 속도감은 마이스키가 1985년에 냈던 같은 연주곡(DG)과 비교하며 들을 때 더욱 도드라진다. 당시의 연주 속도는, 다른 어떤 첼리스트의 바흐 연주 속도보다도 더 느렸다. 바흐의 음악 세계를 더욱 꼼꼼히 짚어내기 위한 ‘현미경적’ 연주였다고 해도 그 느림의 감각은 지나쳤다. 심지어 마이스키 자신조차 놀랄 만큼.
“오케스트라 곡이 몇 개 있었고, 한 성악가, 바이올리니스트, 그리고 나서 c단조 모음곡의 부레(Bourr럆)가 흘러 나왔습니다. 마치 패러디처럼 들렸기 때문에 나는 누군가가 장난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내 음반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까무라칠 뻔했습니다. 몇 년이 넘도록 듣지 못했거든요.” 그의 고백이다.
그는 전혀 새로운 바흐를 만들기로 했다. 반복되는 부분을 빼 버렸고, 속도를 높였다. 또 300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격연주의 굴레도 과감히 벗어버렸다. 그는 바흐가 “그 시대를 훨씬 앞서는 사람” 이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더없이 경쾌하고 역동적이며 흥미진진한 ‘21세기식 바흐’를 그렸다.
과연 마이스키의 바흐는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적어도 ‘새로움’ 혹은 ‘신선함’의 감각에서 그렇다. 특히 첫인상은 논쟁의 여지 없이 충격적이다. 힘차고 빠르면서도 드라마틱하며 유연성을 잃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흥미진진하다. “추하거나 지루하게 연주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음악을 만드는 모든 방법을 인정할 수 있다”는 그의 음악관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새로운 세기의 싱싱한 활력을 반영한 바흐. 논쟁적인 바흐. 그 바흐가 사망한 지 250년이 되는 2000년을 앞두고 마이스키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
‘이 여섯 개의 모음곡’은 뭘까? 두말할 것도 없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말일까? 선뜻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대다수 첼리스트들이, 적어도 한두 번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첼리스트들에게 주는 압도적 매력(아니, ‘마력’이라고 해야 더 적합한 표현이 될 것이다)은 그만큼 크다.
위의 인용은 미샤 마이스키의 것이다. 요요 마와 함께 가장 탁월한 현역 첼리스트로 꼽히는 그에게도 바흐의 모음곡은 영원한 숙제다. 다시 그의 말이다. “이 곡은 마치 수평선과도 같습니다. 가까이할수록 음악은 멀리 가버리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계속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알고 나면 더 이상의 갈등은 없습니다.”
그는 정말로 ‘더 이상의 갈등은 없는’ 것처럼 연주한다. 이번에 새로 낸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3CD·DG)에서, 그는 ‘질주하는 바흐’를 들려준다. 쾌도난마(快刀亂麻). 거의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빠른 속도다. 아니, 차라리 ‘과속’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로스트로포비치의 빠른 연주(EMI)에 어느 정도 면역된 사람조차도 당혹스러울 정도니까.
이러한 속도감은 마이스키가 1985년에 냈던 같은 연주곡(DG)과 비교하며 들을 때 더욱 도드라진다. 당시의 연주 속도는, 다른 어떤 첼리스트의 바흐 연주 속도보다도 더 느렸다. 바흐의 음악 세계를 더욱 꼼꼼히 짚어내기 위한 ‘현미경적’ 연주였다고 해도 그 느림의 감각은 지나쳤다. 심지어 마이스키 자신조차 놀랄 만큼.
“오케스트라 곡이 몇 개 있었고, 한 성악가, 바이올리니스트, 그리고 나서 c단조 모음곡의 부레(Bourr럆)가 흘러 나왔습니다. 마치 패러디처럼 들렸기 때문에 나는 누군가가 장난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내 음반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까무라칠 뻔했습니다. 몇 년이 넘도록 듣지 못했거든요.” 그의 고백이다.
그는 전혀 새로운 바흐를 만들기로 했다. 반복되는 부분을 빼 버렸고, 속도를 높였다. 또 300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격연주의 굴레도 과감히 벗어버렸다. 그는 바흐가 “그 시대를 훨씬 앞서는 사람” 이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더없이 경쾌하고 역동적이며 흥미진진한 ‘21세기식 바흐’를 그렸다.
과연 마이스키의 바흐는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적어도 ‘새로움’ 혹은 ‘신선함’의 감각에서 그렇다. 특히 첫인상은 논쟁의 여지 없이 충격적이다. 힘차고 빠르면서도 드라마틱하며 유연성을 잃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흥미진진하다. “추하거나 지루하게 연주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음악을 만드는 모든 방법을 인정할 수 있다”는 그의 음악관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새로운 세기의 싱싱한 활력을 반영한 바흐. 논쟁적인 바흐. 그 바흐가 사망한 지 250년이 되는 2000년을 앞두고 마이스키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